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의 처음 부분에 한 성폭행 사건을 소개했다. 당시 두 명의 남학생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날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이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가해자 두 명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여학생의 손과 발목을 잡고 다른 곳으로 옮겼고, 다른 학생들은 여학생이 무의식 상태에서 옷이 벗겨지는 상황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이 사진을 다른 학생과 공유했고, 심지어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에 게시했다. 어느 누구도 이를 말리거나 911에 신고하지 않았다. 가해자 두 명의 행위는 분명 끔찍했다. 그러나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사건을 막도록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똑같이 분명하다. 이들이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p.45-46
아마도 여러분 모두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직조공은 임금에게 멍청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멋진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임금은 속아 넘어가 이들이 만들었다는 옷을 입고 행진한다. 사람들은 모두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멍청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이다. 타인에게 보여질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는 어린 소년만 “임금임이 벌거벗었어!”라고 소리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신의 언행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은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거나 직장에서 회의를 할 때 교수나 발표자가 질문이 있는지 물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여러분은 궁금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많은 질문거리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손을 들지 않는 쪽을 택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왜 손을 들지 않았는지 물으면 사람들 앞에서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질문하지 않았을지 이유를 짐작해보라고 하면 그들은 모두 잘 이해해서 질문거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이는 다원적 무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사실 부끄러워서 손을 들지 않은 것인데, 질문할 내용이 없어서 손을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p.89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무리에 속하길 바란다. 하지만 남들에게 모가 나 보이지 않도록 침묵하는 경향은 집단 내 구성원 대부분이 반대하는 행동을 찬성하고 있다는 잘못된 허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3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람은 개인적으로 친구나 동료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인정이나 대응을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생각과 행동의 괴리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준에 순응하게 만든다.
--- p.136
왜 남성들은 가까운 친구가 여성에 대해 성차별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 가지 원인은 비웃음, 평가, 외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시각에 공공연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교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남학생들이 성폭력 상황에 개입하지 못하는 이유가 타인의 평가(비웃음을 살지 모른다는 두려움)나 다른 남성들에게 약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 동료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과소평가하는 이유는 공격을 받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초래할까 두려워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잘못된 시각이 상당히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외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큰 남학생 사교 모임이나 스포츠팀에서는 문제가 있어도 침묵하려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
--- pp.189-190
트럼프는 선거 캠페인 내내 공화당의 기존 세력을 비웃고 무시했다. 반대로 외부인인 자신의 입장을 강조했다. 경선 과정에서 공화당 지도부가 트럼프를 승인하지 않았고, 트럼프의 캠페인에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를 낸 것은 당연했다. 선거 전, 다수의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의 공격적 언행과 정책에 우려를 표했고, 멕시코인들이 강간범이라는 그의 비난에 반대했다. 이슬람에 대한 금지와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에도 반대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나는 양원 의원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비판의 목소리는 열렬한 환성으로 바뀌었다. (…) 거침없는 표현으로 유명한 보수주의자 데이비드 브룩스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매일 도덕적 기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몇 개월이 지나면 모든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
이처럼 침묵은 출발점이다. 다음으로 점차 묵인되고, 결국에는 기존의 강한 비판론자들이 정책과 사람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들을 지지한다. 코미의 말을 빌리면 “전 세계가 지켜보는 동안 당신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도자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지, 그와 함께하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말하게 된다. 그의 언어를 이용해서 지도력을 칭찬하고, 가치에 대한 신념을 칭송한다. 그러면 당신은 패배한 것이다. 그가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
--- pp.231-233
유대인을 도운 독일인들은 박해받을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도운 보통 사람이었다. 이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없게 된 유대인 이웃을 위해 식량과 물건 등을 대신 구입하는 등의 작은 도움에서 시작해 이후 짧은 기간이라도 이들을 숨겨주는 등 더 중요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을 구했던 사람들의 목숨을 건 노력은 극단적이면서도 이례적 역사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도덕 저항가를 찾을 수 있다. 숙제를 베끼려는 학급 친구를 말리고, 사무실에서 성차별적 발언을 제지하며, 스포츠팀에서의 괴롭힘을 알리는 일도 도덕 저항이다. 도덕 저항가의 시작은 용기 있는 첫걸음을 떼는 것에서 시작된다.
--- pp.304-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