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소개(3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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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 Claudio Abbado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지휘 : Claudio Abb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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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바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에서 지휘, 피아노, 작곡을 배웠다. 이 음악원을 졸업한 다음 빈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8년에 미국의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 상(賞)을 받았다. 1960년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갤러콘서트에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3년에 뉴욕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65년 8월 14일에, 빈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데뷔했다. 그 때의 작품은 말러의 [교향곡 제2번]이었다. 1967년에 처음으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시즌 최초의 공연을 지휘했다. 작품은 벨레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였고, 1968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를 지휘했다. 그 해에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0년에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를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 작품은 그 뒤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하였다. 1971년에 빈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뮌헨 음악제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하였다. 1972년에 베를린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첫날을 지휘하였다. 이해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올림픽 기간 동안 뮌헨에서 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지휘하여 베르디의 [레퀴엠]과 오페라 [아이다]를 연주한 것도 1972년의 일이다. 1973년에 빈의 모차르트 협회에서 모차르트 메달을 그에게 주었다. 이해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및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함께 미국을 연주 여행하였고, 빈 필하모니와 함께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도 연주 여행하였다. 이때가 아바도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더욱이 이 해에는 런던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아바도로서는 최초의 모차르트의 오페라인 [피가로의 결혼]을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바도는 착착 그 활동의 무대를 넓혀 온 셈인데 그 활동 무대 확대 방식은 용의주도하였다. 이것은 레퍼토리의 선택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까지(1981년 봄) 아바도는 이탈리아의 지휘자이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메카로 이름난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에 의해 대표되는 베르디 이후의, 일반적으로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불리는 오페라를 조심성 있게 피해 왔다. 한편으로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시하고, 더욱 루이지 노노의 신작 초연을 종종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아바도의, 굳이 말한다면 지성파(知性派)라고 할 수도 있는 지휘자로서의 본연의 자세가 떠오를 것이 틀림없다. 사실 아바도의 연주는 열기에 가득 찼다든가 또는 정열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이 걸맞지 않으며, 오히려 지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명쾌하고, 조금의 애매모호함도 없으며, 그 작품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을 뚜렷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휘자로서는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는 아바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마 그 정교하고 치밀함을 잃지 않으면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풍부한 표현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아바도는 문자 그대로의 수재 코스를 걸어 왔고 충분한 성과를 올렸다. 1989년 정식 상임 지휘자가 없는 빈 필하모니의 준상임 지휘자로 있었으며, 1989년 카라얀의 사망으로 그의 휘하였던 베를린 필의 제5대 음악 감독으로 취임해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연주 : Anne-Sophie Mutter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연주 : Anne-Sophie Mu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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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소피 무터
1970년 후반 세계는 젊은 천재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상큼한 미모의 소녀가 까다로운 황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협연하여 악평으로 이름 높은 독일의 음악평론가들까지도 넉아웃시켰기 때문이었다. 카라얀은 그녀에 대해 단연코 세계 3대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바 있다. 그녀는 베를린 필,빈 필,뉴욕 필 등 세계 3대 교향악단은 물론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들과 협연하였으며 카라얀,다니엘 바렌보임,클라우디오 아바도,주빈 메타,볼프강 자발리쉬 등 최정상의 지휘자들과 함께 공연하여 20대가 채 되기도 전에 전세계의 음악가가 우러러보는 명인의 반열에 올라버렸다. 바로 안네 소피 무터이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안네 소피 무터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그리고 2008년 4월 24일 여성으로는 최초로 국제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했다. 20만 유로의 상금이 주어지는 지멘스 음악상은 음악가들이 가장 욕심내는 상 가운데 하나이다. 무터를 '세계를 위한 선물'이라 칭송한 음악비평가 요아힘 카이저(Joachim Kaiser)가 축사를 맡았다. 안네 소피 무터는 지휘자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13세의 그녀를 발굴하면서부터 세계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44세의 안네-소피 무터는 그 이후로 30년이 넘게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심사위원들에 따르면 무터는 예술성과 자연스러움,뛰어난 기교와 감성을 하나로 어우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음악인이라고 한다. 그녀의 연주의 특색은 따뜻하고 깊이있는 음색과 솔직한 감정표현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는데 있다. 무터는 언제나 열정과 충실한 작품해석 사이에서 예술적 기교를 발휘한다. 무터는 전통적인 대작들 외에도 관객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인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연주자 중에 그녀만큼 동시대음악에 열정을 쏟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평가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는 1963년 6월 29일 독일의 라인펠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5살 때에 피아노를 시작했으나 곧바로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 6살 때 Jugend Musiczier에서 처음으로 입상했고 칼 플레쉬(Carl Flesch,1873-1944)의 제자인 호니히베르거(Erna Honigberger)와 스위스의 Winterhur 음악학교 교수인 Aida Stucki로부터 사사받았다. 1976년에 있었던 루체른 페스티발(Lucerne Festival)에서 카라얀은 무터에게 깊은 음악적 애정을 갖게되었고,1977년 13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Salzburg Easter Festival)에서 카라얀과 함께 데뷔공연을 가졌다. 그 다음해인 1978년에는 카라얀의 베를린필과 함께 그녀의 첫 레코딩을 했고 그 레코드는 Grand Prix Disque와 Deutsch Schallplatten Preis를 수상했다.

