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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콘크리트의 섬

[ 양장 ] JGB 걸작선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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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7월 14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30g | 125*196*16mm
ISBN13 9791190885867
ISBN10 1190885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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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신화 속 이야기처럼 꾸며 내고 있었다. 높다란 울타리에 둘러싸인 길쭉한 교외 정원에서 끝없이 혼자 놀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면 묘하게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 책상 서랍의 액자 속 일곱 살 소년의 정체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사실은, 단지 허영심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는 실패라고밖에 할 수 없는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도, 바로 그 상상 속의 텅 빈 정원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성공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35, 「3 부상과 탈진」 중에서

문 닫은 매표소를 바라보던 메이틀랜드는 어릴 적 동네 영화관에 갔을 때의 흐릿한 기억을, 끝없이 이어지는 흡혈귀와 공포 영화들의 목록을 떠올렸다. 이 섬은 갈수록 그의 머릿속을 완벽하게 구현한 모형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모두가 잊은 이 풍경을 헤치고 나가는 일은, 단순히 이 섬의 과거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탐사하는 여행이기도 한 것이었다. 캐서린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게 만든 유아적인 분노에서는 어릴 적에 옆방에서 여동생을 돌보던 어머니를 지치지도 않고 소리쳐 불렀던 때가 떠올랐다. 그가 항상 생각하기를 기피해 온 아직도 모를 이유 때문에, 어머니는 결국 그를 달래러 오지 않았다. 그저 분노와 경악에 목이 잔뜩 쉰 채로 홀로 욕실에서 기어 나오도록 방치했을 뿐이었다.
--- p.88, 「9 고열」 중에서

이렇게 비틀거리는 동안, 메이틀랜드는 육신에 대한, 그리고 염증에 부어오른 다리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흐릿해져 감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우선 부상당한 고관절을, 다음에는 양다리를, 이어 다친 가슴과 횡격막에 대한 모든 지각을 지워 냈다. 차가운 바람에서 힘을 얻어 풀숲을 뚫고 전진하며, 지난 며칠 동안 너무도 익숙해진 섬의 모습을 차분하게 살폈다. 섬을 그 자신이라 여기게 된 그는 폐차 무더기 쪽의 자신의 자동차를, 철조망 울타리를, 그리고 뒤편에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고통과 시련을 겪은 장소들과 자신의 육신의 각 부분이 혼동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장소를 향해 손짓하며 섬의 회로를 그리고, 자신의 육체의 각 부분을 원래 속했어야 하는 곳에 놓아둘 방법을 궁리했다. 오른 다리는 사고가 일어난 지점에 놔두고, 다친 손은 강철 철조망에 꽂아 두어야 한다. 가슴은 콘크리트 벽에 기대앉았던 곳에 둘 것이다. 각 지점마다 간소한 의식을 치러 모든 책무를 자신에게서 이 섬으로 이양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성체성사에 봉헌하는 성직자처럼 큰 소리로 선언했다.
“나는 섬이로다.”
--- pp.89~90, 「9 고열」 중에서

[…] 이제 이 세모꼴 황무지에 붙들린 지도 나흘 가까이 지났다. 자신이 아내와 아들을, 헬렌 페어팩스와 사무실의 동업자들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정신 뒤편의 흐릿한 부분으로 물러섰고, 그들이 있던 자리를 식량, 거처, 다친 다리,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땅뙈기를 정복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이 차지해 버렸다. 생각의 지평선이 3미터를 살짝 넘는 정도까지 졸아들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 한 시간 안에 탈출할 수 있음이 분명한데도―내키지 않아도 결국 그 젊은 여자와 프록터는 경사면을 오르도록 도와줄 테니까―이런 갈망이 아직도 수년 동안 계속해 온 임무처럼 그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 pp.116~117, 「12 곡예사」 중에서

[…] 물론 일종의 자기모순적인 논리에 따라, 두 사람 모두 학대받는 일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메이틀랜드의 공격적인 태도는 그들의 기대를, 그들이 반쯤 무의식적으로 자기들에 대해 내리고 있는 평가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사소한 잔혹 행위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불신하면서도, 메이틀랜드는 계속 스스로를 부추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존하겠다고 결심한 이상은,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던 이런 잔혹한 성정조차도 며칠 전에 자기 연민이나 멸시를 이용했던 것처럼 남김없이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나이 든 부랑자와 이 젊은 도망자 여인을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 pp.179~180, 「18 5파운드」 중에서

“클럽에서 일해. 뭐랄까, 클럽이라 부를 수도 있는 곳에서. 때론 고속도로로 나가서 손님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래서 그게 뭐? 지저분하다는 거겠지?”
“조금은. 인생을 바로잡고 새로운 사람하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뭐지?”
“아, 제발…… 그러는 당신은 왜 인생을 바로잡지 않는 건데? 망가진 부분이 나보다 훨씬 많으면서. 당신 아내에, 그 여의사에…… 여기 불시착하기 한참 전부터 무인도에 살고 있었던 주제에.”
--- pp.181~182, 「18 5파운드」 중에서

[…] 그는 이 젊은 여인의 가식의 법칙을, 그 법칙이 암시하는 자유, 즉 서로에게 속해야 한다는 모든 느낌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캐서린과, 자신의 어머니와, 심지어 헬렌 페어팩스와의 관계에도 존재하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어 온 천 가지 감정의 거래도, 모종의 중립적인 화폐로, 이를테면 관계의 가치에 상응하는 정확한 액수의 현금으로 지불할 수 있었다면 훨씬 견딜 만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앞의 여자를 이 섬을 탈출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어린 시절로부터, 아내와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모든 애정과 요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란 텅 빈 도시를 영원히 헤매고 다니기 위해서.
--- pp.183~184, 「18 5파운드」 중에서

프록터는 고대하는 눈으로 메이틀랜드가 트렁크를 열기를 기다렸다. 그에게 이 트렁크는 상상도 못 한 포상금으로 가득한 보고寶庫였다. 묵직한 고무 덧신, 파리에서 쓰던 물건을 잃어버린 후 새로 구입한 모조 비취 커프스단추, 낡은 《라이프》 잡지 한 권―프록터는 이런 온갖 물건을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했다. 메이틀랜드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프록터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그에 대해 가지는 권력은 저녁의 포도주와 더불어 계속 뭔가를 주는 행위에 달려 있으리라 확신했다. 결국 언젠가는 선물을 배제하고 주는 행위만 남을지도 모른다. 몸짓과 태도만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화폐가 탄생하는 셈이다.
--- p.192, 「19 짐승과 기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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