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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 Miley Cy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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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 사이러스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는 10대 청소년들을 위한 디즈니채널의 TV코미디시리즈 (Hannah Montana)에 주역을 맡아 2006년 하루 밤새 대형스타로 급부상했다. 부전자전, 우연인지 필연인지 1992년 ‘Achy breaky heart'를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에 올려놓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그의 아버지 빌리 레이 사이러스(Billy Ray Cyrus)의 행운을 물려받은 것. 더욱이 ’Achy Breaky Heart‘가 빌보드차트 정상을 강타한 그해 마일리가 태어나 천우신조(天佑神助)가 따로 없었다. 1992년 11월23일,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빌리와 아내 레티시아(Leticia) 사이러스는 하늘이 내려준 딸 데스티니 호프 사이러스(Destiny Hope Cyrus)를 선물 받아 겹경사를 맞았다. 꼬마둥이 때부터 쾌활한 성격의 미소천사였던 데스티니 호프는 스마일리라는 별칭을 얻었고 그러한 연유로 지금의 마일리로 불리게 되었다. 타고난 탤런트 활동은 텔레비전 의학시리즈 (2003)의 에피소드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하면서 첫발을 내딛었다. 같은 해 그녀는 팀 버튼(Tim Burton)의 영화 (Big Fish)에서 단역으로 출연해 대형스크린에까지 발을 뻗었다. 마일리는 일찍이 노래를 쓰고 가창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관심과 자질을 개발해 나아갔다. 이제 갓 10대에 들어선 꼬마였던 그는 마침내 2005년 타고난 연기와 음악 재능을 작품에서 마음껏 펼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마일리는 의 타이틀 역으로 캐스팅되었고, 2006년 3월24일 전파를 타기 시작한 이 TV쇼 프로그램에서 그는 낮엔 평범한 여학생 마일리 스튜어트면서 밤이면 밤마다 금발의 한나 몬타나로 변신해 세계적 유명 팝 스타로서의 숨겨진 끼와 춤 실력을 발산하는 생기발랄 10대 소녀를 연기했다. 2006년 3월 “한나 몬타나”에 출연,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마일리는 청소년 시청자들의 대대적 호응에 힘입어 디즈니채널의 뉴 호프(New Hope), 힐러리 더프와 린제이 로한의 뒤를 이어 새로운 ‘드라마 퀸’으로 추대되었다. 10월엔 시트콤 에서도 음악가 아버지로 동반 출연한 그의 아버지 빌리 레이와의 듀엣노래 ’I learned from you'를 포함해, TV쇼에서 마일리가 부른 노래와 다른 삽입곡들로 구성된 사운드트랙음반이 발매되었다. 그해 가을 마일리는 디즈니가 배출한 또 다른 팝 스타 치타 걸스(Cheetah Girls)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해 관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2006년 10월 첫 번째 사운드트랙앨범 이 발매된 데 이어 2집과도 같은 더블앨범 가 2007년 11월 발매되었다. 는 발매되자 곧 빌보드차트 정상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싱글 커트된 ‘See you again'(또 봐요)은 빌보드싱글차트 탑10을 노크했다. 2008년 봄에는 45개 지역 순회공연실황을 보너스 DVD와 패키지로 묶은 (Hannah Montana/Miley Syrus: Best of Both World Concert Tour)가 음반시장에 풀렸다. 그는 또한 자신이 공동작사, 작곡에 참여한 독집 < Breakout >(2008)을 공식 발표하며 본격 팝 아티스트 활동을 공표했다. ※마일리의 형제자매들 마일리는 이복언니 브랜디(Brandi), 두 명의 이복오빠 트레이스(Trace)와 크리스토퍼 코디(Christopher Cody), 남동생 브레이슨(Braison), 그리고 여배우 여동생 노아 린제이 사이러스(Noah Lindsey Cyrus)를 가족으로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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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 : Elton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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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세상일에 아무 관심없는 천재 작곡가 대중 음악인을 ‘음악 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분류한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가 처해 있는 시대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여 대중 정서의 현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만을 표출하는 데 심혈을 쏟는 사람들이다. 두 가지 스타일이 혼재되어 있는 음악인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무게 중심은 시각(view)일 것이며 후자는 예술(art)이다. 엘튼 존은 바로 후자를 대표하는 금세기 최고 록 스타 가운데 한사람이다. 흔히 그는 1970년대를 대변하는 톱 가수로서 록 역사에 기록된다. 1970년대가 개막되면서 ‘보더 송(Border song)’을 빌보드 차트에 랭크시키며 등장한 그는 이후 당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선율로 인기 차트를 석권했다. 그의 멜로디를 뽑아내는 재주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쌍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이적이었고 또 천재적이었다. 