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11명)

이전

저 : 현진건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현진건
관심작가 알림신청
玄鎭健, 빙허(憑虛)
호는 빙허(憑虛). 일제 당시 현실을 아이러니적 수법으로 고발하고 역사소설로 민족혼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소설가. 1900년 8월 8일 대구에서 대구 우체국장이었던 경운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호는 빙허(憑虛)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1912년 일본 세이조중학에 입학, 1915년 이순득과 혼인했다. 1918년에는 상하이에 있는 둘째 형을 찾아갔고, 그곳의 호강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귀국한다. 일본 도쿄[東京] 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上海] 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개벽]에 단편소설 「희생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들어섰다. 이 작품은 신교육을 받은 두 남녀의 사랑이 봉건적인 관습 앞에 가로막히는 사연을 그렸다. 문단으로부터 그다지 긍정적인 평을 받지 못했으나 1921년 「빈처」를 발표하면서부터 작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현진건이 활동한 시대는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이자 일제 강점기였다. 그는 식민 지배 아래 핍박받는 우리 민족의 수난상과 사회 하층민의 빈곤의 참상을 폭로하고 고발했다. 현진건은 일제에 대한 끈질긴 저항과 강렬한 민족의식을 작품으로 표현한 작가로서, 서양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가 맞닥뜨린 새로운 시대의 모순에 비판적인 의식을 유지했다.

1936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일할 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보도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간 복역했다. 신문사를 떠나 양계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불우한 시기를 보낸다. 그 뒤 동아일보에 『무영탑』을 시작으로 장편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흑치상지』의 연재가 중단되고, 『조선의 얼골』 또한 금서처분을 받는 수난을 당했으며, 1943년 4월 25일 연재 중이던 마지막 작품 『선화공주』를 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술을 아니 마실 수 없게 만들었던 세상을 떠나고 만다.

대표작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과 장편 『적도』, 『무영탑』 등이 있다. 현진건은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적 한국단편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로,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로 평가된다.

현진건의 다른 상품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2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2

17,800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2' 상세페이지 이동

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중학생이 읽어야 할 소설 - 중2 39편

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중학생이 읽어야 할 소설 - 중2 39편

14,220 (10%)

'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중학생이 읽어야 할 소설 - 중2 39편' 상세페이지 이동

초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 단편소설

초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 단편소설

14,400 (10%)

'초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 단편소설' 상세페이지 이동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13,200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상세페이지 이동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2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2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13,000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2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상세페이지 이동

고등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고등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15,800

'고등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14,200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상세페이지 이동

저 : 이태준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이태준
관심작가 알림신청
李泰俊,, 상허尙虛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가 그해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 1912년 모친마저 별세하자 철원의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되어 1924년 퇴학하였다.

1924년 학교 신문 [휘문 2호]에 단편동화 「물고기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다. 1925년 문예지『조선문단』에 「오몽녀」가 입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7년 신문·우유 배달 등을 하며 ‘공기만을 먹고사는’ 궁핍한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개벽』과 『조선중앙일보』의 기자, 『문장』지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박태원·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였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출간을 시작으로 『가마귀』, 『사상의 월야』, 장편소설 『해방전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0년대 전후에 아동잡지 [어린이]에 발표한 많은 동화들은 여전히 많은 어린이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있다. 해방 후에는 문학가동맹, 남조선민전등 조직에 참여하다가 1946년 월북하였다.

‘구인회’ 활동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남천과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어 함흥노동신문사 교정원,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초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저서로 단편소설집 『달밤』 『가마귀』 『복덕방』 『해방 전후』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수필집 『무서록』, 문장론 『문장강화』 『상허 문학독본』 등이 있다.

