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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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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84쪽 | 540g | 132*225*22mm
ISBN13 9788937463785
ISBN10 893746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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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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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류의 타락을 막으려 하셨다면 벌써 막지 않았을까? 늑대는 열등한 늑대를 스스로 도태시키네. 다른 동물은 또 어떤가? 한데 인류는 예전보다 더욱더 탐욕스럽지 않은가? 본디 세상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시들어 죽게 마련이야. 하지만 인간은 쇠락이라는 것을 모르지. 인간은 한밤중에도 정오의 한낮이라는 깃발을 올리네. 인간의 영혼은 성취의 정점에서 고갈되지. 인간의 정오가 일단 어두워지면 이제 낮은 어둠으로 바뀌네. 인간이 게임을 좋아한다고? 그래, 맘껏 도박하게 해. 여기를 보라고. 야만인 부족이 폐허를 보고 경탄하는 일이 미래에는 또 없을 것 같나? 전혀, 있고말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후손들이 그런 일을 겪겠지.
--- p.212

머리 가죽을 돌바닥에 늘어놓는 동안 구경꾼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군중을 밀어내고, 젊은 아가씨들은 커다란 검은 눈으로 미국인을 응시하고, 남자아이들은 소름 끼치는 전리품을 만져 보고 싶어 열심히 기어들었다. 모두 128개의 머리 가죽과 여덟 개의 머리가 있었다. 주지사의 부관과 수행원들이 마당으로 나와 그들을 환영하고 전리품에 감탄했다. 그날 저녁 리들앤스티븐스 호텔에서 열릴 축하연에서 수고비를 전부 황금으로 지불하겠다는 약속에 용병들은 환호성을 내지르고는 다시 말에 올랐다. 검은 스카프를 두른 할머니들이 달려와 그들의 악취 나는 셔츠 자락에 키스를 하고는, 볕에 탄 자그마한 손을 올려 그들을 축복했다. 용병들은 수척한 말 머리를 돌려 열광하는 군중 틈을 비집고 거리로 나왔다.
--- p.239

판사는 숙영지 주변의 검은 숲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수집한 표본을 향해 고갯짓했다. 이 이름 없는 것들은 이 세상에 하등 무용한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아주 작은 부스러기 하나가 우리를 삼켜 버릴 수도 있다네. 인간이 알지 못한 채 이 바위 아래 숨어 있는 아주 작은 존재가 말이야. 오직 자연만이 인간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만큼, 그 마지막 존재를 인간이 오롯이 드러낸다면 인간은 이 지구의 종주가 되는 거네.
종주가 뭔데요?
주인 말일세. 혹은 군주라고도 하지.
그러면 처음부터 쉽게 주인이라고 말을 하지.
그냥 주인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주인이거든. 종주는 심지어 다른 제후도 다스리지. 종주의 권위는 지방 법원의 판결도 취소시킬 수 있어.
토드빈은 침을 뱉었다.
판사가 두 손을 땅에 뻗었다. 그리고 질문한 자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나의 땅이네. 하지만 이 땅 위에는 어디에나 자치적으로 살아가는 생명이 있지. 자치적으로 말이야. 이 땅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나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해.
토드빈은 발을 엇갈려 앉아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가 말했다.
판사가 거대한 머리를 갸웃했다. 세상의 비밀을 영원히 풀 수 없다고 믿는 자는 두려움과 신비 속에서 살아가지. 결국 미신에 질질 끌려 다녀. 인생에 대한 통제력은 빗방울에 모두 침식당하고서 말이야. 하지만 태피스트리에서 이치(理致)의 실을 뽑아내기로 결심한 사람은 그 결심만으로도 세상을 다스리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운명조차 바꾸어 놓는다네.
그게 새를 잡는 거랑 대관절 무슨 상관이죠?
새의 자유는 곧 나의 모독이지. 새는 모조리 동물원에 가둬 놓아야 해.
--- p.280~281

이곳 지구에는 온갖 기묘한 것이 있지. 태어나 평생을 살아도 지구 전부를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수많은 기묘함을 목격하네. 약장수의 모자 마술이나 열기 어린 꿈이나 전무후무한 환상으로 넘쳐나는 황홀이나 유랑하는 카니발이나 수많은 흙바닥에 수많은 천막을 세워야 할 절대적 운명의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겪는 순회 서커스단이나 다 마찬가지야.
--- p.344

너는 암살자도 게릴라도 아니야. 판사가 외쳤다. 네 마음 한구석에는 흠집이 나 있어.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너만이 내 뜻을 거역했지. 너만이 네 영혼 한켠에 천국에나 어울릴 만한 온화함을 갖고 있었어.
--- p.416

미친 것은 바로 당신이오. 소년이 말했다.
판사가 빙그레 웃었다. 아니, 나야 늘 제정신이지. 그나저나 왜 어둠 속에 숨어 있나? 밖으로 나와 우리 둘이서 진지하게 얘기해 보세. (......) 사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은 빵의 공유가 아니라 적의 공유야. 하지만 내가 자네 적이라면 누가 자네 편에 설 것 같은가? 누가? 신부가? 그는 지금 어디 있지? 날 보라고. 우리의 증오는 우리 둘이 만나기 전부터도 이미 존재하고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아직은 바꿀 기회가 자네한테 있네.
--- p.425~426

새하얀 텅 빈 방에서 그는 맞춤 양복을 입고 손에 모자를 들고 눈썹 없는 자그마한 돼지 눈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지상에서 겨우 16년을 산 소년은 인간의 법에 대고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결정을 그의 눈에서 읽었고, 다른 곳에는 결코 새겨질 수 없는 자신의 이름이 이미 그 두 눈에 새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소년은 옛 지도나 노인네의 말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지역의 여행자가 된 것이다.
--- p.430

이는 모두 무엇인가를 위한 오케스트라라네. 바로 춤을 위한 것이지. 참가자들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역할을 통지받지. 지금으로서는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중요한 것은 춤이고, 순서와 역사와 끝이 춤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면 춤을 추는 사람이 그것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전혀 없지. 어떤 역사든 그것은 각 개인의 역사도, 각 개인의 역사의 합도 아니라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거늘 자신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를 어찌 알겠나. 오히려 자신은 여기 없을 수도 있었다고 믿고 있지.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이 있기에 그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네.--- p.455

이것 하나는 알지. 전쟁이 불명예가 되고 전쟁의 고귀함이 의문시된다면 피의 신성함을 아는 명예로운 이들은 무도회에서 쫓겨날 거네. 춤이야말로 전사의 권리이기에 결국 무도회는 가짜 무도회가 되고, 춤을 추는 이도 가짜가 되는 거지. 하지만 언제나 진정한 춤을 추는 이가 한 명 정도는 있다네. 누군지 아나?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 말은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욱 진실하다네. 하지만 이 말을 해주고 싶군.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머저리 짐승도 춤을 출 수 있소.
판사가 술병을 바에 내려놓았다. 내 말 새겨듣게. 무대에는 오직 짐승 하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네. 공간에 오르지 못한 나머지는 그 하룻밤 동안 이름은 없되 목숨을 이어갈 운명이지.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내려가지. 춤추는 곰이 있고 춤추지 않는 곰이 있어.
--- p.458~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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