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요를 찾는 분들은 우리 집 상에 오른 음식들을 보며 감탄하지만 우리는 그저 때마다 땅과 바다에서 나는 것을 단순하게 조리해 수수한 집밥을 먹을 뿐이다. 우리 집 음식은 대단하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고 그저 자연에 맞춘 것이다. 세월 따라 양념과 조리법이 달라져도, 절기를 맞춰 음식을 챙겨 먹는 본질은 그대로다. 제철에 나는 것은 풍성해 이웃과 지인들이 오가며 함께 먹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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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장어는 흔히 일본어 ‘아나고’로 불리는데, 보통 회로 많이 먹는다. 사실 붕장어를 회로 많이 먹는 것은 붕장어가 수족관에서 오래 살기 때문이다. 회로 먹어도 좋지만 400~500g짜리는 배를 따서 등뼈를 추려내 소금을 뿌리거나 양념장을 발라 굽고, 700~800g짜리 큰 놈은 푹 고아 곰탕처럼 뜨끈하게 한 사발 먹으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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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집 주인은 내가 주는 봉지들을 건네받으며 눈을 흘긴다. 분주하단 뜻이다. 자리를 잡고 말없이 기다리면 장 봐 온 생선으로 회를 쳐 내주고, 매운탕도 끓여 준다. 시장에서 생선을 고르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한 끼를 먹으면 덩달아 힘이 난다. 그래서 나는 시장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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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한테 나물을 사듯 해초는 해녀에게 산다. 기장시장에 가면 돌미역, 톳, 서실 등 해녀들이 잡은 싱싱한 해조류가 나와 있다. 종종 ‘쫄쫄이미역’을 사기 위해 기장시장 가운데에 있는 해녀 자매를 찾곤 한다. 평생 물질을 한 사람의 얼굴과 손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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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가마 시절에는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살았다. 냇가에서 물을 떠와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러 냇가로 내려갔다.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며 잠이 깼고, 바람소리, 빗소리 들으며 물레를 찼다. 전기가 안 들어오니 냉장고도 없었다. 음식을 저장하거나 보관할 길이 없어 그날그날 밭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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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지나가면 싸한 기운이 돌고, 네발 짐승이 나타나면 강아지처럼 다정한 느낌이 든다. 노루나 고라니 같은 초식동물은 사뿐사뿐 걷고, 너구리는 발걸음이 얌전하고, 멧돼지는 후다닥 뛴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는 작업에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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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음식은 오신채 안 쓰고, 멸치 꽁지 하나 안 들어가니 채소 본연의 맛이 도드라진다. 말린 나물은 맛이 농축되어 진하고 식감은 꼬들꼬들하다. 오래된 된장 맛도 절 음식의 특징이다. 지금은 많이 세속화되었지만 본래 절 음식은 단순하고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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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고버섯도 바로 따서 먹으면 맛이 다르다. 잘 자란 싱싱한 것을 바로 따서 그대로 입에 넣으면 버섯의 독특한 향과 부드러우면서도 졸깃한 식감이 입안 가득 전해진다. 이것을 처음 먹어 본 사람들은 무슨 표고버섯이 이렇게 졸깃하냐고 묻는다. 갓 딴 것은 표고버섯밥을 지어 먹어도 맛있고, 야생 표고버섯으로 끓인 죽은 전복죽보다 맛있다고 소문이 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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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를 마실 때는 잔과 차의 색 대비와 촉감도 중요하다. 최고는 분청자기다. 말차는 뜨거울 때 마셔야 하는데, 열이 서서히 전달되기 때문에 잡았을 때 따뜻함과 함께 그릇의 촉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말차 잔은 계절을 탄다. 덤벙 다완은 화사한 봄날이나 여름에 어울리고, 다소 거친 촉감의 이라보 다완은 늦가을에, 담백하고 소박한 이도 다완은 겨울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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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은 동안거나 하안거 때 선방에 모이면 각 사찰의 음식 이야기를 나눈다. 