이태준의 다른 상품

상허 이태준 전집 1차분 세트

상허 이태준 전집 1차분 세트

149,000

'상허 이태준 전집 1차분 세트' 상세페이지 이동

제이(第二)의 운명(運命)

제이(第二)의 운명(運命)

37,000

'제이(第二)의 운명(運命)' 상세페이지 이동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 화관(花冠)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 화관(花冠)

37,000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 화관(花冠)' 상세페이지 이동

해방 전후 (解放 前後)

해방 전후 (解放 前後)

36,000

'해방 전후 (解放 前後)' 상세페이지 이동

돈 가져간 사슴이

돈 가져간 사슴이

9,000 (10%)

'돈 가져간 사슴이'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3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3

17,000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3' 상세페이지 이동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13,200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상세페이지 이동

저 : 계용묵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계용묵
관심작가 알림신청
河泰鏞
본명 하태용河泰鏞. 1904년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삼봉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 안씨 안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나 가산이 파산돼 1931년 귀국하였으며, 그 뒤 조선일보 등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소년지 [새소리]에 「글방이 깨어져」가 2등으로 당선되었으며, 1925년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생장]의 현상문예에 당선되었다. 1927년 [조선문단]에 소설 「최서방」이 당선된 이후, [조선지광]에 「인두지주」를, [조선문단]에 「백치아다다」를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 정비석과 함께 [조선]을 창간하였으며, 「병풍에 그린 닭이」,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등과 수상집 「상아탑」 등을 남겼다. 그의 초기 작품경향은 현실주의적, 경향파적인 작품세계를 보이기도 했으나, 1935년 「백치 아다다」를 발표한 이후, 예술의 미적 창조 및 자율성을 강조하는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을 썼다.

계용묵의 다른 상품

계용묵 단편문학

계용묵 단편문학

13,320 (10%)

'계용묵 단편문학'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2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2

17,800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2' 상세페이지 이동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13,200

'중학생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1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14,200

'한국단편문학 부모님을 위한 큰 글씨 소설' 상세페이지 이동

불멸의 문장들

불멸의 문장들

18,000 (10%)

'불멸의 문장들' 상세페이지 이동

여인 수난 시대

여인 수난 시대

13,320 (10%)

'여인 수난 시대' 상세페이지 이동

계용묵 단편집 큰글씨책

계용묵 단편집 큰글씨책

27,000

'계용묵 단편집 큰글씨책' 상세페이지 이동

계용묵 단편집

계용묵 단편집

16,000

'계용묵 단편집' 상세페이지 이동

저 : 민태원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민태원
관심작가 알림신청
閔泰瑗
1894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보다. 1914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매일신보사에 입사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이직하는 한편 일본에 유학하여 1924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신문 편집에서도 탁월한 감각과 재능을 보여 귀국 후 〈동아일보〉의 사회면을 개혁했다. 1924년 5월 〈조선일보〉로 옮겨 제5대 편집국장을 맡았고, 1926년 12월 〈중외일보〉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0년 〈중외일보〉가 자진 휴간하자 퇴사했다. 1934년 서울 궁정동 자택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18년〈매일신보〉에 연재된 번안 소설 〈애사〉를 통해 〈매일신보〉 연재 번안 소설의 위상을 확고히 다졌으며, 〈동아일보〉 창간호를 장식한 「부평초」와 「무쇠탈」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순 한글의 한국어 문장'으로 된 신문 연재소설의 정통성을 계승했다. 1920년 《폐허》 동인이 되어 「어린 소녀」, 「음악회」를 발표했으며 『오호 고균거사―김옥균 실기』 등의 저서가 있다. 1930년대에는 『천아성』,『새 생명』 등 역사소설을 발표했다. 이외 다수의 수필과 논설이 있다. 수필가로서 명성을 안겨준 『청춘예찬』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으며, 현재는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민태원의 다른 상품

불멸의 문장들

불멸의 문장들

18,000 (10%)

'불멸의 문장들' 상세페이지 이동

민태원 선집

민태원 선집

10,800 (10%)

'민태원 선집' 상세페이지 이동

청춘예찬 (외)

청춘예찬 (외)

4,410 (10%)

