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출연진 소개(1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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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 마르크 샤갈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저 : 마르크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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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Chagall
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출생.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드파리 최대의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7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미술학교에 다닌 후, 1910년 파리로 나와 A.모딜리아니와 F.레제 등을 배출한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큐비즘기법을 익혔다. 1911년 앙데팡당전(展)에 첫 출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화가와 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1911년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성공한 후 그해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으나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잇달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모국에 머물면서 미술단체의 요직을 맡았다. 고향에 미술학교를 열고, 1919년 모스크바의 국립유대극장의 벽화장식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1922년 베를린, 19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화상(畵商) 폴라즈의 의뢰에 따라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19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19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展)에서 판화상을 받았으며, 유화·판화·벽화(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벽화, 파리오페라극장의 천장화 등)·스테인드 글라스·조각·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슬라브의 환상감과 유대인 특유의 신비성을 융합시킨 독자적인 개성을 강하게 풍겼다.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고향의 생활,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를 즐겨 다루었고,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풀어주는 매력이 있다. 작품으로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 등과, 자서전에 《나의 인생 Ma Vie》(1965)이 있다.
출처) 두산 ENCYBER.COM

그림 : 살바도르 달리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살바도르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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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dor Dali
스페인 피게라스 출생.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이자, 초현실주의 운동을 시각 언어로 구체화시킨 대표적 화가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최초로 회화에 도입한 근대와 현대의 이정표이며, 회화를 통해 정신분석학의 묘경을 탐구한 미술의 프로이트라 할 수 있다.

14세 때부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융통성 없는 성격으로 미술사에 답안을 거부하여 1926년 퇴학당했다. 그는 인상파, 점묘파, 미래파의 특징을 받아들여 입체파나 형이상파 등의 영향을 받은 초기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1925년경부터 정밀한 세부묘사로 향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에 영향으로 무의식 속의 세계인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과 교류하였다. 이때 브뤼통에 의해 정식으로 초현실주의파의 정식일원이 되었다.

아홉 살 연상인 유부녀와의 사랑, 평생 계속된 기행, 스스로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창작 활동으로 평단과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어 1981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고가에 작품이 팔리는 생존 작가가 되었다. 자신 스스로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그의 기법은 기이하고 형이상학적인 무의식 세계를 객관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37년 이탈리아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의욕이 생겨났다. 초현실주의파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고전주의의 신비성을 추구하여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제명 이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1982년 갈라의 사망 이후 푸볼 성에 칩거하다가 1989년에 사망했다.

한편 브뉘에르와 합작한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근전시대」「황금시대」는 영화사에 매우 독자적인 의미를 남겼다. 「자화상」 「기억의 영속성」 「갈라의 초상」 「스페인」 「레다 아토미카」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으며, 가극이나 발레 의상, 무대 장치 등 상업 미술에 있어서도 천재성을 발휘한 달리는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하여 『달리, 나는 천재다!』 『밀레의 만종의 비극적 신화』 등 자신의 예술 세계를 뒷받침해 줄 집필 활동에도 몰두했다. 『Hidden Faces』는 스스로를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을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하는 화신”이라 일컬은 달리가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쓴 최초이자, 최후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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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바실리 칸딘스키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바실리 칸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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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sily Kandinsky
모스크바 출생으로,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 정치, 경제를 전공했다. 서른 살에 도르파트 대학 교수직을 사양하고, 뮌헨으로 옮겨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그는, ‘팔랑스’ ‘청기사’ 등의 그룹을 결성했고, 1912년 예술연감 『청기사』를 간행했다.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점·선·면』 『회고』 『음향』 등이 있다.

그림 : 파블로 피카소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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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 바르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투신하였다.

그림 : 호안 미로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호안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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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 Miro
1898년 바르셀로나 태생인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1912년부터 그림을 시작했다. 그는 초기에 고전적인 화법을 익히고 있었지만, 1919년 파리로 이주하고 1924년 경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면서 변모하고 그림에는 환상적인 요소가 등장하게 된다.

클레(Klee)와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을 받은 그의 예술은 구상의 수법에서 떨어져 나와 많은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한 기호들에서 선이나 색채는 어린시절의 상징들과 직접적인 서정성을 나타낸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창작의 재료 앞에서 느끼는 감동에서 시작하여 정열 속에서 작업을 이루어 나아갔다. 예를 들어 한참을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때때로 한달 동안 그 캔버스에 손도 안대고 내버려둔다. 그리고는 어느날 다시 캔버스를 꺼내고 냉정하게 장인처럼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단순히 초현실주의자로서만 한정해서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초현실회화의 중요한 기법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무의식이나 꿈의 내용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재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현실주의가 막을 내린 194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기법을 고수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사조를 완성해 나아갔다. 1925년에 완성한 '어릿광대의 사육제'는 '파리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첫 초현실주의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다. 여기서 나타난 기묘한 모습들은 그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에 얼마나 크게 경도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배경은 창문과 테이블이 있는 실내정경이지만 그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형상들은 연체동물과 같은 기이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흡사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듯이 여러 가지 미생물들과 같은 유기체들이 둥둥 떠나니 거나 바닥에 놓여 있다.

