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는 기생이, 여성이 가녀리고 여리다는 고정관념을 깬다. 황진이는 이처럼 시대’에도 ‘사람’에도 ‘시선’에도 결코 구속받지 않았던, 당당하고 자유로운 여성 문인이자 예인이었다.
--- p.31
연암이 생각하는 난설헌의 글이란 ‘어쩌다 잘못 새어 나간’ 생각의 흔적이며, 드러내 봐야 결국 규중 여성을 여도사로 오인하게 할 증빙일 뿐이다.
--- p.41
조선시대 남녀 공간이나 문자의 구분은 젠더 분할을 보여 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사회의 공식 문자였던 한자는 지배 남성을 위한 것이었다. 상하층을 막론하고 여성에게 한자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런데 장계향은 도학(道學)의 대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여공(女工, 부녀자들이 하는 일)보다는 학문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이다.
--- p.61
시가의 담장 안에서 들끓었던 호연재의 열기는 그 안의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졌다. 호연재의 규방을 대대로 이어받은 여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p.81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도 180권이나 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주 이씨가 임윤지당이나 강정일당이 지녔던 것과 같은 강렬한 자의식을 지닌 여사(女士)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웬만한 여성이 아니고서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던 시기에 《완월회맹연》이라는 대장편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p.108
이처럼 시삼촌들과 겪는 갈등의 핵심 사안은 양자 입양 문제인데, 이씨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갔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양자의 문제에 국한되나 본질적으로는 종가 문제 전반에 대한 권력 투쟁의 양상이라 하겠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결정의 정당함과 이에 대한 시삼촌들의 부당한 대응을 시어머니에게 호소하고 있다.
--- p.122
금원은 남자들은 사방에서 노니는 것을 좋게 여기는 것과 달리 여자들은 규문 밖을 나갈 수 없게 함으로써 총명과 식견을 넓히지 못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이 슬프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여자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다.
--- p.134
가문과 관련된 당대의 시대, 사회적 요구가 송설당 입장에서는 불합리가 아닌 불가항력적 조건이 된다. 여자로 태어났기에 겪어야 할 불필요한 시선과 장애에 결국 송설당은 남자 혹은 대장부로서의 면모를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 p.156
강경애는 인간의 결핍이나 생래적 취약성으로 인해 “서로에게 내던져진” 현실 속에서 우발적이고 다양한 유대 관계를 그려 냄으로써 무산계급 여성만 현실 속에서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무산계급이자 정상성 ‘밖’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외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불가능한 삶을 살아 내야 하는 인간 문제의 모순을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 pp.192-193
‘도전적인 여성 시인’이라는 찬사에서부터 ‘정치 시인’이라는 힐난에 찬 명명에 이르기까지 모윤숙에게 덧붙여진 수사 너머에 자리한 시인의 욕망을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식민지 시대, 독립,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굴절되어 온 모윤숙 시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 p.200
송계월은 당대의 여성 문제를 개인의 성격, 즉 개인적 ‘하자’라기보다 사회 구조의 문제와 결부하여 제시한다. 가난한 여성이 아이를 업둥이 시키는 것에 대한 세간의 비난에 대해 “가난한 어머니가 자식을 왜 부잣집 대문간에서 몇 시간을 떨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될 원인의 그 끝은 사회 제도의 불합리로 생긴 죄”라고 지적하고,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은 봉건적 관습으로 인한 폐해라고 선언한다.
--- p.238
노천명이 활동하던 1930년대 후반 문단은 언어와 감정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현대시학이 주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글쓰기는 긍정적인 평가이든, 부정적인 평가이든 ‘센티멘털리즘’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여성 시인들의 작품이 현대시학의 관점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음을 뜻한다.
--- p.252
김끝녀는 ‘좌중의 할아버지들을 조카 다루듯’ 하며 이야기판을 주도했는데, 이는 이야기판 구성원들 사이에서 ‘항렬이 높아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 마디마디마다 ‘좌중의 관심을 사로잡으며’ ‘할아버지들의 공감을 크게 얻을’ 정도로 유능한 이야기꾼이었기 때문이다.
--- p.273
임옥인의 작품에서도 ‘여성’이라는 단어를 돋을새김할 필요가 있다. 임옥인 작품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여성이며, 스스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구경꾼으로서의 일생”에 해당하는 ‘구경꾼으로서의 여성’을 탈피한다.
--- p.307
박경리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이 발견된다. 이 여성들은 이혼 혹은 전쟁 등의 이유로 혼자가 되어 생계를 책임지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성격을 보면 자존심이 세고 다소 고집스럽거나 결벽증이 있어 보인다. 세상과 현실에 타협할 줄 모르는 여성들인 탓이다. 가족을 위해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하지만 자신이 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그럴수록 더더욱 자존심을 지키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이 여성은 박경리 자신이기도 하다.
--- p.316
“평단에서의 한말숙에 대한 배려는 대단히 인색”하며 “인색한 정도가 아니라 무례할 정도”라는 언급과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름이 오르지 않은 문학사는 없으되 정작 관심을 갖는 논자들이 드물다는 것, 이 모순적인 현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 p.330
최희숙이 천박한 ‘아프레 걸’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배제당한 통속 작가로 기억되고 있으나 사실 그녀는 당대 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자 했던 소설가였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 p.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