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꼼짝없이 통제당하는 사회는 다중으로 분열하게 된다. 위임받은 계급은 생산성을 중시하는 기구에서 관료적인 기구로 분열된다. 차별받는 머나먼 이웃들을 향한 숭고한 도덕 감정과 그들로부터 차별의 높은 이익을 얻는 중산층은, 그러한 감정과 그에 속하는 경직된 학문적 은어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하층으로부터 분열된다. 피해자집단 및 이익집단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분열된다. 평등을 위해 투쟁하거나 공정한 경쟁을 요구하는 이들은 특혜를 요구하는 집단으로부터 분열된다. 이처럼 해방의 외양 아래 전혀 반대의 것이 실현된다. 연대뿐만 아니라 성숙함 또한 저지당한다. 평등을 향한 노력은 중요하지 않은 경미한 문제 영역으로 방향을 틀고, 정당한 분노는 곤혹스러울 만큼 정확한 언어규제로 인해 재갈이 물리거나 의기소침하게 된다.
--- p.31
PC에 대한 강령적인 ‘성서’[정전]가 없다는 상황을 통해 PC가 이데올로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존재 방식에 관한 매우 형편없는 오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관념이나 문자로 존재하기보다는 기관, 위원회, 협회, 실행 방법, 양육 습관, 겉보기에 자명한 ‘아비투스’, 생생한 도덕 원칙, 유행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장치’ 속에 존재하니 말이다. 그리고 특권화된 서구사회는 최근 수십 년간 현실에 대한 놀라운 맹목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대학의 일자리 공고나 임용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학자들은 예컨대 이주민들 사이의 범죄와 같은 특정한 소재에 대해 다뤄야 하는지를 놓고 스스로를 검열하거나 집단적으로 검열한다.
--- p.49
정치적 올바름의 미국식 제안자들을 비롯하여 이와 유사한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이에 대한 세계 도처의 협력자들을 포함하여)이 간과하는 것은 언어가 소위 ‘순수하고’ ‘순결한’ 단어들로 상부구조를 구축하는 경우이다. 심지어 이 상부구조는 가장 잔혹한 현실을 은폐함으로써 이를 통해 현실이 실현 가능하도록 작동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지속적으로 ‘실패한 국가’로 규정하고 끝없는 내전의 무대로 몰아넣고, 자국민을 지나치게 많이 감옥에 가둬놓으면서―심지어 그들은 정확한 표현으로 명명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대상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어에 관해서 민감하게 굴고 그 누구의 감정도 해치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잔혹한 현실과 민감한 언어가 짝을 이뤄서 조화롭게 발맞춰 걷는다면, 그 맥락을 추론하고 섬세한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게 분명한, 매우 섬세하게 은폐된 현실의 잔혹함을 들춰내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는가? 슬라보예 지젝이 친절하게 강조한 바에 따르면, 감수성 예민하고 위생적인 언어를 둘러싼 노력은 소수자 내지 사회적 약자 집단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잔혹한 현실 자체에도 적용된다.
--- pp.125-126
성인이 삶에 통상적으로 따르는 불가피한 부가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을 요즘의 대다수 사람은 전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경험으로 여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찮고 사소한 일로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적어도 ‘미세 차별’이거나, 충분히 피할 수 있는 폭력적인 상실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세 차별을 감수해왔던 다른 사람들은 미세 차별이야말로 그러한 경험을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거대한 행복’의 상실은 정신분석의 견해에 따르면 불가피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따라서 비역사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을 연민하고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마저 똑같이 비역사적이지는 않다. 이에 대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보여주었듯이 특별히 부합하는 시대가 있다. 특정한 집단적, 문화적 핸디캡은 개인으로 하여금 원한의 태도를 갖도록 자극하거나 그러한 태도를 강화시킬 수 있다.
--- pp.133-134
소위 정체성을 둘러싼 포스트모더니즘적 투쟁은 이러한 관점에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치 전략으로 이해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고 이 정체성에 스스로를 맞추도록 독려한다. 그것을 넘어서는 모든 것, 즉 개인을 사적인 관심과 친숙하고 인종적인 연결이나 성적인 제약을 갖는 사람을 넘어서, 세계시민, 시민 혹은 귀부인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개인들은 전혀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모든 보편주의는 그들에게 낯선 것이 된다. 고유의 뿌리와 문화적 출신 조건과의 모든 비판적 불화 또한 낯선 것이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에 대해 적확하게 설명하기를, 오늘날 혁명적 연대의 모토는 ‘차이를 인정하자!’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문화의 동맹이 아니라, 문화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의 동맹, 모든 문화의 내부에서 정체성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그것을 억압하는 존재에 맞서 싸우는 것 간의 동맹이다.” 우리가 우리의 무언가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멍청한 정체성의 특수성이 아니라, 이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체성과 결별하는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보편성이어야 한다. 이 보편성은 같은 투쟁을 하는 다른 이들과 우리가 연대하도록 해준다.
--- pp.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