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출연진 소개(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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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Richard Donner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감독 : Richard Do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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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도너
개성 넘치는 작품으로 유명한 리차드 도너는 호러영화의 대명사 <오멘>을 시작으로 지난 20년간 수많은 인기 작품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미국의 히어로 시리즈 <슈퍼맨>, 스티븐 스필버그와의 공동 작품 <구니스>, <레이디 호크> 등을 연출한 그는 당시 무명이었던 멜 깁슨과 데니 글로버라는 경찰 커플로 한 <리쎌 웨폰>, <리쎌 웨폰 2>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크게 성공을 거두며 멜 깁슨과 데니 글로버를 스타로 만들었고, 계속된 속편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3편에서는 1억 5천만 달러, 그리고 멜깁슨, 대니 글로버, 르네루소등의 스타 군단이 총 출연한 4편에서는 1억 4천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리쎌웨폰> 시리즈는 약 10억달러라는 놀라운 흥행기록을 남기며 최고의 헐리웃 시리즈 영화로 손꼽히게 되었다.

이밖에도 리차드 도너는 각종 TV 시리즈를 비롯, 가족 영화 <프리 윌리>시리즈를 제작, 조디포스터와 멜 깁슨의 <매버릭>, 실베스타 스텔론,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어쎄신>, 줄리아 로버츠, 멜깁슨 주연의 <컨스피러시>등의 다양한 작품을 연출하며 헐리웃의 대표적인 스타 감독으로 인정 받게 된다.

[필모그래피]

오멘 (1976)(1976)|감독
슈퍼맨 (1978)(1978)|감독
슈퍼맨 2(1981)|감독
레이디호크(1985)|감독
구니스(1985)|감독
리쎌 웨폰(1987)|감독
리쎌 웨폰 2(1989)|감독
리쎌 웨폰 3(1992)|감독
매버릭(1994)|감독
어쌔신 (1995)|감독
컨스피러시(1997)|감독
리쎌웨폰 4(1998)|감독
타임라인(2003)|감독
식스틴 블럭(2006)|감독

출연 : Marlon Brando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출연 : Marlon Bra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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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브란도
정말로 비대한 덩치에 유난히 괴벽스러운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난 말론 브랜도. 그의 말년의 행동들은 전후 배우의 표준으로 여겨졌던 젊은 시절의 명망을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그 표준에 그 자신조차 미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50년부터 1972년까지 그의 영예로운 전성기 동안 그는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화배우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브랜도에게는 누이가 둘 있었고 부모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아버지는 집에 없는 적이 많았고 예술적인 성향을 지닌 어머니는 술에 취한 채 무너져 있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1943년에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다친 무릎 때문에 군대에도 입대하지 못하자 그는 누이들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미래에 대한 아버지의 낮은 기대에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뉴욕스쿨의 드라마 워크숍에 등록한 그는 스텔라 아들러에게 연기를 배웠는데, 그녀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론을 적용하여 연기에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해 중요한 감정적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배우의 능력을 강조했다. 브랜도는 진정한 자신의 스타일로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이끌어 줄 영향으로 그 '메소드 연기법'을 채택하고, 1944년에 「아이 리멤버 마마」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했다. 굉장한 평가가 이어지면서 할리우드로 오라는 제안들이 있었지만 장기적인 계약에 따르는 제한들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도 뜻을 굽히고 신체가 마비된 군인들의 이야기인 「맨(1950)」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 그 후 그는 연극 무대를 버리고 영화로 방향을 돌려 그때까지 어떤 배우들도 관객에게 선보인 적 없는 가장 비범하고 자극적이며 어려운 연기들을 보여 주었다. 1950년대 초의 작품들만 보아도 그에게 첫 아카데미후보의 영예를 안겨 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와 「혁명아 사파타(1952)」, 「줄리어스 시저(1953)」, 「위험한 질주(1953)」 그리고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게 한 「워터프론트(1954)」가 포진하고 있다.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브랜도는 박스오피스의 금광이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영화계에서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는 배우였다는 점이고, 1962년에는 「바운티 호의 반란」 한 편에 125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받으며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높이 평가된 상업성은, 일반적으로 그에게 주어지던 '진지한 예술로서의 연기'의 선구자라는 인정과 더해지면서 압박감으로 작용했고, 결국 그가 변덕스럽고 이상한 행동을 하도록 몰고 갔다. 그런 그의 행동은 영화 제작 과정을 와해시키거나(「애꾸눈 잭(1961)」) 동업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브랜도가 다양한 욕망들을 -특히 음식과 여자들- 채우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비범한 재능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자신을 낭비하고만 있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브랜도라는 '브랜드' 되살리기
1960년대의 상업적으로 실패한 일련의 영화들(「어글리 아메리칸(1963)」, 「체이스(1966)」)과 함께 그러한 비판적인 견해는 더욱 확고히 뿌리내렸다. 그러다가 브랜도는 마리오 푸조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그가 연기한 돈 콜레오네라는 인물은 즉각 아이콘의 위치에 올랐고 그에게 또 하나의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안겨 주었다. 브랜도는 아카데미상을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러나 1972년은 뭐니뭐니해도 그의 가장 의미심장한 연기라 할 만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다.

