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정명(正名)이 아닌 ‘재난기본소득’이란 말이 정치적 목적 하에 버젓이 확산되었던 것인데, 이는 정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실의 왜곡이다.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통해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지게 된 ‘기본소득’이란 말은 그것의 본질적 의미와 달리 ‘기본적 생계를 책임질 정도의 소득을 모두에게 보장해주는 좋은 어떤 것’이라는 식의 일반적인 용어로 이해됐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이는 실체적 진실과 무관하다. ‘재난+기본소득’에 포함된 기본소득은 일반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특정한 실질을 가진 고유명사로 기존의 복지국가에 버금가는 거대 담론이다. 그러니까 기본소득은 상식 수준에서 이해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국가 체제 또는 제도를 지칭하는 담론 수준의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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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정부는 매달 일정액을 모두에게 송금하고, 사람들은 이 돈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 근로 등의 다른 소득 원천을 통해 추가적으로 소득을 얻을 수도 있고, 당분간 미래를 구상하면서 일하지 않고 쉴 수도 있다. 근로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거나 근로 의욕이 없는 사람들은 기본소득만으로 생계를 계속 꾸려갈 수도 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본소득은 무조건적으로 지급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급액이 기초생계를 꾸려가기에 충분히 적정한 수준이어야 한다. 문제는 금액이 너무 크면 지속적으로 지급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기본소득의 충분성 원칙에 합당한 지급액 수준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25% 정도가 적절하다고 제안한다. 이것이 ‘완전기본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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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는 기본소득이라는 용어 앞에 ‘청년’을 붙이는 것 자체가 형용 모순이다. 이것 자체로 기본소득의 보편성 원칙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청년의 지지(표)를 의식해 무책임·무분별하게 청년기본소득이란 용어를 ‘아류’ 또는 ‘가짜’ 기본소득이라는 인식조차 없이 일반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특히 기본소득의 핵심 요건인 무조건성 원칙을 어긴 정책조차 청년기본소득이라고 언급·홍보되는 현실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가령, 취업이 안 된 청년이나 사회안전망에 들지 못한 취업 청년들을 찾아내서 이들에게만 한시적으로 현금을 지원하는 조건부 청년 소득 지원 프로그램을 청년기본소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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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오세훈 전 시장이 안심소득제에 투입하려는 연간 42조 원의 예산 가운데 30% 정도만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근로장려금제도 등의 확대·강화에 투입해보자. 이럴 경우, 안심소득제가 기대하는 정책 효과의 대부분을 기존 복지국가의 소득보장 제도에서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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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연적 공유부 기반의 보편적·무조건적 기본소득은 알래스카 석유 배당금 제도가 실시된 지 40년이나 지났건만, 그동안 세계 어느 곳에서도 추가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래스카의 배당금 제도가 유일무이한 사례이며, 게다가 알래스카는 하나의 지역일 뿐이다. 국가 단위가 아니다. 기본소득 혹은 그와 유사한 방식을 제안하거나 주장한 논의의 역사는 매우 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 단위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거나 또는 현존하는 기본소득 사례는 아직까지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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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이 보편적 복지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무조건성’ 원칙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무조건성’ 원칙은 근로연령층에 대해 소득 수준, 재산 정도, 취업 상태, 근로 의사와 구직 노력 여부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두에게 동일 금액을 획일적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기본소득의 핵심 특성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의 이런 특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무엇일까. 보편적 복지국가의 작동 원리인 보편주의(universalism)는 아니다. 보편주의(보편적 복지)와 달리, 기본소득은 사회적 위험이나 복지 필요와 무관하게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현금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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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의 무조건적 보편성 원리에 따라 모두를 포괄할 수 있으므로 소득보장의 ‘대상 인구’ 사각지대는 원칙적으로 사라진다. 소득보장 사각지대의 두 측면 중에서 한 쪽은 해결된 셈이다. 그런데 한정된 재원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다 보면, 기초생계를 해결할 만큼의 충분한 금액을 지원하기 어렵다. 결국, 월정 지급액이 푼돈이나 용돈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소득보장 사각지대의 다른 측면인 ‘급여 수준’(월정 지급액) 사각지대는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기본소득은 소득보장 사각지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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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은 소득재분배 효과 차원에서 해법이 되기 어렵다. 막대한 규모의 증세가 어려운 현실적 조건에서 기본소득 방식은 소득재분배 효과가 미미할 뿐만 아니라 가족 단위의 환산에서는 오히려 역진적일 수도 있다. 이는 재산과 소득 수준, 직업 활동 여부, 생계를 같이 하는 가구 전체의 소득 등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 보편성이라는 기본소득의 본질적 특성(원리)에 기인한다. 결론적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1/n 방식의 기본소득 원리는 소득재분배 효과와 양극화 해소 효과에서 기존 복지국가의 보편적 복지 원리에 크게 못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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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결론을 지어보자. 정부의 재정 지출에서 소비 진작을 통한 경기 활성화 효과가 가장 높은 것은 정부의 직접 소비이므로 현금 지급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금의 공적 이전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소득재분배 효과와 경기 활성화 효과가 열등한 방식이다. 정부가 현금을 기본소득 방식으로 풀면 단기적인 복지·경제 효과에서만 열등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 자체에 부정적 결과를 낳게 된다. 경제성장은 생산요소(자본과 노동)의 공급과 기술 혁신으로 결정된다. 기본소득 방식의 현금 이전으로는 경기의 활성화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도 이룰 수 없다. 결과적으로, 기본소득 방식은 소득재분배 효과와 경기 활성화의 경제 효과가 열등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에도 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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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노동시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면 보편적 복지국가의 재정적 역할 강화가 굉장히 중요하다. 즉, 교육·훈련 등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양질의 사회서비스 확충 등 일자리 정책, 인적·사회적 자본의 확충, 능력 배양과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적극적 개입 전략 등이 기본소득의 지급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렇기에 과학기술·경제·고용의 급속한 변화에 따른 경제사회의 불확실성과 일자리의 불안정성이 커질수록 기본소득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회적 위험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보편적 복지의 확대·강화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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