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명화’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곡이 토요일 늦은 밤 TV에서 흐를 때면 내 심장은 터져나갈 듯이 뛰었고, 그토록 흥분했다는 사실을 가족이 아는 건 어쩐지 싫었기 때문에 나는 할아버지의 방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어서 광고가 끝나기를 기다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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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 방에 함께 모여 영화를 보는 동안만은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깊은 애정마저 느꼈던 것 같다. 영화에 빠져 있을 때 가족은 나를 보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지 않는 그들의 옆모습이 나에게 엄청난 안도감을 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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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대여점의 첫인상은 좀 어둡고 습했다. 그 느낌은 연소자 관람가에서 중학생 이상 관람가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가 뒤섞인 구역을 지나고 미성년자 관람불가에 다다르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황급히 연소자 관람가 코너로 돌아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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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비디오플레이어 앞으로 가서 되감기 버튼을 누르자 맹렬한 소리를 내던 기계는 잠시 뒤 테이프를 토해냈고 문을 열고 머리를 내민 테이프에선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뒤에 생소한 장면을 하나 더 목격했다.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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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읍엔 극장이 하나 있었다. 항상 영화를 틀지는 않았고, 정치 집회나 약장수 공연 같은 걸 하면서 간간이 철 지난 필름을 걸었던 듯하다. 옛날 신문을 뒤적이니 지구당 대회에 깡패들이 들이닥쳐 수십 명이 다치는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어쨌든 방학식을 하는 날엔 만화영화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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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댄싱〉의 춤을 따라 하는 남고생들과 〈라 붐〉을 본 뒤 비를 맞고 걸어가는 남고생들 중에 어느 쪽이 더 징그러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 p.44
나의 첫 영화를 떠올리면 말의 무기력함이 먼저 생각난다. 신비로움이라고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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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물질이 아니다. 스크린에 영사되고 있는 내용도 아니다. 그날의 날씨, 영화를 보러 가기까지의 시간, 극장의 분위기, 낡고 불편한 극장 의자의 삐거덕거림, 스크린에 불이 켜지고 극장 밖을 나섰을 때 뇌리를 스치는 생각까지, 모든 체험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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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는 〈미이라〉 영화표 두 장이 들려 있었고, 여자의 눈에서는 포스터 속의 브렌든 프레이저와 레이첼 와이스보다 더 깊은 우물이 보였다. 그러니까, 우물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우우무울이라고 말할 정도의 슬픔이 여자에게서 느껴졌다. 여자는 왜 매번 우물이 아니라, 우우무울이었을까. 나는 해앵복한데, 여자의 우우무울을 생각하면 나는 자아아꾸 조용한 아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 p.74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마음을 가라앉힌 엄마는 내게 “영화는 어땠어?”라고 물어봤다고.
나는 간명하게 세 줄로 영화를 요약했다. “막 달려가는 거야. 막 쏘는 거야. 그리고 막 죽는 거야.” 아쉽게도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아마도 내 인생의 첫 번째 영화였을 텐데.
--- p.84-85
모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낯설고 신기한 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좋았다. 미지의 땅, 미지의 보물, 미지의 인연. 책도 영화도 그래서 좋아하기 시작했다.
--- p.96
영화가 끝나면 신나고 나른한 기분에 취하는데, 지구 끝까지 달리고 싶다가 나의 모든 꿈과 희망을 말하고 싶다가 했다. 그런 나를 데리고 극장을 다니신 어머니와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영화를 볼 때마다 주인공의 직업을 갖고 싶다고, 영화에 나오는 장소에 가보고 싶다고 혼이 빠져 수선을 떠는 어린이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p.100
지금은 당연한 일이 예전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꽤 많은데 영화관의 자리가 그러할 것이다. 한때는 먼저 앉은 사람이 그 좌석의 임자가 되었다. 상영관 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종종걸음을 하거나 뛰고, 심지어 가방을 던졌다.
--- p.119
내가 기억하는 첫 영화는 없는 것 같다. 허망한 결론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첫 영화는 아마도 할머니인 듯하다. 랄프와 바넬로피처럼 랜선과 와이파이를 타고 온 세계를 떠돌면서 당신이 있는 요양원에는 가지 못한다. 내게 가장 이타적이고 그래서 가끔 이기적이었던 당신의 그곳 자리는 과연 명당일는지, 알 수 없어서 가끔 마음의 스크린이 시커멓다. 시커멓게 잊은 채로 시간이 간다.
--- p.121-122
우리가 본 영화들은 우리를 통과해 지나가지만, 모두 다 지나가는 건 아니다. 어떤 장면, 어떤 대사, 인물의 눈빛, 목소리, 배경, 음악, 그리고 그 영화를 보던 시간이나 장소,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문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머물러, 우리를 만든다.
--- p.126
누군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를 물어보라. 이야기 중에 그를 이루는 구성 성분 중 ‘씨앗’을 보게 될지도 모르고 그가 자란 시대의 얼굴, 문화의 흐름이 ‘같이’ 따라와 개인의 풍경을 보여 줄 수도 있을 테니까.
--- p.132
그리고 실제로 세어볼 수 있다면 알게 뭐람, 아흔두 번째이거나 백스물일곱 번째일지도 모를 〈페드라〉는 누가 뭐래도 나의 첫 영화였다. 유치원부터 따지든 어른이 되어서든 몇 명을 스치고 만나고 사귀었으면 무엇 하랴. 첫사랑은 따로 있는 것이다.
---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