만약 1970년대에 그가 없었더라면 팝계의 ‘예술적 활기’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관련, 록 평론가인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의 엘튼 존에 대한 서술은 참으로 맹쾌하다. “1960년대의 비치 보이스처럼 엘튼 존은 1970년대의 필수적인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그가 해악의 진부성을 축약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내 생각으로 그는 가장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마저도 생기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다.” 그런데 크리스트고도 인정하고 있듯이 1970년대는 사회성으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 록 혁명의 정신이 함몰되어 버린 ‘록 예술성의 시대’로 정의된다. 크리스트고가 그때를 ‘해악’이니 ‘유순하고 황량한 시절’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엘튼 존 스스로도 ‘음악을 만들면서 정치적 이슈를 내거는 것은 넌센스다. 세상사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서 음악하는 것뿐’ 이라며 자신의 비(非)참여적 음악관을 천명하곤 했다. 그는 “음악에 있어서 정치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1960년대 가수들을 보라. 삶은 여전히 똑같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록의 사회성에 얼마나 등을 돌렸는지는 곡 쓰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송라이터들과 달리 작사는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겼는데 당시 그의 작사 파트너는 버니 토핀(Bernie Taupin)이었다. 버니가 쓴 노랫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다. 버니는 사회를 떠난 신변잡기의 소재에 집착하면서 공상을 써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엘튼은 그의 가사를 좀처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그의 공상을 팬들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난 정말 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에 대한 노래냐고 묻기는 하지만 의미를 캐내지는 않는다. 난 그의 가사 10편에 곡을 붙일 때까지 그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다”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자기 환상만을 늘어놓는 작사가, 그것을 검증도 없이 곡을 쓰고 즐겁게 노래하는 가수, 그들에게서 시각을 바랄 수 없다. 그런 음악은 본질적으로 예술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튼 존이 1970년대의 특성을 떠 안은 인물임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있다. 1970년대는 1960년대 히피의 프리 섹스 여파로 성의 일반적 개념이 철저히 해체되어 독신, 동성애, 그룹 섹스, 배우자 바꾸기 등 새로운 섹스 스타일이 마구 고개를 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때문에 1970년대를 ‘자극의 시대’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엘튼은 소문난 양성(兩性)주의자였다. 아니, 스스로 바이 섹슈얼(Bi-sexual)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그런 충격적 신상 공개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뺀다면 록 스타들 중에서는 그에게서 최초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양성주의자가 아니라 동성주의자, 즉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 디테일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왜 그 때 호모라고 하지 않고 바이 섹슈얼이라고 했냐”하는 질문에 “아마 겁이 나서였기 때문일 거다. 진실 파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한 ‘외교적’으로 말하려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하자. - 언제부터 여성 관계를 단계적으로 끝냈는가? :끝내다니? 어떠한 여성 관계도 결코 없었다. 그 누구도 나는 끝내고 자시고 하지 않았다. - 몇 살 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았는가? :대략 23세쯤이었을 거다(그는 1947년생이므로 1970년쯤 된다). 그때가 나의 첫 실제 경험이었다. 아마 그 전부터 게이인지 알았을 텐데 23살에 실질적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 그런데 결혼은 왜 했나?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 난 결혼하면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게이야. 난 정말 불행해’라고 여기곤 했으니까. 동성연애자라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려고 결혼했다는 얘기다. 그는 1984년 독일 출신의 레코딩 엔지니어인 레니트 블라우어(Renete Blauer)와 결혼식을 올렸다. 게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사람이 여자에게 갔다는 이유로 화제를 모았던 이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87년 이혼했다. 게이 발언, 여성과 결혼, 그리고 이혼 등의 사건으로 이미 타블로이드 신문의 가십 단골이 된 그는 1988년 마침내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영국의 < 선 >지가 “엘튼이 10대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추잡한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그는 게이를 초월하는 ‘성도착증 환자’이자 ‘성격 장애자’나 다름없었다. 