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받던 사람이, 자기 손으로 다른 모든 사람을 박해자로 만들었든 간에, 아니면 자기만의 끔찍한 상상력으로 음모를 꾸미는 적들이 떼를 지어 밀려온다고 믿었든 간에, 그렇게 쫓기는 사람이 되면 자신이 개인적으로 불행을 겪는 것 외에도 그에게는 일종의 윤리적 결함이 생긴다네. 쫓고 쫓기는 과정 자체에 결부된 기본적인 부정직함이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원래 고통이나 외로움, 각종 사고나 질병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쉽게 찾아오곤 하지―우리 모두에게. 본성상 의심이 많은 자에게는 재난이 찾아오는 법이야. 의심은 산酸과 같아서,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을 파괴하고 의심하는 자를 잡아먹는다네. 밤낮으로 주위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야 하고, 그들의 음모에 휘말리지 않고 계책을 물리칠 방법을 고안해야 하며, 자기 발 앞에 누가 그물이라도 던져 놓았는지 멀리서부터 냄새를 맡고 알아챌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하니 말일세―[…]”
--- pp.35~36 「5장」 중에서
“[…] 당신 전에 살던 사람들은 아마 자기 자신을 찾고 있었나 봐요. 그들이 뭘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여기서 몇 개월 이상은 버티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휴식 시간 내내 저 다락방에서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부담이 되었나 봐요. 당신도 물론 여기 혼자 지내면서 당신 자신을 찾으려고 왔겠죠. 아니면 새로운 시라도 한 편 쓰려고 왔을 수도 있고요. 살인과 고문 같은 것들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세상이 이미 제정신을 차려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제 드디어 새로운 시 한 편이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
--- p.52 「7장」 중에서
“[…] 이런 모든 종교는, 지난 세기에 태어난 수많은 종교 중에서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고 있는데, 모두 우리를 구원하러 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피를 쏟게 만드는 것이라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세상의 회복을 믿지 않네. 글쎄. 그러니까 나는 어떤 형태로든 세상의 회복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일세.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이 그 자체로 매우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건 분명히 아니지, 이 세상은 비뚤어졌고 암울하며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회복시키겠다고 나타난 자들이 순식간에 피의 강에 빠져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일세. 오시게, 이제 함께 차나 한잔 마시고, 자네가 오늘 내게 가져왔던 말도 안 되는 글들은 한쪽으로 밀어 놓게. 언젠가 이 세상에서 모든 종교와 모든 혁명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내가 장담하건대―마지막 하나까지, 예외 없이―이 세상에 전쟁들이 훨씬 적게 일어날 걸세. 사람이란, 이마누엘 칸트가 쓴 적이 있는데, 결국 본성상 비뚤어지고 닳아빠진 그루터기일 뿐이라고 했지. 우리가 목까지 피에 잠겨 건널 생각이 아니라면 그를 대패질할 생각도 말아야겠지. […]”
--- p.104 「15장」 중에서
“당신은 제게 머무르라 하시는군요.” 슈무엘은 문장 끝에 물음표를 달지 않고 말했다.
“자네는 그녀를 이미 사랑하고 있지 않나.”
“아마도 아주 조금, 그녀의 그림자만을, 그녀가 아닌.”
“자네는 원래 그림자들 사이에 살고 있지 않았던가? 종從이 그늘을 바라는 것처럼.”
“그늘. 그럴지도. 예. 그렇지만 완전히 종이 된 건 아니에요. 아직은.”
--- p.118 「18장」 중에서
“[…] 진실로 세상에 있는 힘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꿀 수 없어요. 미워하는 사람을 노예로 바꿀 수는 있지만, 그가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세상에 있는 힘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광신도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지요. 그리고 세상에 있는 힘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복수에 목마른 사람을 바꿀 수는 없지요―친구로. 자,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생존이 걸린 문제예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광신도를 온건한 사람으로, 복수하고 시비를 걸려는 사람을 친구로 바꾸는 것 말이에요. 지금 제가 우리는 군사력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으세요? 그건 당치도 않아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지요. 이렇게 당신과 제가 논쟁을 하는 순간에도,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도, 힘은, 우리의 군사력은 언제나 중요하다는 것을 당신만큼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바로 그 권력의 힘이 우리가 당장 멸망하지 않도록 막아 주고 있지요. 우리에게 힘은 막는 역할을 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매 순간, 기억하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힘은 아무것도 해결하거나 해소해 주지 않아요. 얼마간 재난을 막아 줄 뿐이지요.”