말년의 활동은 간헐적이었다. 주로 우스꽝스럽고 지나치게 많은 출연료를 지불한 역할(「슈퍼맨(1978)」, 「포뮬라(1980)」, 「크리스포터 콜럼버스(1992)」, 「닥터 모로의 DNA(1996)」)이나 그의 연령과 아웃사이더라는 위치를 잘 살린 좋은 역할들(「미주리 브레이크(1976)」, 「지옥의 묵시록(1979)」, 「프레쉬맨(1990)」)이 조금 있었고,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뿌리(1979)」의 한 에피소드에도 출연해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떠들썩하게 보도된 그의 딸의 죽음까지 포함하여-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낭비였다.

그의 실망스러운 선택과 천재의 기벽을 알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브랜도가 연기예술에 지반을 뒤흔드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표준으로 우뚝 선 그는, 미국 특유의 연기 유파뿐 아니라 미국 특유의 남성상-남성적 특징과 여성적 특징을 조화시키고 거기에 계급의식까지 더한-이 자리할 하나의 우주를 창조해 냈다.


브랜도 신화

말론 브랜도는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배우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연기 스타일은 미국 연기에 혁명을 일으켰다. 스탠리 코왈스키와 돈 콜레오네를 비롯해 브랜도의 여러 인물들이 아이콘적 입지에 오른 것은 그가 즉석에서 이끌어 낸 즉흥연기의 성과였다. 그는 제임스 딘과 폴 뉴먼 등의 역할 모델이었고, 모든 미국 배우들을 평가하는 척도다.

·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 -잭 니콜슨, 브랜도와 '메소드 기법'과 자신의 연기 스타일에 미친 그의 영향에 관하여
· 그는 조명을 사랑해! 조명이 그를 통과하며 어떻게 빛나는지 보이지- 나는 편파적이면 안 되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야.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 이탈리아계 미국인이거나, 아니면 너무 탁월해서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그려낼 수 있는 배우를 원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래서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하고 물었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모르겠어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두 배우가 누굽니까? 로렌스 올리비에와 말론 브랜도죠. … 브랜도는 나의 영웅 중의 영웅이에요. 그를 만나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거예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의 캐스팅에 관하여
· 그와 나는 공통점이 많아요. 그도 적을 많이 만들었죠. 그 역시 완벽주이자고요. -베티 데이비스, 자기와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데 흥분해서.


"배우란, 당신이 그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을 때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자다."