인간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어머니마저 창피해 스페인으로 떠나버리자 분기탱천한 그는 두주먹 불끈 쥐고 < 선 >지를 고소했고 이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그는 이 재판에서 승소해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후 언론으로부터는 ‘흥미의 대사(Ambassador of Fun)’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애초부터 매스컴과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지만-언론의 등쌀이 마릴린 먼로를 죽이게 했다는 내용을 노래 ‘바람속의 촛불(Candle in the wind)’로 알 수 있다-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영화 < 라이온 킹 >의 사운드 트랙은 ‘오늘밤 그대는 사랑을 느끼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재기한 94년까지 근 7년 간 가능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회피했다. 그의 기자 혐오증은 너무나 유명하다. 스스로도 “난 영국의 언론에 분노가 치민다. 정말로 그들이 싫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지구의 깡패들이다”라고 강도 높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언론에 대한 분노는 지금도 살아 끓어 넘친다. 올해 발표된 새 앨범의 타이틀 송 ‘메이드 인 잉글랜드(Made in England-8월 19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 52위)’가 그것을 실증해 주는 곡이다. “난 영국에서 만들어졌어. 블루 코티나차처럼 말야... ...넌 스캔들의 냄새를 좇았지. 여기 내 가운데 손가락을 봐. 난 고통의 40년을 살았어.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어... ...넌 아직도 호모라고 얘기하고 모든 사람이 웃지.” 그가 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것도 일리는 있다. 원래가 솔직하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성(性)을 고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거치면서 일반인들의 미움과 손가락질이 생겨난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그의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것도 양성주의자임을 밝힌 1976년부터였다. 그는 1989년 < 파리 마치 >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 앨범 < 레그 스트라이크스 백(Reg Strikes Back) >은 전세계적으로 판매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데 유독 영국에서만은 결과가 안 좋았다. 영국인들 대부분이 < 선 >지의 악의적인 기사를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떤 논리적인 응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과 자극’의 1970년대라는 보수 시대를 살아왔으며 보수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또 명백한 ‘록 엘리트’다. 부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음악 능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버니의 가사를 받아 기분이 좋을 때면 곡을 쓰는데 15분도 안걸린다”고 자랑했다. 그런 천부적 재능을 밑천 삼아 그는 지금까지 무려 32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이 왕성한 생산력을 아티스트의 성실성이라는 측면에서 극구 칭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틀어보면 그것은 음악 엘리트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실제로 그는 비평계 일각으로부터 ‘음악의 과소비’를 행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그가 1970년대 후반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음악할 수 있다’는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펑크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의 이름에는 ‘로커’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며 연상되는 과거의 거친 피아노 연주나 기행적 무대는 분명 폭발과 반란을 특질로 하는 록의 전형적 제스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서 그러한 ‘록의 반항적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늘밤 사랑을 느끼나요’가 말해주듯 중산층의 격조와 결탁한 ‘AOR(Adult Oriented Rock)’이나 스탠더드 팝으로 색깔을 바꾸어 안전지대에 정착해 있다. < 타임 >지는 얼마전 그의 새로운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대서특필하는 순간에도 ‘그에게는 실재(實在)하는 록 스타의 고뇌와 거친 감정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그가 ‘팝계의 불사조’라는 작위를 하사 받아야 함은 마땅하다. 정글과도 같은 팝계를 4반세기에 걸쳐 롱런한 ‘영광의 생존’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1993년에 이미 엘비스 프레슬리의 벽을 넘어 24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차트 40위권의 히트곡을 낸(올해로 그 햇수는 26년으로 늘어났다)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마흔여덟 살의 노장이 신인들 틈새에서 몇 백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리는 것 또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 나이의 사람에게 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각이 없다. 그는 4반세기 동안 그의 관점을 개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내 부진하다가 미국 사회에 보수적인 기류가 소생한 지난해(1994년) 재기한 것을 보라. 그의 노래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Goodbye yellow brick road)’ ‘오늘밤(Tonight)’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 어려워(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등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팝송 청취와 수용이 예술적 가치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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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카
