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곤경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말해서 과거에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모든 기반시설이 파괴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잿더미로부터 다시 일어서서 장기적으로 융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대한 신속하게 곤경에서 벗어나 정상 상태를 회복하려면 그들에게 어떤 지식이 필요할까?
--- p.10
고대문명들이 그 시대에 축적한 지식의 씨앗을 남겨놓았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라. 15세기와 16세기에 르네상스가 남긴, 변화의 주된 기폭제는 고대문명의 학문을 서유럽에 전달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졌던 고대문명의 지식은 아랍 학자들에 의해 보존되고 전파되었다. 그들이 고대 문헌을 신중하게 옮겨 쓰고 번역한 덕분이었다. 물론 유럽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된 다른 문헌들도 있었다. 그러나 철학과 기하학 및 실용적인 기계장치들에 대한 이런 논문들이 타임캡슐이란 분산형 네트워크에 애초부터 보존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책을 미리 마련해둔다면, 종말 후의 암흑시대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 p.21
인간이 유목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한곳에 정착해서 주변의 농경지를 개간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농작물로 선택한 식물의 수확량에 완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이 제공하는 식물의 영양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바람직한 형질을 기초로 번식하는 식물을 선택하는 품종개량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식물의 생물학적 구조에서 일정한 특성을 강화하고 달갑지 않은 특성을 억눌러왔다. 식물의 번식 전략을 우리 목적에 맞추려고 난도질하는 과정에서 식물의 생물학적 구조는 심하게 왜곡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생존을 위해 식물에 의존하는 만큼이나 식물도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오늘날 괴물처럼 커다란 토마토부터 성장이 억제된 대신 낟알만 굵어진 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재배하는 모든 작물은 그 자체로 테크놀로지의 산물, 즉 유전공학자들의 작품이다.
--- p.91
다양한 종류의 화합물들은 목수의 연장들과 비슷하다. 각각의 연장에는 특정한 용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 이런저런 연장을 사용해서 원자재들에 변형을 가해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든다. 화합물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긴 사슬형 탄화수소 화합물은 에너지를 훌륭하게 저장하기도 하지만, 물을 배척하는 특성 때문에 비바람을 견디는 내후성을 지닌 물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화합물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추출과 정제에 사용되는 다양한 용매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또한 화학적으로 대립쌍을 이루는 알칼리와 산이 많은 중요한 활동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이다. 어떤 화학물질은 산소를 빼앗음으로써 다른 물질을 ‘환원’ ― 순수한 금속을 얻는 기본적인 방법 ― 할 수 있는 반면에, 환원과는 정반대의 행위, 예컨대 연소를 가속화하는 산화제로 쓰이는 화학물질도 있다. 따라서 환원과 산화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지만, 전기를 만들고, 사진에 쓰이는 빛을 포착하며, 폭약에서 에너지를 한꺼번에 방출하는 화학적 특성에 대해서도 살펴보려 한다.
--- p.139
이제 콘크리트는 잿빛의 따분한 건축자재로 취급받으며, 언제인가부터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에 대한 혐오감마저 팽배한 실정이다. 그러나 한 걸음쯤 물러나서, 콘크리트가 실제로는 얼마나 경이로운 건축자재인가를 잠깐 생각해보자. 콘크리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암석이라 할 수 있고, 만드는 방법도 신기할 정도로 간단하다. 포틀랜드 시멘트와 모래나 자갈을 1 대 2의 비율로 혼합하고 물을 적절하게 넣어 걸쭉한 반죽을 만들면 된다. 나무로 멋지게 짠 거푸집에 그 걸쭉한 반죽을 붓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이 재료가 굳기를 기다린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콘크리트가 파괴된 도시를 신속하게 되살려냈고, 지금도 도시의 건물을 짓는 데 가장 중요한 자재로 군림하는 이유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이처럼 콘크리트는 현 시대의 아이콘이지만 기본적인 제조법은 2,000여 년 전에 발명된 것이다.
--- pp.171-172
의학적 진단 방법을 바꿔놓은 도구인 청진기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장비이다. 한 끝을 귀에 꽂고, 반대편을 환자의 몸에 대고 밀 수 있는 속이 빈 나무관을 사용해도 되고, 종이를 원통 모양으로 돌돌 말아서 사용해도 된다. 청진기는 실제로 1816년에 이런 식으로 발명되었다. 르네 라에네크는 유난히 가슴이 풍만한 여성 환자의 가슴에 귀와 뺨을 대는 게 거북하게 느껴져서 즉흥적으로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임시변통으로 관을 만들어 사용하면 심장 소리를 완벽하게, 그것도 증폭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청진기로는 체내의 소리를 통해, 심장 소리의 이상 징후부터 폐 질환을 뜻하는 쌕쌕거리고 탁탁거리는 소리까지, 심지어 장폐색의 징후도 알아낼 수 있었다. 또, 태아의 희미한 심장박동도 들을 수 있었다.
19세기가 저물어갈 쯤에는 청진기만이 아니라 체온을 측정하는 체온계, 혈압을 측정하기 위한 눈금표와 연결된 가압대가 의사들의 가방에 든 기본적인 의료 장비였다. 체온계로는 감염과 관련된 열병을 밝혀낼 수 있다. 체온을 규칙적으로 측정해서 찾아낸 패턴이 어떤 특정한 질병을 암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 후의 문명이 고에너지 형태의 빛을 발생하는 법을 다시 알아낼 때까지 인체의 내부 형편을 가늠하는 핵심적인 도구로는 청진기가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p.200-201
원칙적으로, 당신의 면 셔츠에 얼룩을 남기는 것은 무엇이든 임시변통으로 잉크로 사용할 수 있다. 예컨대 잘 익어 짙은 색깔을 띤 장과류 열매를 으깨서 과즙을 내고, 으깬 과육을 체로 걸러내서 남은 과즙에 약간의 소금을 녹이면 잉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물에서 추출한 잉크의 주된 문제는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생존자가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종말 후의 사회에서 새롭게 축적한 지식을 영원히 간직하려면, 종이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햇빛에 희미해지지 않는 잉크가 필요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세 유럽에 등장한 잉크가 ‘몰식자 잉크’이다. 실제로 서구 문명의 역사도 몰식자 잉크로 쓰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잉크로 자신의 공책들을 채웠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이 잉크를 사용해서 협주곡과 모음곡을 작곡했으며, 빈센트 반 고흐와 렘브란트도 이 잉크로 스케치했다. 미합중국 헌법도 이 잉크로 쓰여 후손에게 전해졌다. 원조 몰식자 잉크와 무척 유사한 잉크가 아직도 영국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등기소 직원이 출생증명서와 사망증명서, 결혼증명서 등과 같은 법률문서를 작성하는 데 사용하는 잉크가 중세시대에 사용하던 몰식자 잉크와 화학적 성분이 거의 똑같다.
--- pp.277-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