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하면 골수를 자극해 적혈구를 더 많이 만들게 하는 호르몬, 적혈구생성소(erythropoietin: EPO) 악용을 흔히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암스트롱 하면 어김없이 그의 피로 가득 찬 냉장고가 떠오른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피를 빼내 자가수혈용으로 저장했다. 신선한 피를 일정량 수혈하면 적혈구가 더 많아지고, 따라서 근육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므로, 여기에 힘입어 사이클 선수가 산을 더 세차게 오르고 육상 선수가 운동장을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세계반도핑기구(World Anti-Doping Agency)는 피를 금지 약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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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머나먼 옛날부터 거머리와 공존했다. 이미 수천 년 전에 거머리를 이용해 병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먼 옛날 사람들은 병이 나는 이유가 다른 무엇보다도 피가 너무 많아서라고 생각했다. 정맥 절개용 칼, 사혈침과 더불어, 거머리는 피 뽑기용 필수 의료 도구였다. 바빌론 사람들은 줄무늬가 있는 어떤 벌레가 피를 빨면 “두툼해진다”는 기록을 남겼고, 또 거머리를 치유의 여신 굴라(Gula)의 딸로 묘사했다. 힌두교에서 치유, 의술, 아유르베다의 신으로 모시는 단반타리는 대개 네 팔 중 하나에 거머리 단지를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3,300~3,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 왕실 서기 우세르하트의 무덤 속 벽화에는 거머리를 이용해 치료하는 한 인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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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혈액 수송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는 레이디 던스턴(Lady Dunstan)이라는 여성도 있었다. “적어도 70은 되었을 그녀는 언제나 메리 왕비처럼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작은 모자를 썼지만, 겁먹은 모습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디 던스턴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길. 당시 상황은 대부분 힘겨웠고 끔찍할 때도 많았다. 의학연구위원회에 따르면 “정전 상황에서 길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아는 것도 필수였지만, 실제로 공습이 일어날 때 기꺼이 차를 몰 굳센 의지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운전사들이 어찌나 능숙하게 차를 몰았던지, 가끔은 수혈받을 부상자보다 먼저 병원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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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자. 이 말은 젊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받았을 때 소셜 미디어에 ‘축복받았다’고 글을 올리면서 생겨났다. 뜻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매춘 여성이 매춘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단체의 활동가가 보기에 축복은 곧 매춘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나이 든 남성에게 섹스를 제공한 대가로 받는 보상이었다. 공중 보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가가 오가는 성관계’였다. 카옐리차에서 성폭력 상담소 투투젤라를 운영하는 제닌 조사이어스(Genine Josias) 박사가 보기에는 축복은 강간이고, 축복자는 강간범이었다. “그 아이들은 미성년자예요. 성관계에 합의할 나이가 아니라고요. 누가 뭐래도 그건 강간이에요.” 그런데 누가 어떻게 바라보든, 남아공에서 축복은 HIV를 놀랍도록 빠르게 퍼뜨리는 원인이다
--- pp.168-169
혈우병은 끔찍하다.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하면, 혈우병 환자는 대개 뇌나 소화기관에 일어난 출혈로 죽는다. 제아무리 부자라도, 제아무리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혈우병 환자는 모두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를테면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준 사람으로 가장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은 고질병인 근친결혼에 목매던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널리 퍼트렸다. 가장 잘 알려진 혈우병 왕족은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다. 설사 알렉세이가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총살되지 않았더라도, 십중팔구 젊은 나이에 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혈우병은 치료하기 어렵고 돈이 많이 들므로, 지금도 대부분 나라에서 혈우병 환자는 때 이른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 pp.213-214
네팔 서부 마을 자무에 사는 라다는 그러잖아도 불가촉천민인 대장장이 계급에 속한다. 그 와중에 월경까지 하면 라다의 계급은 더 떨어진다. 겨우 16살인데 생리하는 동안에는 집 안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고, 달랑 맨밥만 먹어야 한다. 다른 여성을 만지면 상대방을 더럽힌다고 여겨져, 할머니나 여동생마저 만지면 안 된다. 어른이든 아이든 남성을 만지면, 상대가 으슬으슬 추위를 느끼고 아플 것이다. 버터나 물소 젖을 먹으면 물소가 아파 젖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원에 들어가거나 예배를 올리면 신이 분노하여 뱀이나 다른 재앙으로 앙갚음할 것이다. 그나마 학교에 가는 것은 허락받았다. 대다수 소녀에게는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 p.259
무루가난탐은 생리대를 갈고 몸을 씻을 곳으로 묘지 근처의 공동 우물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피하듯 그 우물을 피했다. 그러니 그곳이라면 생리대를 갈고 피가 밴 옷을 물에 씻어도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무루가난탐이 틀렸다. 그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고, 입길에 올랐다. 이 이상한 남정네가 여자처럼 생리대를 차고 옷에 밴 피를 씻어내네. 도대체 무슨 짓이래? 아이고, 남사스러워라! 웬 망신이야.
이 남자는 혁신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는 마을뿐 아니라, 그가 사는 주, 나라, 그리고 세계가 그 일을 혁신으로 여겼다. 베 짜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무루가난탐은 14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작업장 조수로 일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런 그가 이제 생리남이 되고 있었다.
--- p.307
왕립 런던 병원 주요 외상 센터. 비상 전화가 울린다. 응급 환자가 오고 있다는 뜻이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악마의 전화가 울린다고 말한다. 전화를 받은 간호사가 전화를 끊자마자 알린다. “코드 레드. 오픈 체스트.”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다. 의료진이 같은 말을 외치며 상황을 전달하자, 응급실이 구호 소리로 꽉 찬다. 날마다 밤낮으로 수도 없이 재난과 참사를 마주하는 경험 많은 응급 전문의와 외상 전문의들인데도 지금 놀란 마음으로 서로 응급 상황을 알린다. “성인 외상 환자. 성인 여성. 오픈 체스트. 코드 레드. 8분.”
--- p.365
피는 우리 몸속에서 금처럼, 우주 먼지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몰이꾼이다. 오늘날 우리가 유전자를 편집하고 줄기세포를 키우고 수혈로 삶을 바꾼다지만, 먼 훗날 우리를 되돌아본 사람들은 우리가 이룬 성취가 소의 날숨을 들이마시면 건강해진다는 믿음만큼이나 알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약 400년 전 새뮤얼 피프스가 쓴 대로 “더 건강한 몸에서 빌린 피로 허약한 피를 고치는” 데 성공한 것은 이미 놀라운 성과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갈 것이다. 피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아직 다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앞으로 더 놀라운 일이 펼쳐질 것이다.
--- p.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