멤버 : James Hetfield, Kirk Hammett, Lars Ulrich, Robert Trujillo

‘스래시 메탈의 제왕’메탈리카는 메탈이라는 장르명과 동의어로 불릴 만큼 헤비메탈의 거칠게 질주하는 흐름 속에서 매우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룹이다. 우선 그들은 1970년대 후반 극점에 다다른 펑크의 애티튜드와 1980년대 초반 전세계를 진동시킨 영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흐름, 즉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의 음악적 자양분을 받고 음지에서 등장한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계화’시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슬레이어(Slayer), 메가데스(Megadeth), 앤스랙스(Anthrax) 등과 함께 ‘스래시 메탈의 사인방’으로 불리며 1980년대 헤비메탈 네트워크를 점령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또한 그들의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사운드는 스래시 메탈의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 등장한 데스 메탈, 블랙 메탈 등 익스트림 메탈 계열의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펑크 세례를 받은 직선적인 기타 리프, 커다란 울림을 자랑하는 투 베이스 드럼과 파워 베이스, 포효하는 보컬은 헤비메탈의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메탈리카가 위대한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진지함’에 있다. 그들은 무겁고 심각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앞세워 기존의 헤비메탈이 폭력적이고 그루피를 양산해내는 가벼운 음악이라는 이미지를 깨트리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이는 1980년대 주류 미디어(MTV)와 동반자 관계를 맺고 메인스트림을 장악한 예쁘장한 팝 메탈에 대한 얼터너티브이기도 했다. 때문에 메탈리카는 헤비메탈 키드들은 물론이고, 음악팬들 나아가 평단으로부터도 호평을 받는 흔치 않는 메탈 그룹이다. 메탈리카는 1981년 덴마크 출신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Lars Ulrich)에 의해 미국 LA에서 결성된 밴드. 울리히는 NWOBHM의 간판 밴드인 모터헤드(Mortoehead)의 팬클럽을 운영하면서 보다 강력하고 기운 센 사운드를 분출하는 그룹을 만들기로 마음먹고 제임스 헷필드(James Hetfield, 보컬·기타), 로이드 그랜트(Lloyd Grant, 기타) 등과 함께 메탈리카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같은 해 데모 음반 < Hit The Lights >의 녹음직후 로이드가 팀을 떠나자 그 자리에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을 끌어들였고, 추가로 베이시스트 론 매거브니(Ron McGovney)를 영입하여 밴드의 첫 진용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데모 테이프의 녹음과 클럽 등지의 공연 등을 통해 멤버들간의 실력차가 확연히 드러나자 메탈리카는 론 매거브니와 데이브 머스테인을 퇴출시키고 클리프 버튼(Cliff Burton)과 커크 해밋(Kirk Hammett)을 차례로 맞아들였다. 그룹에서 쫓겨난 데이브 머스테인이 ‘타도! 메탈리카’를 외치며 메가데스(Megadeth)를 조직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완벽한 라인업을 갖춘 메탈리카는 1983년 데뷔작 < Kill ’Em All >, 1년 뒤인 1984년 소포모어 앨범 < Ride The Lightning >을 발표하며 스래시 메탈의 탄생을 고했다. 이 작품들은 비록 발매 당시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현재 하드코어 펑크와 NWOBHM의 조우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메탈리카의 고전으로 기록되어진다. 앞 선 두 장의 음반이 스래시 메탈의 초석을 다졌다면, 1986년 내놓은 3집 < Master Of Puppets >는 스래시 메탈의 완벽한 정의를 내린 작품이었다. 물샐틈없이 꽉 짜인 연주, 대곡 지향적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곡 구성, 사운드의 거침없는 쿵쿵거림은 스래시 메탈을 넘어서 헤비메탈 역사의 절정이었다. 라디오 전파를 탈 히트 싱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미국 차트 29위, 영국 차트 41위에 랭크되며 단숨에 3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부터 메탈리카는 음악성과 상업성을 두루 획득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1986년 9월 27일 스웨덴에서 버스사고로 인해 사망한 클리프 버튼을 대신에 정식 멤버로 제이슨 뉴스테드(Jason Newsted)가 가세하여 만든 1988년 4집 < ...And Justice for All >(미국 6위), 팝 감각을 대폭 수용한 1991년 5집 < Metallica >(미국 1위) 등이 연이어 메인스트림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에서 ‘One’, ‘Enter sandman’, ‘The unforgiven’, ‘Nothing else matters’등의 인기곡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그러나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 공개한 1996년 6집 < Load >에서 깜짝 놀랄만한 변신을 시도했다. 