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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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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02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00쪽 | 228g | 130*195*15mm
ISBN13 9788932902777
ISBN10 893290277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질문이 무엇이었더라? 아 그렇지. 어떤 책이 내게 감명을 주고, 인상에 남아 마음 깊이 아로새겨지고, 송두리째 뒤흔들어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거나>,<지금까지의 생활을 뒤바꾸어 놓았는가>하는 것이었지.

그런데 이 말은 충격적인 체험이나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경험처럼 들린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이런 체험을 기껏해야 악몽에서나 떠올리지, 의식이 깨어 있을 때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물며 글로 남기거나 만인 앞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순간적으로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오스트리아의 한 심리학자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논문에서 이미 그것에 관해 주의를 상기시켰었다.(...)
--- p. 83
젊은이는 침묵을 지키고 않아 있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엄지 손가락에서 집게와 가운뎃손가락 끝으로 굴러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을 빨아들여 체스판 위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손이 연기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 한 순간 흑의 킹 위에서 맴돌더니 그것을 쓰러뜨렸다. 자신이 졌다는 표시로 킹을 쓰러뜨리는 것은 아주 무례하고 상스러운 해동이었다.

뒤늦게 체스 게임을 전부 뒤엎는 거나 마찬기지였다. 그리고 쓰러진 킹은 체스판에 부딪히면서 흉물스런 소리를 냈다. 모든 체스꾼들의 폐부를 찌르는 소리였다. 경멸하듯이 킹을 손가락으로 쳐서 쓰러트린 후 젊은 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상대방이나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인사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 pp.40-41 승부중에서
젊은 여인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소묘를 들여다보고 낡은 화첩을 뒤적거렸다.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아직 작업 중인 것들까지 전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물감통 뚜껑을 닫고 붓을 씻은 다음 산책하러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초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비평을 외우고나 있는 듯이 그녀의 그림들이 첫눈에 일깨우는 호감과 많은 재능에 관해 연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기울여 들으면 뒤편에서 나지막이 주고받는 소리와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젊은 여인은 들을 수 있었다.
--- p.12
이것은 궁지에 몰려 만들어 낸 나태하고 무가치한 위안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것에서 벗어나려 애써 본다. 너는 이 무서운 건망증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나는 생각한다. 있는 힘을 다해 레테의 물살을 버티어 내야 한다.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 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아야 한다---한마디로 말해 너는---여기에서 순간 저자와 표제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마지막 행은 불변의 도덕적인 명령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이 기억에 깊이 아로새겨져있는 유명한 시를 인용한다.
--- p.93
왜냐하면 벌써 흑을 쥔 손이 잽싸게 매처럼 날아가 퀸을 들고 뒤로... 아니다! 우리라면 분명 소심하게 뒤로 후퇴시켰을 말을 오른편으로 한 칸 더 전진시킨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감탄한 나머지 사람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수가 무슨 도움이 되는지 사실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퀸은 싸움터 한쪽에서 위협하는 것도 엄호하는 것도 없이, 전혀 의미 없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서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적들이 늘어서 있는 한가운데서 고독하고 도도하게 서 있었던 퀸은 일찍이 없었다. 장 역시 자신의 무서운 적수가 이 수로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어떤 함정으로 자신을 유혹하려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오래 심사숙고한 끝에 조금은 석연찮은 마음으로, 그는 거듭 무방비 상태에 있는 폰을 치기로 결심했다.
--- p.31
앞에서 말한 평론가는 젊은 여인이 그렇게 끔직하게 삶을 마감한 것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기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향을 읽울 수 있지 않은가?숙명적인,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 p.17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나빴다. 그는 상대방이 그렇게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다는 생각을 하려 들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승부가 거의 결판났을 때까지도, 자신이 그 미지의 남자와 결코 동등하지 않다고 믿으려 들었었다. 그 남자의 자신감, 천재성, 그리고 젊음에서 오는 후광을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정도 이상으로 신중을 기해 체스를 두었다. 그뿐이 아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낯선 이에게 감탄했으며, 심지어는 그가 승리해서 가능한 한 인상적이고 천재적인 방법으로 몇 년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려 온 참패를 마침내 자신, 쟝에게 안겨 주기를 바랐었다고 고백해야 했다. 그러면 마친내 그는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물리쳐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났을 것이며, 마침내 구경하고 있던 악의에 찬 군상들, 이 시기심 넘치는 패거리들에게 만족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평온을 찾았을 것이다. 마침내...
--- p.41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 p.17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 p. 17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를 뜬 8월의 어느 날 초저녁, 룩상부르 공원의 서북쪽 구석에 위치한 정자에서 두 남자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열 명은 족히 넘는 구경꾼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관심 있게 체스 게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 술 한잔 마실 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승부가 결판나기 전에는 이 구경거리를 포기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도전자, 창백한 얼굴에 권태롭다는 듯이 냉담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의 젊은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하지 않았다.
--- p.23
그래서 그들은 식사나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매번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은 전혀 그리지 않고 방안에 앉아 우두커니 앞을 응시하거나 점토를 주물럭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자신에게 너무 절망하여 초대를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녀를 마음에 들어한 어떤 젊은이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자신도 그가 마음에 들었으니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깊이가 없으니 각오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젊은 남자는 단념했다.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 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나기까지 했다.
그녀는 3만 마르크를 상속받았었는데, 그것으로 3년을 살았다. 이 시기에 한 번 나폴리로 여행을 갔었다. 어떤 상황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거리는 소리만을 드렀을 뿐이었다.
--- p.14-15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 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 p.17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화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못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 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p. 85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화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못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 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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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쥐스킨트가 발표한 단편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과 에세이 한 편을 한데 묶었다. 짧은 이야기 뒤로 남겨진 긴 여백 속에서 작가의 세상을 보는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집에서 첫번째로 수록된 '깊이에의 강요'는 한 젊은 여류 화가를 소재로 쥐스킨트가 즐겨 다루는 예술가의 문제를 묘사하고 있다.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어느 평론가의 무심한 말을 듣고 고뇌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선택하는 예술가와, 그녀의 죽음 후 관점을 바꾸어 그녀의 그림에는 삶을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그 평론가를 대비시켜 인생의 아이러니를 예리하게 표현했다.

'승부'는 두 명의 체스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회의 규칙을 곧이곧대로 준수하여 어느 정도의 자리는 확보했지만, 현재 상태를 고수하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는 늙은 체스의 고수 쟝과 인습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서 정열적으로 용기있게 돌진하는 젊은 도전자, 그리고 쟝처럼 이룩한 것도 없고 도전자처럼 과감하게 뛰어들 배짱도 없지만 도전자와 같은 욕망을 꿈꾸는 구경꾼들의 모습에서 평범한 소시민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죽음을 앞둔 성공한 보석 세공업자인 뮈사르가 자신의 일대기와 세상 인식을 유언의 형식을 빌어 함축적으로 토로한 작품이다. 보석 세공업자인 뮈사르는 어느 날 자신의 정원에서 돌조개를 발견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세계와 인간이 점점 돌조개로 변하여 석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 세상은 살아 숨쉬고 있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내지 않고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조개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고찰'에서는 문학과 우리 삶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자가 자신의 독서 체험 한 단면을 통해, 독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서서히 우리 내면 속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체험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삶의 작은 이야기들에 따스한 눈길을 돌리고,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전반적으로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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