안네 소피 무터의 국제적 경력은 1977년 찰츠부르크 페스티발(Salzburg Whitsun Festival)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솔리스트 또는 챔버 뮤지션으로서 유럽,미국,카나다,일본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그녀는 루토슬라브스키(Witold Lutoslawski,1913-1994),노르베르트 모레트(Norbert Moret,1921-1998),크시슈토프 펜데르츠키(Krzysztof Penderecki,1933- ),볼프강 림(Wolfgang Rihm,1952- )의 작품들을 주 레퍼토리로 연주하였고,많은 작곡가들은 특별히 그녀를 위한 곡들을 썼다. 뒤티외(Henri Dutilleux,1916- ),구바이둘리나(Sofia Gubaidulina,1931- ),그리고 전 남편 앙드레 프레빈(Andre Previn,1929) 등의 작곡가들은 특별히 무터를 위해 곡을 쓰기도 했다. 무터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많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5-1986년에는 런던에 있는 왕립음악학교는 그녀를 명예 회원(honorary fellow)으로 지명했다. 1979년에는 그해의 아티스트로 불려졌고 prestigious Deutscher Schallplattenpreis 를 받았다. 1983에는 옥스포드대학의 모짜르트협회의 명예회장이 되었고,1987년에는 독일공화국의 일등훈장을 받았다. 1996년에는 본에 있는 베토벤협회의 명회회원이 되었다.

카라얀 덕분에 그녀는 베를린 필과 베토벤,모짜르트,브라암스,멘델스존,브루흐 등의 협주곡을 출반하고 솔로앨범도 녹음하였는데,세계 최정상의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의 주요 베스트셀러들중의 하나로서 인기를 얻었다. 그 이면에는 20세기 들어 세계에 내놓을 만한 바이올리니스트를 갖지 못했던 독일 국민들의 소망- 독일인의 손으로 연주되는 베토벤을 위시한 독일 작곡가의 곡을 듣고 싶다는 소망 - 이 강도 높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그녀는 독일정부가 종신토록 대여해준 1703년 제작 에밀리아니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연주에 임하면 완전히 거기에 몰입하며 그 어떤 것도 들어갈 틈을 보여주지 않는 꽉찬 모습은 그녀의 놀랄만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그녀의 유연성과 순발력?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나가며,음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표현해 내는 능력의 기초가 되어 완벽한 음악을 바라는 청중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준다.