'청춘예찬 (외)' 상세페이지 이동

무쇠탈 하

무쇠탈 하

11,250 (10%)

'무쇠탈 하' 상세페이지 이동

무쇠탈 상

무쇠탈 상

11,250 (10%)

'무쇠탈 상' 상세페이지 이동

애사

애사

13,050 (10%)

'애사' 상세페이지 이동

저 : 이육사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이육사
관심작가 알림신청
李陸史, 이원록, 이활
본명은 ‘원록’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했으나 독립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에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하였으며, 1937년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1943년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육사의 다른 상품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15,030 (10%)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상세페이지 이동

중고등생 필독서 한국 소설 수필 시 국어교과서 수록 작품 읽기 4

중고등생 필독서 한국 소설 수필 시 국어교과서 수록 작품 읽기 4

19,000

'중고등생 필독서 한국 소설 수필 시 국어교과서 수록 작품 읽기 4' 상세페이지 이동

이육사의 시와 산문

이육사의 시와 산문

11,700 (10%)

'이육사의 시와 산문' 상세페이지 이동

시를 잊은 나에게

시를 잊은 나에게

15,120 (10%)

'시를 잊은 나에게'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큰글자도서)

200,000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큰글자도서)' 상세페이지 이동

육사 시집

육사 시집

3,420 (10%)

'육사 시집' 상세페이지 이동

불멸의 문장들

불멸의 문장들

18,000 (10%)

'불멸의 문장들' 상세페이지 이동

예쁜 손글씨에 아름다운 시를 더하다

예쁜 손글씨에 아름다운 시를 더하다

7,650 (10%)

'예쁜 손글씨에 아름다운 시를 더하다' 상세페이지 이동

저 : 김영랑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김영랑
관심작가 알림신청
영랑令郞, 윤식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35년에 첫 번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다. 『영랑시집』에는 총 53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각각의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을 쓰지 않고 일련번호를 붙여 시집에 실었다. 이후 김영랑은 1949년에 중앙문화사에서 『영랑시집』을 출간했다.

김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했으며,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당시 중앙행정부인 공보처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유탄을 맞아 부상을 당해 9월 서울에 위치한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현재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대표 시집으로 『영랑 시집』, 『영랑 시선』 등이 있다.

김영랑의 다른 상품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23,000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 상세페이지 이동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15,030 (10%)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상세페이지 이동

매일, 시 한 잔

매일, 시 한 잔

15,120 (10%)

'매일, 시 한 잔' 상세페이지 이동

시를 잊은 나에게

시를 잊은 나에게

15,120 (10%)

'시를 잊은 나에게'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하늘 세트 (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하늘 세트 (큰글자도서)

200,000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하늘 세트 (큰글자도서)' 상세페이지 이동

영랑 시집

영랑 시집

3,420 (10%)

'영랑 시집' 상세페이지 이동

진달래꽃 저문 자리 모란이 시작되면

진달래꽃 저문 자리 모란이 시작되면

12,600 (10%)

'진달래꽃 저문 자리 모란이 시작되면' 상세페이지 이동

예쁜 손글씨에 아름다운 시를 더하다

예쁜 손글씨에 아름다운 시를 더하다

7,650 (10%)

'예쁜 손글씨에 아름다운 시를 더하다' 상세페이지 이동

저 : 박용철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박용철
관심작가 알림신청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및 기타 잡지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진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 동인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입센 원작 『인형의 집』, 그리고 「바보」, 「베니스 상인」, 「말 안 하는 시악시」, 「사랑의 기적」… 등)을 번역 및 창작하였으며 직접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방대한 번역시 등을 통해 해외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큰 의의라 하겠다. 또한 『삼천리문학』에 실린 박용철의 대표적인 평론인 「시적 변용에 대해서」(1938)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시작(詩作) 이론이다. 이 시론을 통하여 1930년대 초반 『시문학』이 기틀을 잡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는 모더니즘과 기교주의 논쟁에서도 순수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박용철의 다른 상품