--- pp.158~159 「25장」 중에서
“[…] 나는 말일세, 친구, 나는 모두가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않네. 사랑의 크기는 매우 제한적이야. 사람이 다섯 명의 남자와 여자를 사랑할 수는 있네, 혹시 열 명도, 심지어 열다섯 명도 가능할 수 있겠지. 사실상 그조차―매우 드물다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자기가 제삼세계 전체를 사랑한다고, 또는 라틴아메리카를 사랑한다고, 또는 여성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화려한 문학적 수사일 뿐이라고 하겠네. 입에 발린 말. 구호. 우리는 아주 소수의 인간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태어났다네. 사랑은 개인적이고 특이하며 모순이 가득한 사건이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 이기심, 탐욕, 육체적인 욕망 때문에, 사랑받는 사람을 조종하고 그를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굴복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예도 적지 않고, 사실―사랑은 미움과 매우 닮아 있고 사람들이 대부분 무시하고 있지만 미움에 훨씬 가깝다네. 예를 들자면, 자네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할 때, 두 경우 모두 자네는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그가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 그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간절히 알고 싶어 하지. 부패하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며 인간이니, 누가 이를 알리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렇게 말했지. 또 토마스 만은 어딘가에 미움이란 수학의 마이너스 기호가 붙은 사랑이라고 쓴 적이 있고 말이야. 질투의 크기를 보면 사랑이 미움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데, 질투 안에는 사랑이 미움과 함께 섞여 있기 때문이야. 『아가』를 보면, 한 구절 안에,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다고 기록되어 있지. […]”
--- pp.202~203 「30장」 중에서
“[…]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슈무엘은 말했다. “그 안에 변화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어떤 변화도 인정할 수 없고 변화가 생기는 것을 죽을 만큼 무서워하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를 혐오하는 사람들 눈에 언제나 배신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어요.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은 아름다운 꿈을 꾸었고, 그의 꿈 때문에 그들이 그를 배신자라고 부른 거예요.”
--- p.374 「45장」 중에서
“가룟 유다의 입맞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입맞춤은, 당연히 배신자의 입맞춤이라고 할 수 없죠. 최후의 만찬을 마친 예수를 체포하라고 성전 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는 가룟 유다가 그들을 위해 자신의 스승을 알려 줄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바로 며칠 전에 성전에 들이닥친 예수는 분노에 가득 찬 채,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환전상들의 탁자들을 뒤집어엎었거든요. 벌써 온 예루살렘이 그를 알고 있었죠. 더구나, 그들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그는 도주하려 하지 않았고 조용히 일어나 스스로 간수들과 마주 섰고 기꺼이 그들과 함께 갔으니까요. 유다의 배신은 그 간수들이 오고 그가 예수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 벌어진 것이 아니에요. 그의 배신은, 만약 그가 예수를 배신했다면,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을 때 일어났어요. 바로 그 순간에 유다가 자기 신앙을 잃었던 거죠. 그리고 자기 신앙을 잃은 그는 더 살아 있을 이유도 잃어버렸던 거고요.”
--- p.375 「45장」 중에서
“내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에서도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와 동의어가 되었다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말과도 동의어가 되었을 걸세.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일반 기독교인들의 눈에 모든 유대인과 유대 민족은 배신이라는 병원체에 감염된 셈이지. […]”
--- pp.375~376 「45장」 중에서
“[…] 그렇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가룟 유다건 가룟 유다가 아니건, 이 세계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을 걸세. 사라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았을 거야. 유다가 있건 없건 간에, 유대인은 믿는 자들의 눈앞에서 계속해서 배신자 역할을 맡았을 걸세. 기독교인들은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와도 언제나 우리를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그를 죽여라, 그를 죽여라, 그의 피 값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던 군중으로 기억할 걸세.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말해 두는데, 슈무엘, 우리와 무슬림 아랍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툼은 역사 속에서 아주 작은 일화, 아주 짧고 지나가 버릴 일화에 불과하다네. 그것은 앞으로 50년이나 100년 또는 200년쯤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야기가 될 테지만, 우리와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훨씬 더 깊고 어두운 문제가 있어서 앞으로 100세대가 지나도 계속될 걸세. 그들이 엄마 젖을 먹는 아이 때부터 아직도 이 세상에 신을 살해한 자들이, 또는 신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들이 활보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한, 우리가 편히 쉬는 일은 없을 걸세. […]”
--- pp.378~379 「45장」 중에서
나는 그를 내 목숨처럼 사랑했고 나는 그를 완벽하게 믿었지. 그것은 단지 자기보다 훌륭한 동생을 사랑하는 맏형의 사랑이 아니었고, 단지 여린 청년을 향해 품는 나이 지긋한 연륜 있는 남자의 사랑이 아니었으며, 단지 자기보다 위대한 젊은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사랑도 아니었고, 충성스러운 신도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자를 향해 품는 사랑은 더더욱 아니었어. 아니야. 나는 그를 하느님처럼 사랑했어. 그리고 사실 나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그를 더 많이 사랑했어. 그리고 사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지. 심지어 그를 혐오했어. 질투하고 복수하고 원한을 품는 하느님이며, 아버지들의 죄를 아들들에게서 찾고, 잔인하고 분노하며 억울해하고 보복하며 유치하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하느님을. 그러나 그의 아들은 내가 보기에 사랑이 넘치고 자비롭고 용서하며 동정심이 많고 또, 자기가 원할 때는, 재치 있고, 신랄하며, 가슴이 따뜻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지. 그는 내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물려받았던 거야. 그는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이었어. 나는 죽음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지. 나는 바로 오늘 예루살렘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어. 그 기적이 일어나면 이후로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질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기적 말이야. 이후로는 더는 아무런 기적도 필요 없는. 이후로 하늘나라가 도래하고 사랑만이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그런 기적 말이야.
--- pp.404~405 「47장」 중에서
[…] “삶은 지나가는 그림자야. 죽음도 지나가는 그림자고. 고통만 지나가지 않아. 계속되고 계속되지. 언제까지나.”
--- p.435 「50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