부산 범어사에서는 생미역을 나물처럼 무쳐서 먹고, 영주 부석사에서는 인삼 농사를 많이 지어 인삼 실뿌리를 모았다가 나물을 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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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음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재료는 다양해지고 조리법과 양념은 단순하며 담백해진다. 장맛은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진다. 특히 고추장은 밭에서 직접 키워 뒷맛이 매운 고추를 가지고 엿기름과 찹쌀 풀을 쑤어 담가 그런지 ‘맵단짠’ 맛의 조화가 좋다. 장이 맛있으면 음식도 덩달아 맛있다. 음식의 재료가 좋으면 특별히 뭔가를 더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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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갱이가 나오면 아침엔 회, 점심엔 전, 저녁엔 구이로 먹는다. 전갱이는 고등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몸통 3분의 1쯤에서 꽁지 쪽으로 황색 비늘이 한 줄로 나 있다. 우리나라 바다에서 4월부터 7월 사이에 알을 낳는다. 대부분의 생선은 산란전에 맛이 좋은데, 전갱이는 산란이 끝나고 난 뒤부터가 제철이다. 빨리 상하는 생선이라 바다 가까운 동네에서 많이 먹고, 갯장어처럼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즐겨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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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마에 그릇 구우러 가시면 어머니는 콩나물을 키워 시장에 들고 나와 파셨다. 어머니 혼자 아이 셋을 키우기 어려워 나는 외가에서 자라기도 했다. 외가는 삼천포 와룡산 밑에 있었다. 산과 바다와 강이 다 있는 마을이었다. 외갓집에는 큰 유자나무가 있었는데 노랗게 달린 유자가 참 예뻤던 기억이 난다. 예부터 삼천포는 숭어와 전어로 유명했다. 나는 외갓집에서 숭어와 전어 맛을 알았다. 할머니가 발라서 숟가락에 얹어 주던 전어는 참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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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솔 향이 나고, 사과나무는 푸른 불꽃이 올라오며 풋사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경주 살 때는 방에 페치카만 있어서 사과나무를 태워 방을 데웠다. 과실수는 오래되면 열매가 시원치 않아 베어 버린다. 그런 나무를 가져다가 장작으로 쓴다. 참나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장작 타는 냄새가 좋다. 참나무는 아무리 바짝 마른 것도 불을 떼면 목초액이 나온다. 베이징 덕보다 맛있는 우리 집 ‘장안 덕’은 바로 참나무가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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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에 끓이는 능이백숙도 맛있다. 말린 능이 송송 썬 것에 닭을 넣고 끓인다. 불린 쌀을 함께 넣거나 남은 밥을 넣어도 좋다. 능이는 쇠고기와 함께 볶아도 맛있고, 이렇게 볶은 것을 밥에 비벼 먹어도 맛있다. 신선한 능이는 고기 굽듯이 숯불을 피워 석쇠에 구워 먹으면 그 맛이 고기 저리 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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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으로 도끼질을 하면 허리를 비롯해 온몸이 아프다. 도끼질도 리듬을 타야 한다. 모든 일에는 리듬이 있으니,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리듬을 잘 타야 모든 일이 원만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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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에서 많이 나는 낙지, 개불, 참소라, 키조개에 기장시장에서 공수한 전복, 통영 친구가 보내준 굴도 넣는다. 한마디로 그때 구할 수 있는 각종 해물을 양껏 듬뿍 넣는 것이다. 개불은 꼬들꼬들 달달하고, 낙지는 쫀득쫀득하며, 전복은 오돌오돌하다. 해물마다 맛도 식감도 달라서 해물김치 하나로 진수성찬이다. 해물김치의 양념은 김장할 때
따로 남겨 두던 것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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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저렇게 멍게김치를 담가 보니 멍게에는 풋고추, 홍고추와 마늘만 들어가야 멍게 향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멍게김치는 특유의 향과 쌉싸름한 맛이 있어 애피타이저로 먹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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