매일, 시 한 잔

매일, 시 한 잔

15,120 (10%)

'매일, 시 한 잔' 상세페이지 이동

문예월간(文藝月刊)

문예월간(文藝月刊)

90,000 (10%)

'문예월간(文藝月刊)' 상세페이지 이동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여름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여름

16,920 (10%)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여름' 상세페이지 이동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16,920 (10%)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상세페이지 이동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박용철 시집 [큰 글씨 특별판]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박용철 시집 [큰 글씨 특별판]

11,700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박용철 시집 [큰 글씨 특별판]' 상세페이지 이동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8,820 (10%)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상세페이지 이동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8,820 (10%)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상세페이지 이동

오래간만에 내 마음은

오래간만에 내 마음은

8,820 (10%)

'오래간만에 내 마음은' 상세페이지 이동

저 : 변영로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변영로
관심작가 알림신청
卞榮魯
시인, 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가, 번역문학가이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부드럽고 정서적이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대표작으로 「논개」가 있다.

변영로의 다른 상품

불멸의 문장들

불멸의 문장들

18,000 (10%)

'불멸의 문장들' 상세페이지 이동

명정사십년 酩酊四十年

명정사십년 酩酊四十年

19,800 (10%)

'명정사십년 酩酊四十年' 상세페이지 이동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여름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여름

16,920 (10%)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여름' 상세페이지 이동

낙엽 질 무렵

낙엽 질 무렵

11,800

'낙엽 질 무렵' 상세페이지 이동

벚꽃 필(Feel) 무렵 - 봄의 찬미 시집

벚꽃 필(Feel) 무렵 - 봄의 찬미 시집

12,300

'벚꽃 필(Feel) 무렵 - 봄의 찬미 시집' 상세페이지 이동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16,920 (10%)

'열두 개의 달 시화집 봄' 상세페이지 이동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8,820 (10%)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상세페이지 이동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8,820 (10%)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상세페이지 이동

저 : 박인환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박인환
관심작가 알림신청
Park In-hwan,朴寅煥,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 평양 의학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8·15 광복을 맞으면서 학업을 중단, 종로 2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여하여 시 「단층」(斷層)을 낭독하고, 이를 예술의 밤 낭독시집인 『순수시선』(1946)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48년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신시론』 발간했다.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했으며, 동인그룹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거리」「남품」「지하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엔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0년 [경향신문] 입사 후 6·25 동란이 일어나자, 9·28 수복 때까지 지하생활을 하다가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부산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1952년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 번역해서 간행하였으며, 6월 16일「주간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발표했다. 1954년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하였다. 1955년 시작품 『목마와 숙녀』(시작), 『박인환 시선집』, 『선시집』을 간행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시작품 「세월이 가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20일 오후 9시 심장마비로 31세 젊은 나이에 자택에서 타계해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59년 3주기를 맞아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 번역해서 간행되었으며, 그가 사망한지 20년 후인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혼란한 정국과 전쟁 등의 당대 상황에서 적지 않은 총 173편의 작품을 남기고 타계한 박인환 시인은, 암울한 시대의 절망과 실존적 허무를 피에로의 몸짓으로 대변한 당대의 정신적 제왕이자 모더니즘, 리얼리즘, 실존주의의 시세계를 구축하며 전후 문단의 지평을 넓힌 기린아였다. 전쟁의 충격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다운 세계 인식을 가지려 노력하며 자신이 살아가는 황폐한 시대를 새로운 시 형식으로 반영한 그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미학과 역사성이 결합하는 접점을 확인시켜 준다.

