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비용의 문제로 나환자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을 주저하는 조선총독부에 앞서 조선사회는 나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움직였다. 조선사회는 1920년대 초반부터 부랑나환자를 사회문제화했고, 치안과 위생의 관점에서 이들의 위험성을 담론화했으며, 부랑나환자의 관리를 보건당국에 요구했다. 조선사회의 이러한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통치비용의 문제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본격적인 부랑나환자의 관리에 소극적이자, 조선사회는 먼저 나서서 부랑나환자를 격리할 수 있는 나병원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나병구제연구회 같은 단체를 설립하고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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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국가는 어떤 이들을 부랑인이라고 보았는가? 국가가 ‘사회악’으로서의 부랑인을 범주화하는 방식은 단순했다. 특정한 방식으로 일하는 이들이 곧 부랑인이라는 식이었다. 부랑인의 강제수용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근거조항이 된 1975년의 「내무부 훈령 제410호」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훈령 제1장 2절 및 3절은 부랑인을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며,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사회와 도시 질서를 저해하고 나쁜 영향을 줄 만한 습속이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않는다. 부랑인은 직업으로 범주화된다. ‘걸인, 껌팔이, 앵벌이, 노변행상, 빈 지게꾼’ 등의 직업이 그것이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행상, 넝마주이 등의 ‘가두직업 소년’ 역시 부랑인과 동일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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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국가는 누구를 포용의 대상으로 여겼는가? 그것은 ‘발전’에 필요한 인력, 즉 고학력과 고숙련 인력이었다. 1960년대 중반 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래 1987년까지 복지 서비스는 소수의 고숙련 및 고학력 인력에게 우선 제공되거나, 더 많이 제공되었다. 부랑인들을 포함하여 사회 기층에 존재하는 구성원은 물론, 다수의 노동자와 서민층은 그러한 복지 서비스에 접근조차 힘들었다. 1961년 정권을 잡은 이들은 가장 시급한 실업문제 대신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 그리고 산업재해보험을 선택했다. 산업재해보험이 가장 먼저 선택된 이유 중 하나는 실업보험과 달리 근로의욕을 저하시키지 않고, 국가의 지출을 최소화하면서도 빈곤화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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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개발 과정에서 부랑인을 동원하고 활용한 국가와 민간사업체, 민간복지단체 3자의 구체적 이해와 계약, 이익 배분의 구체적 내용 역시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다. 이에 대한 사실 규명과 피해보상, 새로운 역사쓰기의 작업은 주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부랑인’에 더하여 ‘범죄자’라는 낙인을 받은 이들, ‘정숙하지 못한 여성’이라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중 규범까지 덧씌워진 이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지금까지도 온전히 들을 수 없다. 새로운 역사쓰기의 과정에서 단속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계급, 젠더, 장애, 연령 등의 다양성과 교차성을 소거해버린다면, 그리고 ‘무고한’ 부랑인을 구분하고 범죄 행위에 ‘정당하게’ 부여된 갱생 프로그램을 구분하길 우선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행사된 폭력과 착취를 문제화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우리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바라보며 그저 국가 혹은 시설운영자를 비난하는 데 그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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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지 않는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여러 고민을 던져준다. 1987년의 민주화, 2000년대 이후 소위 ‘복지국가의 발전’ 이후에도 민간 사회복지법인들이 복지체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더 커졌다. 그런데 형제복지원 사례를 통해 드러난 민간 사회복지체계의 난점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문제집단’을 격리수용하는 시설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사회복지법인들의 구조와 기능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민주적이고 공공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작업 역시 이러한 현재적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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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은 인간의 실업상태와 불안정한 주거상태를 배제의 조건으로 상정하고, 이 조건에 맞는 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동시에 정부의 자활정책과 시설의 자활사업이 공모한 장소였으며, 시설이 확장되자 수익성을 위한 작업장에 지역사회의 사업체가 연루된 장소였다. 이렇게 자활은 부와 시설과 지역사업체가 뒤엉킨 하나의 레짐이었고, 이 현상을 사회복귀로 인식하게 하는 가면이었다. 더구나 자활 레짐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의 정당성 역시 의심받지 않았다. 반면에 이 레짐에 갇힌 수용자에게 자활이란,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 텅 빈 구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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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Z. Bauman)은 “홀로코스트가 벽에 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창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즉 홀로코스트를 이제는 지나가버린 예외적 사건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숨은 가능성을 검사하는 드문, 그러나 의미 있고 신뢰할 만한 시금석”이자 “사회학적 실험실”로 간주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만약 홀로코스트처럼 형제복지원이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창문이라면, 우리는 이 창문을 통해 무엇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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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은 더 문명화되면 사라질 야만적인 것도, 근대화 과정에서 격퇴해야 할 전근대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날에는 형제복지원과 같은 극단적인 시설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복지나 교정, 치료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이 가정과 일터와 놀이터가 분화되지 않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곳에서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박탈당한 채 현재만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근대화·문명화가 되지 않은 것의 결과가 아니라 근대화·문명화의 결과다. 형제복지원은 예외적인 시설이 아니다. 총체적 기관에 수용된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눈에 잘 띄지 않은 채로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설이라는 곳이 실제로 수행하는 기능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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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이제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과거사법」이 통과됨으로써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의 길은 열렸지만 철저한 진상규명,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자 명예회복, 피해자 배·보상 등이 이루어지도록 감시하고 압박해나가는 과정이 지속되어야 한다. 피해생존자들의 트라우마 극복과 자존감 회복 역시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설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보상이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치유의 시도와 노력이 요구된다. 여전히 운동이 지속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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