그림 : 프란시스 베이컨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프란시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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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Bacon
2차 대전 말기부터 유채화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어 강렬한 표현력으로 주목을 끌었다. 주제가 되는 인물이나 동물은 과거의 명화나 사진을 통해 얻고, 이를 상징적인 유기적 형태로 변형시켜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폐쇄공간 안에 배치하였다.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작품은 초현실주의에 가까웠지만, 근년의 작품에서는 모티프의 변형과 격렬한 필치에 추상표현파와 비슷한 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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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알베르토 자코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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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o Giacometti
스위스의 조각가·화가. 인상파 화가인 G. 자코메티의 아들이다. 1925년경부터 상상력에 의한 관념적 공간조형을 시작하였으며 1929∼1934년 초현실주의 그룹의 한 중요 구성원으로서 권위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후 조각계의 제 1인자로서 널리 인정 받게 되었으며 동시에 입체적인 공간을 유화로 추구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의 작품은 서유럽 조형미술의 전통에서 가장 현대적·전위적인 표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림 : 마르셀 뒤샹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마르셀 뒤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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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 Duchamp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입체파 조각가 R.D. 비용, 화가 J. 비용의 아우. P. 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입체파의 일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동시성을 표시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3년부터 다다이즘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하였고, 제 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뉴욕에서 초현실주의전을 열었다.

그림 : 르네 마그리트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르네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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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e Magritte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1898~1967)

벨기에의 화가. 얼마 동안 큐비즘(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다음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 운동에 참가하였다. 신선하고 시적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쪽을 좋아했다. 서로 고립한 현실적 물체와 논리를 뒤집음으로써 서로를 재미있게 결합시키고 명쾌하게 묘사하여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를 그렸으며,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평이함과 깔끔함으로 밤의 신비나 괴기를 즐기는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주목 받았다.

그림 : 앙리 마티스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앙리 마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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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Matisse
Henri Eile-Benoit Matisse. 1869~1954.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꼽힌다.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아방가르드를 이끈 대표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평생에 걸쳐 [아틀리에], [창문], [벗은 여인], [바이올린], [금붕어], [춤] 등을 반복해서 그렸다. 1900년경 야수파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평생 동안 색채의 표현력을 탐구했다. 정물화와 풍경화들을 포함한 그의 초기 작품들은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었으나, 마티스가 브르타뉴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후, 변화가 시작되었다. 생생한 색의 천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 자연광의 색조 등을 표현하며 활력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인상주의에 강하게 매료된 마티스는 다양한 회화 양식과 빛의 기법들을 실험하기도 했다. 앙드레 드랭과 마티스가 처음으로 공동 전시회를 열었을 때, 미술 비평가들은 이 작품들을 조롱하듯 ‘레 포브’(Les Fauves, 야수)라고 불렀는데, 그로 인해 이 화가들은 ‘야수’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림도 호평을 받아, 찾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야수파’는 하나의 미술 운동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춤], [젊은 선원]이 있다.

그림 : 피에트 몬드리안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피에트 몬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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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
피에트 몬드리안 Piet Mondrian (1872~1944)

네덜란드의 화가.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초기엔 자연주의 화풍에 철저하였으며 쓸쓸한 겨울풍경과 정물 등을 그렸는데, 섬세하면서도 어딘지 병적이었다. 그 후 차차 추상으로 바뀌었는데, 문자 그대로 나무면 나무, 모래언덕이면 모래언덕의 핵의 추상으로서 작품을 창조하였다. 끝내는 수평과 수직의 순수추상으로 향하였는데, 이는 질서와 비율과 균형의 미를 의미한다.

그림 : 만 레이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만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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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Ray
만 레이 Man Ray (1890~1976)

미국의 사진작가·화가. 파리로 옮긴 뒤 본격적으로 다다이즘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1924년경부터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때부터 사진에 의한 빛의 조형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다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여 거기에 빛을 비춘 결과 나타나는 추상적 영상을 레이요그래프(rayograph)라 명명하였다. 그가 사진에 의한 공간과 움직임의 새로운 원리를 탐색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림 : 잭슨 폴락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잭슨 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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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Jackson Pollock
미국의 추상화가. 표현주의를 거쳐 격렬한 필치를 거듭하는 추상화를 창출하였다. 1947년 마룻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하여 하루아침에 명성을 떨쳤는데, 떨어뜨린 도료의 궤적을 거듭하여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화포에 기록하는 이 기법을 액션페인팅이라 한다. 세계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 : 앤디 워홀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그림 : 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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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Warhol,Andrew Warhola
192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한 슬로바키안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회화와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1949년 뉴욕으로 진출, 『보그』, 『바자』등 유명 패션지의 삽화와 광고 제작에 참여하며 상업 디자이너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만화의 한 컷, 신문보도 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轉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하여 이름을 떨쳤다. 영화와 소설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순수 미술로 전환, 평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는데, 1962년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열린 「뉴 리얼리스트 전」에 출품한 「캠벨 수프 캔」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워홀은 대중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을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끊임없이 복제하고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예술 자체의 정의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는 뉴욕에 「팩토리」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를 열고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찍어 내게 하였다. 대중의 관심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던 것이다.

워홀은 예술을 광고화하고 땅에 내려오게 하여 대중이 가지고 놀게 만들었다. 팝 아트는 코카콜라 같은 것이다. 돈을 더 낸다고 더 좋은 콜라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더 내면 수가 많아지지 내용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누구나 같은 것을 마신다. 대통령이 마시는 콜라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마시는 콜라나 길거리의 건달이 마시는 콜라나 모두 같은 것이다. 근엄하지 않고 평등하고 쉽다.

이와 같은 일상적인 것에의 관심, 돈과 명성에의 집착은 그에게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그의 성공을 비난하거나 폄하시키는 구실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워홀은,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라는 반응이다. 나아가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과 언론의 공격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일상의 모든 것이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일상적인 사물들이 갖는 보편성과 대중성이 미국 문화의 본질이자 미래의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바라고 보았던 그는 자신의 예술을 정당화할 어떤 철학보다는 자신이 작품을, 사랑을, 시간을, 인간관계를 어떻게 다루고 성공시켜 나가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