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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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 Georg P. Telemann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Georg P. Tel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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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독일의 바로크 음악 작곡가로, 마그데부르크 출생이다. 독학으로 음악을 익혔으며,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을 공부했다. 종종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로 알려져있다.(적어도 현존하는 작품 수로)), 그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안토니오 비발디 그리고 절친한 친구였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오늘날은 일반적으로 바흐가 더 위대한 작곡자로 여겨지나, 당대에는 텔레만이 그의 음악적 능력으로 더욱 널리 인정받았다.

텔레만은 널리 여행하면서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습득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결합시켰다. 그는 비올라나 트럼펫 혹은 오보에나 하프시코드를 각각 복합하는 등 특이하게 악기를 편성하는 협주곡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련의 중요한 음악 관련 직위를 역임한 바 있는데, 그 정점은 1720년부터 1767년 그가 죽을 때까지 함부르크의 가장 큰 다섯 교회에서 음악 감독직을 맡은 것이다.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은 1681년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텔레만의 가족은 딱히 음악적 배경이 없었는데, 그의 증조부는 할버슈타트에서 가수로 활동했으나 그 밖에 다른 직계 가족은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텔레만의 아버지는 1685년에 사망하여, 그의 어머니가 어린 텔레만의 양육을 도맡았다. 그들은 중상류 계층에 속했으며, 교회에서 일했다. 텔레만은 10살 때 음악을 접하게 되어 소질을 드러냈는데, 12살에 처음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텔레만의 음악적 재능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에 몸담기를 우려하여 그의 모든 악기를 빼앗고, 그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진로를 택하길 기대하여 1693년에는 젤러펠트의 새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그 학교의 관리인이 텔레만의 재능을 인정해준 덕분에 그는 계속 작곡을 하고 스스로 음악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그가 힐데샤임의 김나지움 안드레아눔(Gymnasium Andreanum)에서 공부를 마칠 적에, 텔레만은 리코더, 오르간, 바이올린, 비올라 다 감바, 플루트, 오보에, 샬뤼모, 더블 베이스, 베이스 트롬본을 스스로 완전히 익혔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음악 양식을 접했으며, 일찍이 요한 로제뮐러와 아르칸젤로 코렐리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1701년에 텔레만은 법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는데, 아마도 어머니의 권유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은 곧 드러나는데, 그는 도시의 두 주요 교회에 음악을 의뢰받는다. 얼마 안되어 그는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40명 규모의 콜레기움 무지쿰을 창설한다. 이듬해 텔레만은 라이프치히 오페라 하우스의 감독과 두 교회의 합창 지휘자에 임명된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연장자인 작곡가 요한 쿠나우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텔레만이 합창 지휘자에 임명되면서 도시의 음악 감독이던 자신의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텔레만은 또한 자신의 오페라를 만들 때 많은 학생들을 이용하여 이들이 쿠나우의 교회 음악에 참가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쿠나우는 텔레만을 '오페라 음악가'라고 비난했다. 텔레만이 이 일을 그만둔 뒤에도 쿠나우는 자신이 오페라에서 잃었던 성과를 되찾지 못했다.

텔레만은 1705년에 라이프치히에 남아 조라우(Sorau, 현재 폴란드의 zary)에 있는 백작 에어드만 2세(Erdmann II)의 궁정 법원에서 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이곳에 재임하면서 2년 동안 그는 장바티스트 륄리와 앙드레 캉프라의 프랑스 양식을 알게 되고, 많은 서곡과 조곡을 작곡했다. 스웨덴 군대가 독일에 쳐들어오자 에어드만의 궁정은 성으로 대피했다. 텔레만은 1707년에 파리에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아이제나흐(Eisenach)의 궁정에서 가수들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에서 바흐를 만난다. 텔레만의 생애에서 중요한 직위는 1721년에 임명받은 함부르크의 다섯 주 교회에서 음악 감독직으로,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여기서 텔레만은 노래와 음악 이론을 가르치고, 매주 혹은 격주로 공연하는 다른 콜레기움 무지쿰을 감독하면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때마다 종교 음악을 작곡하고 일요일마다 두 개의 칸타타를 썼다. 그는 또한 지역 오페라 하우스에서 몇 년 동안 감독을 맡았지만, 재정적 실패를 겪었다.

쿠나우가 라이프치히에서 맡던 자리가 공석이 되자, 텔레만은 그 직위에 지원한다. 이에 지원한 여섯 명의 음악가 중에서 그는 가장 유리한 후보자였으며 시의회의 승인을 얻게 된다. 그러나 텔레만은 이 제의를 함부르크에서 봉급 인상을 보장받는 데 이용하면서, 이 직위를 거절했다. 그리하여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가 텔레만을 대신하게 되는데 그도 이를 거절하면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에게 길을 터주게 된다. 텔레만은 자신의 음악을 출판하고, 다른 궁정에서 몇몇 작은 직위를 얻어서 함부르크의 봉급을 늘렸다.

