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끝에서 고양이 문명이 시작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전염병과 테러, 전쟁으로 인류 문명이 한계에 다다른 세계, 고양이들은 쥐 떼의 공격을 물리치고 새로운 고양이 문명을 세우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다양한 동물 종, 생명이 공존하고 연대하는 세상을 꿈꾸는 그들, 그들의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소설MD 박형욱
「전 세계적인 고장이야. 인터넷이 먹통이 됐어!」 벌써 집사는 어디론가 가버려 보이지 않는다. 우왕좌왕하는 인간들이 내 앞을 뛰어 지나가고 있다. 오르세 대학 연구진 전체가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잠시 사라졌던 샴고양이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온다. 「〈신은 과학보다 위대하다〉라는 이름의 광신주의자 집단이 퍼뜨린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인류가 약해진 틈을 타 극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관철하려 하고 있어.」 --- p.30
「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 저는 여러분께 지금 계신 곳이 어디인지부터 상기해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는 도축장입니다. 우리 돼지들은 천장에 보이는 저 갈고리들에 뒷발이 걸린 채 거꾸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이 괴로운 자세로 매달려 있다 보면 인간들이 들어와 우리의 멱을 따서 양동이에 피를 받아 갔죠. 순대를 만들려고 말이에요.」 검사가 사진 여러 장과 함께 비닐에 싸인 순대 한 봉지를 증거물로 제출한다. (……) 「제가 알게 된 사실들에 근거해 말씀드리면, 모든 인간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벌로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배심원들께서도 저들에게 사형을 선고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재판을 방청 중인 돼지들이 일제히 동조를 보낸다. 몇몇은 발뼉을 치기도 한다. 꿀꿀거리는 응원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운다. --- pp.66~71
계속 냄새를 쫓아가던 우리 앞에 투명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그 건축물을 마주하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친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피라미드 뒤로 웅장한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엘리제궁과 베르사유궁처럼 여기도 한때 인간 우두머리들이 살았던 곳이야. 루브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어. 아주 큰 박물관이지.」 나탈리가 상기된 얼굴로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박물관?」 「일종의 예술의 신전이야.」 흠, 모든 게 예술과 유머와 사랑이라는 세 개의 수수께끼로 귀결되는군. 내가 이 세 개의 수수께끼를 풀어 진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나를 위한 우주의 은밀한 계획임이 틀림없어. --- p.147
〈이왕 물방울일 바에는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이 되렴.〉 드디어 우리 엄마의 말을 가슴에 새길 중요한 순간이 왔어. --- p.194
「어쨌든 폐허로 변한 오르세 대학에서 우연히 컴퓨터 한 대를 찾았소. 인터넷은 끊겼지만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 있었지. 로망 웰즈가 쓴 일기 파일이.」 내가 살짝 당황하는 걸 상대가 눈치채고 흡족해하는 게 감지된다. 「1제타옥텟짜리 USB 메모리에 저장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되찾으러 고양이 한 마리와 급히 떠난다고 로망 웰즈가 일기 마지막에 적어 놓았더군.」
『문명』은 독립적으로 읽어도 지장이 없는 작품이지만 본래 『고양이』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고양이』와 『문명』을 아우르는 이 이야기는 총 3부작으로 예정되어 있다. 베르베르는 개미나 고양이 같은 동물, 신이나 천사 같은 초월적 존재를 내세워 새로운 시각으로 인간 세상을 그려 왔다. 인간은 조연에 불과하고 주연은 모두 동물이 차지한 이 3부작에서 작가는 〈이 세상은 인간의 것만이 아니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우선 고양이 피타고라스, 쥐 티무르 등 이 작품의 주요 등장동물 다수가 케이지에 갇혀 있던 실험동물이다. 또 돼지들이 벌이는 〈인간 재판〉에서는 인간의 미식이나 여흥을 위해 고통받는 동물들이 차례로 증언대에 선다. 작가는 동물들의 입을 통해 단순히 동물권 보호의 차원을 넘어 인간 중심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전달하고 있다.
책 속에 수록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도 주목!
베르베르의 팬이라면 이번 작품의 등장인물 중 로망 웰즈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만든 에드몽 웰즈의 후손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지식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과학자다. 웰즈라는 성을 가진 인물들은 『개미』의 에드몽 웰즈에서부터 시작해 『죽음』의 가브리엘 웰즈 등 다양한 작품 속에 등장해 왔다. 로망 웰즈는 작중에서 기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데이터를 추가해 〈확장판〉을 만든 것으로 나온다. 베르베르 작품 세계와 수십 년 동안 함께 해온 웰즈 가문의 활약과, 백과사전의 〈확장판〉에 주목하며 소설을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고양이들에 관한 이야기지만 실은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인 이 한 편의 우화는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가가 울리는 경종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유머와 풍자가 가득한 동시에 인류의 한계를 날카롭게 포착한 소설. 『비블리오테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평등, 생물 다양성, 멸종 위기뿐 아니라 지식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주제로 한 소설. 『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