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에서 깨어나 마주친 이 세상은 아주 낯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왜, 어린 시절엔 낮잠에서 깨어나면 그렇게 서러웠을까. 나는 지금도 나의 아이가 낮잠에서 깨어나 서럽게 울 때면 가슴이 철렁해진다. 말이 되든 그렇지 않든, 별로 세심한 어미도 아닌 내가 아이를 그처럼 잘 이해할 수 있는 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푸르스름한 저녁 빛이 이 세상에 내려앉을 때, 화단에 심어진 파초나 담장 따라 올라간 연분홍빛 월계꽃 이파리조차 푸른 필터를 끼운 것처럼 보이는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말이다. 누구도, 사랑하는 누구와 함께 있어도 모두 고아 같은 그 어스름의 시간.
어쨌든 잠이 들면서 언니가 세탁소를 차려 떠난다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은 뒤끝이라 그랬는지, 눈을 떠서 언니가 보이지 않자, 그래서 그때도 나는 울었고, 내 귀로 들리는 나의 울음소리가 하도 처량해서 더욱 악을 쓰며 울었다. 봉순이 언니는 내가 울기 시작하자 미자 언니네 방 안으로 얼른 달려왔고, 잠이 깨서 우는 나를 귀여워죽겠다는 듯이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면 푸르스름한 세상이 조금씩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고 얼마간은 서러움이 가셨다. 아직도 봉순이 언니는 내가 서러울 때,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가 혼자 외로울 때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내 첫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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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아버지가 놀러 가자는 말을 꺼냈을 때 봉순이 언니는 새 옷을 갈아입으며 들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말했다.
“너까지 가면 집 볼 사람이 없잖니?”
언니는 순간 얼굴이 팍, 하고 굳어지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오던 날 언니 몫의 선물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짓던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아주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저도 가면 안 될까유? 옆집 할머니가 집 봐준다고 했는데…… 다음엔 안 따라갈게유…… 그냥 이번 한번…….”
하지만 엄마는 대답했다.
“짱이 새로 산 원피스 입혀라.”
봉순이 언니는 혼자서 방구석의 장판이 벗겨진 곳에 한참 시선을 주고 있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들이옷을 벗었다.
어머니는 정말 집을 봐줄 사람이 없어서 언니를 데리고 가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전에,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도 나들이를 갈 때면 이웃집 할머니께 저녁상을 차려드리고 봉순이 언니까지 모두 외출을 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이웃집 할머니는 우리가 새로 산 텔레비전만 틀어드리면 밤이라도 샐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봉순이 언니 대신 아버지와 첫 외출을 하는 날 언니는, 어머니 말대로 느려터지고 손재주도 없지만 억척스레 일도 잘하고 그저 심성 하나 고운, 순한 봉순이 언니는 대문 앞에서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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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예유. 지는 아니라니깐유.”
“그래, 그럼 증명을 해봐. 니가 아니라는 걸 증명을 해보란 말야.”
“아니믄 아니지 그걸 어띃게 증명을 해유. 긴 걸 증명하라믄 모를까.”
“그래, 니가 정 아니라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해보고 끝내자. 거기 옷 벗어봐라.”
봉순이 언니의 어눌한 말투를 낚아채듯 덮치는 업이 엄마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지나치게 또박거려서 금방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또박거리는 목소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벗으라고.
“괜찮아, 벗어. 다 니가 무고한 걸 밝혀주려고 그러는 건데 왜 안 벗니? 벗으라니까.”
“아줌니 왜 그래유, 지는 아니여유, 아니라니깐드루 자꾸 그러셔요, 그러시길, 시방.”
“너 자꾸 이러면 경찰에 넘긴다. 시집두 안 가구 콩밥 먹어야 말 들을래?”
“글쎄 난 몰라유. 다이언지 타이언지가 어띃게 생겨먹었는지 알아야 말을 하쥬.”
“그러니깐 벗어봐, 벗어보면 될 거 아니냐? 응?”
“왜 이러시는 거예유, 증말…… 아줌니, 지가 뭘 어떻게 했다구.”
드디어 봉순이 언니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고 어머니와 업이 엄마의 한숨 소리, 한동안 안방은 죽은 듯 정적이었다. 다만, 작년 가을 단풍잎을 넣어 바른 안방의 흰 창호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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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것 때문이었을까, 봉순이 언니가 그날 그대로 일어서서 나를 데리고 그대로 집으로 와버렸다면 그녀의 일생은 바뀌었을까. 처음에 이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언니의 삶은 아주 달라졌을 거라고, 아무리 어린아이고 아무 악의도 없었지만 내가 결국 봉순이 언니의 불행에 개입한 것은 아닐까, 얼마간 자책감이 들기도 했고, 이토록 사소한 일이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구나. 결국 산다는 일에는 사소한 게 없는 거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생각을 바꾸었던 것 같다. 그래,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봉순이 언니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매 순간 마주치게 되는 사소한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중요하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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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한 번 남자와 도망갈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낙관적이어야 했을지를. 그녀는 친구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달라. 뭔가 운명을 느꼈다니까. 가엾어서, 그러고 있는 게 가엾어서 내가 도와주고 싶었어. 밥도 따끈하게 퍼주고 셔츠 깃도 깨끗하게 빨아주고 저녁에 돌아오면 대야에 물 데워서 따끈한 물에 발도 닦아주고 싶어. 게다가 엄마 손 한번 못 느껴본 그 가엾은 아이들이라니…….
나는 안다. 그랬을 것이다. 낮잠에서 깨어나 누구나 고아처럼 느껴지는 그 푸르스름한 순간에 그녀는 우는 아이를 안아주었으리라. 아이의 눈에 세상이 다시 노르스름하고 따뜻하게 느껴질 때까지. 누군가 왕사탕을 내밀면 그것을 반으로 잘라 다시 입에 넣어주며 웃었으리라. 나누어 먹어야 맛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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