무터는 세계적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에이즈 퇴치와 암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를 위한 자선 콘서트를 가졌다. 그녀는 현재 뮌헨에서 살고 있으며, 음악 후진 양성 외에도 자선연주회 등을 통해 사회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연주 : Maurizio Pollini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연주 : Maurizio Pol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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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폴리니
1942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열살 때 첫 콘서트를 열었다. 특히 1960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국제 쇼팽 콩쿨에서 우승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 심사위원장이었던 A.루빈스타인이 폴리니를 가리켜 "기교상으로는 우리들보다 훨씬 낫다"라고 극찬할 만큼 현란한 기교를 과시하면서 그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러나 폴리니는 그로부터 10년간을 연주일선에 나타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내적인 성숙을 기다려 왔다. 그런 후 73년도부터 레코딩에 들어가 쇼팽을 필두로 녹음을 진행시켜 가면서 무르익은 피아니즘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폴리니는 쇼팽 위주의 연주에서 벗어나 현대곡까지를 레퍼터리로 확보해가면서 폭넓은 비약을 꾀한다. 그러나 아루트르 루빈스타인이 타계한 지금, 폴리니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쇼팽 연주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연주 : Martha Argerich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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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세 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며, 음악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빼어나 신동 소리를 들었다. 열한 살에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극장 테아트로 콜론에 데뷔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해 프리드리히 굴다의 제자가 되었고, 1957년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1960년 연주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슬럼프를 겪던 아르헤리치는 1965년 제7회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녀의 연주는 쇼팽 해석을 혁신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음반과 공연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며 숱한 명반과 명연을 남겼다. 현란한 테크닉과 파워풀한 타건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그녀는 〈BBC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9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녀는 독주 무대 대신 실내악 협연 위주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등과 협연을 이어오고 있다. 또 루가노 페스티벌, 벳푸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등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공연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그녀에게는 성姓이 다른 세 딸, 1964년 중국 출신 지휘자 첸량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다 첸, 1970년 두 번째 남편이었던 지휘자 샤를 뒤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니 뒤투아, 1975년 연인이었던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와의 사이에서 낳은 스테파니 아르헤리치가 있다. 엄마로서 아르헤리치의 모습은 스테파니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영화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세 딸들Bloody daughter〉에 담겨 있다.

1992년 암(악성 흑색종)을 진단받은 그녀는 1997년 병이 재발했지만 회복해 완치되었다. 여든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주 : Wilhelm Kempff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연주 : Wilhelm Kemp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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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켐프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자. 유럽과 남아메리카 등지를 순회공연하였으며 슈투트가르트음악원 원장을 지냈고 포츠담의 마르모어궁에서 하계 피아노 강좌를 맡았다. 독일 고전파음악 및 낭만파음악과 쇼팽의 음악연주로 유명했다.

오케스트라 : Bavarian Radio Symphony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오케스트라 : Bavarian Radio Symph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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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 Symphonieorchester des BR / BRSO /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바이에른 방송 관현악단은 1949년 독일 뮌헨에서 설립되었다. 바이에른 라디오 방송국이 운영하는 음악 단체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바이에른 방송국은 뮌헨 방송 오케스트라(Munchner Rundfunk orchester)와 바이에른 방송 합창단(Chor des Bayerischen Rundfunks)도 운영하고 있다. 오이겐 요훔(Eugen Jochum), 라파엘 쿠벨리크(Rafael Kubelik), 콜린 데이비스 경(Sir Colin Davis), 로린 마젤(Lorin Maazel) 등이 지휘자로 활동했다. 2003년부터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 1943~)이 지휘를 맡고 있다.

오케스트라 : Staatskapelle Dresden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오케스트라 : Staatskapelle Dres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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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Sa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을 본거지로 하는 악단으로, 정식 명칭은 드레스덴 작센 국립 관현악단(Sachsische Staatskapelle Dresden)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 중 하나로 유명하다.

1548년 9월 22일에 설립된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궁정 악단이 시초이며, 초대 악장(Kapellmeister)으로 요한 발터가 임명되었다. 발터 이후에는 르 메스트르, 스칸델로, 피넬리, 미하엘 등이 카펠마이스터 직위를 계승했으며, 하인리히 쉬츠는 최초로 궁정악장(Hofkapellmeister)을 역임했다. 18세기를 거치면서 편성도 확대되었고, 종교 의식이나 궁정극장에서 상연되던 오페라 등 무대 작품 공연에도 동원되었다.