박인환의 다른 상품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23,000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 상세페이지 이동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15,030 (10%)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상세페이지 이동

시를 잊은 나에게

시를 잊은 나에게

15,120 (10%)

'시를 잊은 나에게' 상세페이지 이동

불멸의 문장들

불멸의 문장들

18,000 (10%)

'불멸의 문장들' 상세페이지 이동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11,700 (10%)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상세페이지 이동

THE COLLECTED POEMS

THE COLLECTED POEMS

23,750 (5%)

'THE COLLECTED POEMS' 상세페이지 이동

박인환 선시집

박인환 선시집

14,250 (5%)

'박인환 선시집' 상세페이지 이동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6,480 (10%)

'세월이 가면' 상세페이지 이동

저 : 오장환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오장환
관심작가 알림신청
1918년 5월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해주 오씨 오학근(吳學根)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한학수(韓學洙)는 오학근의 첩실로 들어왔으나 본처인 이민석(李敏奭)이 사망함에 따라 적실(嫡室)로 재혼 신고되었고, 오장환 또한 적출로 재신고되어 4남 4녀 중 3남이 되었다. 그는 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해 1933년 11월 오장환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문학]에 시「목욕간」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후 오장환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에 있는 지산(智山)중학교에 입학·수료했으며, 1937년 일본 메이지(明治)대 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다. 그의 첫 시집인『성벽』은 1937년 8월 풍림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이 시집의 발행으로 오장환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세 천재’로 화려한 주목을 받는다. 그 뒤 그는 자신이 경영하던 남만서방(南蠻書房)에서 두 번째 시집인 『헌사』를 1939년 7월에 발간했으며, [삼천리], [문장], [춘추] 등에 이따금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제 말기까지 문단 활동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해방 이후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던 열망이 국토 분단에 의해 좌절되면서, 그는 월북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월북 이후 오장환은 북한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고, 소련 기행 체험을 담은 제5시집 『붉은 기』를 발간했다. 그다음 해인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했으며, 1988년 납·월북 작가의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기까지 남한에서 잊힌 시인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처음으로 『오장환 전집』(창작과 비평사, 1989)이 간행되고 그의 미발표 유고인 장시 「전쟁」과 「황무지」가 발굴·공개됨으로써, 오장환의 문학에 대한 평가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장환의 다른 상품

시를 잊은 나에게

시를 잊은 나에게

15,120 (10%)

'시를 잊은 나에게'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큰글자도서)

200,000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큰글자도서)' 상세페이지 이동

헌사

헌사

3,420 (10%)

'헌사' 상세페이지 이동

불멸의 문장들

불멸의 문장들

18,000 (10%)

'불멸의 문장들'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하늘 + 바람 세트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하늘 + 바람 세트

68,400 (10%)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하늘 + 바람 세트' 상세페이지 이동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34,200 (10%)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 바람 세트' 상세페이지 이동

해방기념시집 1945년

해방기념시집 1945년

12,150 (10%)

'해방기념시집 1945년' 상세페이지 이동

첫눈 내릴 무렵

첫눈 내릴 무렵

10,800

'첫눈 내릴 무렵' 상세페이지 이동

저 : 윤동주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윤동주
관심작가 알림신청
尹東柱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윤동주의 다른 상품

윤동주 시집 컬러 일러스트 (큰글자책)

윤동주 시집 컬러 일러스트 (큰글자책)

21,000

'윤동주 시집 컬러 일러스트 (큰글자책)' 상세페이지 이동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23,000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큰글자책) ' 상세페이지 이동

정지용·이상·백석·윤동주 소장용 4권 세트

정지용·이상·백석·윤동주 소장용 4권 세트

52,200 (10%)

'정지용·이상·백석·윤동주 소장용 4권 세트' 상세페이지 이동

일본 교과서의 윤동주와 이바라기 노리코

일본 교과서의 윤동주와 이바라기 노리코

19,800 (10%)

'일본 교과서의 윤동주와 이바라기 노리코' 상세페이지 이동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15,030 (10%)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상세페이지 이동

매일, 시 한 잔

매일, 시 한 잔

15,120 (10%)

'매일, 시 한 잔' 상세페이지 이동

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

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

15,120 (10%)

'매일, 시 한 잔 : 두 번째' 상세페이지 이동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집 복각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집 복각본

9,900 (10%)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집 복각본' 상세페이지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