대략 1740년부터 텔레만의 이론적인 논문을 쓰는 데 더욱 주력하면서 그의 성과는 줄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란츠 벤다나 그의 대자(代子)였던 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와 같은 몇몇 젊은 작곡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1755년 그의 장남 안드레아스가 죽은 뒤, 텔레만은 그의 손자인 게오프크 미카엘 텔레만을 양육할 책임을 지게 되었고, 미래의 이 작곡가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의 여러 종교적인 오라토리오는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이후 텔레만은 시력이 나빠져서 1762년에 이르면 창작이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나 이 작곡가는 1767년 6월 25일 죽는 날까지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기네스 북에는 텔레만을 역사적으로 800개 이상의 작품을 인정받은 가장 다작의 작곡가로 등재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예를 들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출판된 그의 주제별 작품 목록은 텔레만이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실제로 3,000개가 넘는 작품을 썼음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그의 몇몇 악보는 음악학자 제이슨 그랜트가 최근에 발굴하기도 했다. 많은 필사본이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다른 작곡자인 시몬 세히터는 8000개가 넘은 작품을 써서 텔레만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중 5000여 작품은 작은 푸가이다.)

텔레만은 그의 생애에 인정받아 이후 수십 년간 그 명성을 이어갔지만, 19세기 초에는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일이 줄어들었으며, 텔레만의 중요한 작품인 Der Tod Jesu는 1832년 이후 20세기까지 연주되지 않았다. 1911년 Encyclopædia Britannica에는 바흐와 헨델 두 사람에 대해선 상당한 기사가 있지만, 텔레만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텔레만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20세기 초의 일로 1950년대의 베렌라이터판에서 정점에 달한다. 초기 음악 앙상블에서는 이제 텔레만의 작품을 연주하며, 그의 음악을 많이 녹음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텔레만의 작품에는 흔히 TWV 번호가 붙는다. TWV란 Telemann Werke Verzeichnis(텔레만 작품 목록)을 뜻한다. TWV는 숫자와 콜론,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TWV 뒤에 첫 숫자는 매체의 일반 형태를 가리키며, 콜론 뒤의 글자는 특정 작품의 조성을 뜻한다. 그리고 뒤에 붙는 숫자는 각 작품 형태별 번호이다. 가령 텔레만 B 플랫 메이저의 현과 통주저음을 위한 폴로노이스 협주곡은 TWV 43:B3이다. 다른 예로 텔레만의 D 메이저 모음곡은 TWV 55:D18이다.

작곡 : Camille Saint-Saens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Camille Saint-Sa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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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유 생상스
파리 출생. 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흔히 모차르트의 유년시절과 비교되었다. 1846년 10세 때 데뷔하고, 12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오르간과 작곡을 배웠다. 1853~1877년 마들렌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하면서는, 오르간 ·피아노 연주의 명수, 즉흥연주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 1861∼1865년에는 에콜 니데르메이에르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교수하였는데, A.메사제, G.포레 등은 이 시기의 제자들이다.

1871년 유지들과 파리에서 '국민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유력한 멤버로서 프랑스음악계에 교향악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작곡가로서는 1852년과 1864년에 로마대상에 낙선하여 그 이후 1880년경까지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국민음악협회, C.라무뢰 등의 오케스트라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작품에는 '삼손과 델릴라 Samson et Dalila'(1877)를 비롯한 13편의 오페라, 교향곡 4, 피아노협주곡 3, 그 밖에 피아노곡을 비롯한 많은 기악곡이 있다. 작품은 모두 고전적인 단정함, 세련된 관현악법에 의한 화려한 표현이 특징이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운명처럼 작품을 썼다.' 고 하는 카미유 생상스('생상'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많은데, 작곡가의 후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생상스'로 부르는 게 맞다고 한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즉흥 연주의 대가였고 리스트로부터는 '세계 최고의 오르간 주자'라는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작가이자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으며 자연과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약간 비꼬는 투로 '생상스는 모든 분야에 뛰어나지만 미경험(未經驗)에 대해서만은 부족하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그러나 '오늘날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라고 극찬한 적도 있다), 그의 왕성한 탐구심과 근면함(그는 죽기 바로 전날까지도 작곡을 했다)은 여러 장르에 걸쳐 많은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다.

작곡 : Johann Sebastian Bach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작곡 : Johann Sebastian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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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바스찬 바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독일어: 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개신교회의 교회 음악가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을 1802년에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아주 훌륭한 곡을 많이 작곡 하였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U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연주 : Sharon Bezaly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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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베잘리
샤론 베잘리(Sharon Bezaly)는 1972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스웨덴에서 자랐다. 11세에 플루트를 시작하여 파리 고등국립음악원에서 수학했다. 24세때 주빈 메타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협연 무대로 데뷔했으며, 산도르 베그의 초청으로 카메라타 아카데미카 잘츠부르크의 수석 주자로 1997년까지 활약했다. 여성으로는 드문 폐활량으로 긴 곡의 연주에도 고른 숨을 유지하며 플루트의 다양한 색감과 정서를 세밀하게 표현해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3년 칸 올해의 신인 연주자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5월 첫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