베버와 바그너도 궁정악장을 역임했으며, 1841년에는 고트프리트 젬퍼의 설계로 건립된 작센 국립오페라극장(통칭 젬퍼오퍼)의 상주 악단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율리우스 리츠나 프란츠 뷜너, 에른스트 폰 슈흐 등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닦은 명사들이 활동했다. 슈흐의 후임으로는 프리츠 라이너와 프리츠 부슈, 칼 뵘 등이 활동했으며, 제3제국 시대에도 제국 관현악단의 일원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1944년에 괴벨스의 총동원령에 의해 활동이 정지되었으며, 1945년 미국과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대공습으로 인해 상주 공연장이었던 국립오페라극장이 전소되었다.

종전 후 요제프 카일베르트를 카펠마이스터로 맞아들여 활동을 재개했으며, 이어 루돌프 켐페와 프란츠 콘비츠니, 로브로 폰 마타치치 등이 직위를 이어받았다. 1985년에 젬퍼오퍼의 복구 공사가 완료되자 상주 악단으로 다시 들어갔으며, 오페라 공연 때는 드레스덴 국립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라는 명칭으로 출연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독일 출신의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카펠마이스터로 부임해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역사가 굉장히 오래된 악단인 만큼, 독일 음악사에 끼친 영향도 대단히 크다. 초기에는 주로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들을 악장으로 초빙해 독일에 이탈리아 음악을 유입시키는 역할을 자주 수행했고, 19세기 초반에는 베버와 바그너에 의해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가 기틀을 닦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자신의 오페라와 교향시를 직접 지휘해 자주 공연했으며, 뵘과 켐페, 콘비츠니는 오페라 외에 콘서트 활동에 주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녹음 활동도 1930년대부터 활발하게 진행했으며, 전후 도이체 그라모폰과 EMI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 작품을 중심으로 여러 장의 음반들을 발매했다. 냉전 시대에는 동독 국영 음반사인 도이체 샬플라텐에서 대부분의 녹음을 제작했으며, 특히 블롬슈테트가 남긴 베토벤 교향곡 전집과 브루크너 교향곡들이 유명하다. 시노폴리도 도이체 그라모폰에 로베르트 슈만과 브루크너, 슈트라우스 작품 등을 취입했으며, 루이시도 소니 클래시컬에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를 녹음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명훈이 일본 바이올리니스트 가시모토 다이신과 소니 클래시컬에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보수적인 악단이라 현대 작품의 공연은 많지 않지만, 독일 음악의 연주에 있어서는 가장 정통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 체제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지금도 어느 지휘자와 상관 없이 고풍스러운 음향을 유지하고 있다. 주로 중부독일 방송국(MDR)에서 연주회와 오페라 공연을 중계하고 있으며, 단원들의 실내악 연주회와 프라우엔 교회에서 진행하는 종교음악 연주회도 개최하고 있다.

1914년부터 임명된 상임 지휘자들은 공식적으로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의 직함도 동시에 수여받고 있다. 이외에 정명훈이 2012년 이 악단 역사상 최초의 수석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말러 교향곡 사이클을 진행하고 유럽과 아시아 투어를 수행하는 등 틸레만의 업무를 분담하면서 성공적으로 직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현재도 그 직을 유지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 Camerata Salzburg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오케스트라 : Camerata Salz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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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아카데미 카메라타, 카메라타 아카데미카 잘츠부르크 (실내 관현악단),Camerata Academica des Salzburger Mozarteums / Camerata Academica Salzburg
1952년 베르나르트 파움가르트너가 모차르테움 대학의 교사와 학생을 모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아카데미 카메라타(Camerata Academica des Mozarteums Salzburg)"로 창단한 실내 관현악단.

베르나르트 파움가르트너를 시작으로, 안토니오 야니그로(Antonio Janigro 1971?1974), 산도르 베그(Sandor Vegh 1978?1997), 로저 노링턴(Roger Norrington 1997?2006), 레오니다스 카바코스(Leonidas Kavakos 2007?2009)가 지휘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