출처 : 501 영화배우-마로니에북스

출연 : Gene Hackman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출연 : Gene Hac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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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해크만
진 핵크만은 1964년 < Lilith >로 데뷔해 7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였다. <프렌치 커넥션>으로 아카데미상 주연상,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상 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관록있는 배우이다. 이 외에도 세 번의 골든 글러브상, 두 번의 National Organization of Theatre Owners상, 칸느영화제 남우주연상, 비평가 그룹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2003 골든 글러브 할리우드 외국인 협회로부터 Cecile B. DeMille 상을 수여 받았다. 진 핵크만에게 있어 <런어웨이>는 <야망의 함정>과 <가스실>에 이어 존 그리샴 원작 영화 세 번째 출연이다.

[필모그래피]

포세이돈 어드벤처(1972)|주연배우
머나먼 다리(1977)|주연배우
라스트 부르맨(1977)|주연배우
슈퍼맨 (1978)(1978)|주연배우
슈퍼맨 2(1981)|주연배우
지옥의 7인(1983)|주연배우
슈퍼맨 4(1987)|주연배우
노웨이 아웃 (1987)(1987)|주연배우
배트 21(1988)|주연배우
익스프레스(1990)|주연배우
동업자 (1991)(1991)|주연배우
용서받지 못한 자 (1992)(1992)|주연배우
야망의 함정(1993)|주연배우
제로니모 (1993)(1993)|주연배우
와이어트 어프(1994)|주연배우
퀵 앤 데드(1995)|주연배우
크림슨 타이드(1995)|주연배우
겟 쇼티(1995)|주연배우
버드 케이지(1996)|주연배우
앱솔루트 파워 (1997)|주연배우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주연배우
리플레이스먼트(2000)|주연배우
하트브레이커스(2001)|주연배우
로얄 테넌바움(2001)|주연배우
런어웨이(2003)|주연배우
웰컴 프레지던트(2004)|주연배우

출연 : Christopher Reeve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출연 : Christopher Re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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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리브
어릴 때부터 연기에 관심을 가져 13살때부터 무대에 섰다. 코넬 대학에 다니면서 영국과 프랑스에서 연기를 공부했고, 줄리어드 학원에서 죤 하우스먼(John Houseman)의 지도도 받았다. 그 후 지방무대들에서 활동하다가 76년에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

영화는 78년에 찰튼 헤스튼 주연의 핵잠수함 구조작전을 그린 해양영화 <위기의 핵잠수함(Gray Lady Down)>에서 작은 조연으로 데뷔했다. 192cm의 건장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보이는 외모, 그리고 탄탄하게 갖추어진 연기력으로 인해 <슈퍼맨>의 오디션에 합격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열었고, 계속 시리즈에 출연을 해오면서도 진정한 연기자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영화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고 있는 노력파이기도 하다. <슈퍼맨> 시리즈 이외의 작품으로는, 제인 시모어와 공연작으로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SF적 기법으로 묘사한 이 <신비의 여인>이라는 제명으로 TV에 방영되었으며, 마이클 케인과 공연 작품인 스릴러 이 있다.

그는 1995년 5월 승마대회에 참가했다가 낙마해 전신마비가 되는 커다란 불운을 겪은 이후, 척추 연구 확대를 호소하는 운동과 의료보호 확대를 촉구하는 재활과 사회운동에 힘써왔다. 96년에는 휠체어에 앉은 채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등장해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1998년에는 히치콕의 스릴러물 리메이크한 영화 <이창>에 출연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출연 : Margot Kidder 만든이 코멘트 보이기/감추기

  출연 : Margot Kid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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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곳 키더
1948년 10월 17일 캐나다 출생. 영화 〈슈퍼맨〉에서 연인 로이스 레인역을 따낸 그녀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공연한 〈위대한 왈도 페퍼(The Great Waldo Pepper)〉 등 몇편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등장했으나, 주연급으로는 처음이었다. 이후 〈아미티빌의 공포(The Amityville Horror)〉 등의 히트작에 출연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