당시 음악계의 트렌드였던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를 받아들인 것이다. 밴드의 예상치 못한 변화에 대해 한편에서는 메탈리카가 메탈을 버렸다며 혹평을 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사운드와의 조화로 더욱 발전된 메탈리카로 재탄생했다며 호평을 하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허나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다시 한번 밴드의 위력을 뽐냈고, 1년 뒤에 내놓은 < Load >의 클론 7집 < Reload > 역시 차트 1위에 우뚝 올라섰다. 이 같은 그들의 궤도 이탈은 얼터너티브 록에 그치지 않고 1999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의 협연으로 라이브 앨범 < S&M >을 내놓으며 클래식과의 크로스오버로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현재 별다른 기복 없이 꾸준히 나아가던 메탈리카의 음악길에 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상태다. 지난 1월 베이시스트 제이슨 뉴스테드가 갑작스레 탈퇴 선언을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라고 하지만, 사실 밴드 멤버들간에 심각한 내분이 있었음이 여러 외지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때문에 원래 스케줄대로라면 내년 초에 선보일 그들의 새 앨범도 예정대로 나올지 확실치 않아 보인다. 앞으로 메탈리카가 얼마만큼 멤버들간에 신뢰성을 회복하느냐가 그들이 영원한 메탈의 지존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밴드 : 윤도현 밴드 (YB)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밴드 : 윤도현 밴드 (Y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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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B
윤도현 밴드는 한국의 척박한 록 씬에서 승부를 걸어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아티스트이다. 그들이 발표한 4장의 정규 앨범(라이브 제외)은 비단 사운드만이 아닌 의식의 성숙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군에서 제대한 직후 윤도현은 솔로가수로서 음악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1995년 ‘타잔’이 수록된 1집을 발표했다. 그 곡은 얼마간의 인기를 얻게 된다. 그 덕에 그는 한국 최초의 본격 록 영화 에 출연하는 기회를 잡았다. 그의 첫 작품은 분단에 대한 아픔(‘임진강’), 환경 파괴에 대한 성찰(‘깨어나라’) 등 묵직한 테마를 삽입하는 나름대로 신경 쓴 흔적이 보이지만 신인의 앨범인 만큼 다분히 시장 지향적인 곡들이 공존했다. 아직 ‘덜 여문’ 앨범이었다. 윤도현은 2집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밴드’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밴드로서의 실질적인 처녀작인 그의 두 번째 작품은 2년여 동안의 준비기간 동안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는 수작이다. 수록곡 중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인 ‘이땅에 살기 위하여’와 ‘철문을 열며’는 대중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양심수와 노동 문제를 전면으로 제기한 문제작으로 밴드의 깊은 사회 의식을 반영했다. 특히 ‘이땅에 살기 위하여’는 강력한 스래쉬 리프를 차용하여 록 팬들 사이에서 상당한 리퀘스트를 받았다. 밴드의 두 기타리스트 유병열과 엄태환은 화려한 솔로보다는 탄탄한 "밴드"중심의 플레이에 역점을 두며 사운드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어 1998년에 발표된 3집에서 밴드는 한층 더 유기적인 조직력을 선보였다. 그것은 모든 곡의 작사와 작곡, 그리고 편곡을 밴드 스스로 해냈다는 독립성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전작에서 나타난 신랄한 메시지는 ‘7년의 그리움’에서 잔잔하지만 진지하게 구현되었다. 이 작품은 정계를 따끔히 질타하는 곡(‘왕관 쓴 바보’)과 과학의 맹신에 따른 암울한 미래(‘공상과학 개꿈’)를 노래한 곡 등 밴드의 다변화된 관심이 투영되어 있는 앨범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밴드의 최대 역작은 99년 말에 발매된 일 것이다. 한국 록의 신화인 신중현을 비롯하여 송창식, 들국화, 그리고 대학가요제의 스타인 활주로와 샌드 페블즈에 이르기까지 윤도현 밴드는 자신들이 동경했던 거장들에 대한 찬사를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절절한 ‘음악’으로 보내고 있다. 따라서 이 앨범은 한 두 곡의 어줍지 않은 리메이크를 삽입한 노골적인 ‘앨범’과는 차별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한국 록의 계보를 파악하려는 치열한 ‘음악 정신’의 산물이다. 러시아 민중들에게 저항의 메시지를 심어주었던 한국계 포크록 가수 빅토르 최의 ‘혈액형.bloodtype’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김민기 원곡의 ‘철망 앞에서’는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이 앨범으로 윤도현 밴드는 한국 록의 가계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각인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2000년 자신들의 장기인 ‘live’를 음반으로 발매하였다. 그 사이 유병열과 엄태환이 탈퇴하고 기타리스트 허준이 새로 가입하였다. 그 이름 자체로 충분히 ‘고달픈’ 국내의 록음악은 또 한가지의 난관을 극복해야만 한다. ‘촌철살인’의 테크닉을 과시하는 외국의 유수한 뮤지션들의 음악에 젖어 있는 팬들의 귀를 만족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록’밴드 윤도현 밴드의 존재는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