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의 일본 정부 견해처럼 한일기본조약·청구권협정에는 식민지배의 청산적의미가 들어 있지 않으며, 포기한 것은 국가의 외교보호권이지 개인의 청구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대법원 판결이 지적하듯이,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청구권협정에 의한 양국 간 합의 범위에는 본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청산 문제가 포함돼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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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964~1973년까지 미국의 요청에 응해 남베트남(당시의 월남)에 연 32만 명을 파병했습니다. 먼저 의료부대 파견부터시작해 그 뒤 전투부대를 파병했으며,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 이후에는 점차 파병을 늘려 그 규모가 미군 다음으로 많았습니다. 즉, 한일 청구권협정은 미국의 압력 아래 한국 측이 일본의 식민지배 청산 문제를 제대로 추궁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응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본 측에서 보자면 ‘싼값’에 식민지배 청산 문제를 처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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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청구권협정에는 무상 3억 달러, 당시 환율로 1,080억 엔 상당의 금액을 … 일괄 지급된 것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분할되어, 그것도 ‘현물 지급’ 형태로 지급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신일철주금 등의 국내(일본)기업으로부터 플랜트를 사서 이를 한국에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청구권협정은 일본기업에 이익을 안겨주는 일석삼조의 협정이었습니다. 배상금 지급이 모두 이런 현물배상 형태로 이뤄짐에 따라 일본기업들이 다시 아시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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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 뒤인 1912년에 발령된 ‘토지조사령’은 조선인의 토지를 큰 뱀처럼 삼킨 교활한 법령이었습니다. 그런 방법은 이미 아이누모시리에서 써먹은 바 있습니다. 토지조사령으로 ‘무주지無主地(주인 없는 토지)’가 된 땅은 총독부가 취득해서 조선에 이주해온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토지를 빼앗긴 수많은 조선인들은 유민이 돼 결국 일본 본토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강제징용자’의 기원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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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강제연행·강제노동 문제인데 중국인 강제징용자의 경우에는 하나오카 화해(가시마 건설), 니시마쓰 건설 화해, 미쓰비시 머티리얼 화해 등이 이뤄진 데 반해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차이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불법적인 노예노동이라는 점에서는 양자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기간과 그 수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 pp.72-73
건설 당시의 발전소가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사실을 안 유족 중 한 사람이 “아버지들이 만든 이 발전소를 오래도록 사용해주세요”라며 안내하던 주고쿠전력 담당자에게 말했고, 담당자는 바로 “예,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보고집회 등에서 정색을 하고 한 것이 아니라 안내를 받던 도중에 유족이 주고쿠전력 사원에게 따로 말을 건넨 것인데, 그것을 동행하던 필자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언뜻 알려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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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5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번 여름에 사외이사 역을 맡아 미쓰비시 머티리얼 대표단에 참가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당한 미국인 전 포로들과 면회하고 사죄했습니다. 전 포로들은 ‘사죄하러 와준 일본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미국 언론에 밝혔습니다. ‘화해는 피해자 본인들이 살아 있을 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 p.157
‘화해’에는 다음의 3가지가 불가결합니다. ① 가해자가 가해 사실과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한다. ② 사죄의 증표로 피해자에게 화해금(실손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음’)을 지급한다. ③ 장래에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역사교육, 구체적으로는 수난비 건립, 수난자 추도사업 등을 진행한다. 본 화해도 이런 생각의 바탕 위에서 이뤄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미쓰비시 머티리얼 화해는 지금까지 얘기해온 하나오카·니시마쓰 화해의 연장선상에서 성립된 것입니다.
--- p.160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지난해 구 미쓰비시 광업의 광산에서 미국인 포로들에게 일을 시킨 사실을 인정하고 전 포로들에게 사죄하는 등 역사의 청산 작업을 벌여왔다. 일본 정부는 배상 문제는 해결이 끝난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기업의 자주적 판단에 의한 화해는 최고재판소가 요구하는 ‘피해 구제’의 정신에 따랐다. 이번의 화해에서 미쓰비시 머티리얼 사는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기금이나 기념비 건립 외에 판명되지 않은 피해자나 유족들의 소재지 조사에도 협력한다.
--- p.173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청구권협정이 식민지배의 청산을 결락시킨 불충분한 것이어서 그 수정·보완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청구권협정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시대에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합의한 2002년의 ‘일조(북일) 평양선언’을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전자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지만, 후자에서는 “일본은 과거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 사람들에게 …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다”라고 함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확고하게 기술돼 있습니다.
--- pp.194-195
이영훈 씨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사실인지 여부를 검증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필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본문에서 말했듯이 대법원 판결이 인정한 강제노동 실태에 대해서는 일본 재판소의 판결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일본 재판소의 판결은 원고들의 손해를 인정하면서 그 배상청구권 자체는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으나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재판을 통해서는 청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것입니다
--- p.274-275
전체 중 일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것으로 전체를 부정하려는 이우연 씨의 논법은 역사수정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예컨대 난징 학살의 피해자들은 중국 측의 공식 견해로는 3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당시 난징의 인구, 사망자 매장 수, 매장 능력 등으로 보아, 오늘날에는 이 30만 명이라는 수가 과장됐을 것이라는 게 통설입니다. 도쿄(전범)재판에서는 피해자 수가 10여 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학살 그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 p.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