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관점에서 본 역사와 사회
여성의 경험을 피해로 환원하거나 여성의 위치를 피해자로 영속시키지 않으면서 여성의 역사를 발굴·복원하고, 가부장제와 젠더 질서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존재한 것만이 아니라, 이에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거나 때로는 협력하면서 체제의 공모자로 기능해왔다. 이러한 여성의 행위성을 삭제하지 않으면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는, 피해의 역사만이 아니라 젠더위계질서에 대한 저항, 협력, 공모의 과정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 p.16-17

젠더를 경유하여 법을 바라보기
2019년 20대 국회의원 중 남성은 83%, 전체 법조인 중 남성은 72.3%로, 남성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법 규정을 만들고 그 언어를 해석하는 권한이 남성들에게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법의 합리성과 객관성은 남성의 경험과 관점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 p.36

공중화장실에 갈 때 긴장한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성적(sexual) 폭력과 젠더(gender)/여성폭력에 대한 중첩지점에 대한 고민을 통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 규제의 보호법익이 무엇인가이다. 성폭력에서 ‘성’이란 무엇이고, ‘성(적인 영역)에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질문을 바꾸어, 폭력의 대상이 여성일 때 왜 ‘성적인’ 폭력이 동반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있어, 분명한 것은 폭력의 양상이 성적일 때 그 약자가 더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성폭력은 어쩌면 약자를 취약하게 만드는 가장 최악의 방법이며, 따라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은 이러한 성적인 공격에 무력해지도록 교육받는다.
--- p.60

몸/건강과 여성의 인권
그간 미국 생물교과서에서 정자와 난자의 수정과정은 “힘 있고 능동적인 정자가 경쟁을 뚫고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난자의 막을 뚫고 진입” 하는 것으로 설명 …. 1980년대 생물학 교과서에서는 수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자가 화학유도물질을 분비하여 정자의 접근을 돕고 하나의 정자가 들어오면 스스로 명령을 내려 다른 정자가 들어올 수 없도록 조치한다. 자기 당질에 명령을 내려 분화하고 성장하여 투명대에 더 이상의 정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마틴과 같은 지적은 이미 1921년에 등장했지만 당시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성평등 이슈가 사회적으로 논의된 1980년대에서야 수용될 수 있었다.
--- p.84-85

미디어와 젠더 재현
미디어를 통한 재현은 한 사회에서 개인이나 개인이 속한 특정 집단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이 때문에 재현은 다분히 정치적 성격을 띤다. 이는 우리가 남성, 여성, 다문화가정, 성소수자와 같은 우리 사회의 특정 그룹을 매체 속에서 재현할 때 그 과정 속에서 권력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재현의 과정에서 재현의 주체와 객체가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누가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과정에서 힘의 역학이 작용하기 때문에 재현의 문제는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 재현에 관심을 가지는 미디어 비평가들은 누가 우리 사회 속의 젠더, 계급, 인인종 성적 정체성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영화, 텔레비전, 또는 다른 다양한 미디어 속에서 여러 상징적 장치들과 서사를 통해 미학적으로 나타내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 p.99-100

여성의 삶과 글쓰기
‘여류작가’라는 용어는 생생물학으로 ‘여성’을 ‘남성’과 구별하려는 의도와 함께 여성 작가들만의 독특한 문학적 특성을 포착하려는 명명이었다. 여기에는 ‘여류작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당시 ‘여류작가’들의 문학적 한계를 지적하는 등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작가이자 평론가였던 임순득은 “작가와 여류작가를 구별하지 말고, 여류작가를 작가로서 정당히 평가할 것을 요구하고, 여류작가들에게는 ‘생도작문적 재능이나, 귀여운 재재거림’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였다
--- p.125-126

젠더 관점으로 살피는 나이듦과 돌봄
늙음은 결코 젠더 중립적이지 않다. … 외모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은 뷰티산업은 거스르기 힘든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성주의자들 역시 ‘늙어가는/늙은 몸’을 부인하기 쉽다. 젊은이들 중에는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라는 말로 ‘늙은이’들을 ‘존중’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긍정적 사고의 힘으로 노화도 막을 수 있다는 격려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변한 것은 몸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의 이 언설은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것들과 그에 따른 통찰력을 함께 지워버린다. 말년의 어슐러르 귄은 도무지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새파란’ 젊은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노년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막연하게 자리 잡은 (노화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며, 이로써 오히려 노년들의 ‘존재가 부정’될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 p.156-157

가족 구성원과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
자율적인 개인이 ‘선택하는’ 관계들에 대한 존중과 원가족을 넘는 새로운 공동체의 유대감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어야 하며, 원가족에게 종속되지 않는 주거, 고용, 의료 등에서 평등한 ‘사회적’인 삶이 가능한 조건을 필요로 한다. 삶의 고립은 원가족이 없기 때문에 ‘무연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가족 외에 다양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인 토대가 부족할 때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p.178

여성 노동의 현실과 평등노동권
2019년 조사에서 여성이 경력단절을 처음 경험하는 연령은 28.4세로 재취업까지 평균 7.8년이 걸린다. 경력단절 이후 재취업하는 여성의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임금은 낮아진다. 경력단절 이전 상용직 비율은 83.4%에서 단절 뒤 55%로 감소하는 데 비해 임시직은 7.8%에서 14.6%로, 시간제는 5.4%에서 16.7%로, 1인 자영업자 비율도 4.8%에서 17.5%로 크게 증가하였다. 경력단절 이후 첫 일자리 임금(191만 5천 원)은 단절 이전 임금(218만 5천 원)의 87.6%에 불과하다. 또한 임금노동자 중 경력단절 경험자의 평균임금은 182만 원으로 미경험집단 223.1만 원의 81.6%에 불과하고 40만 원 이상 차이가 난다(여성가족부, 2019).
--- p.196

여성의 리더십, 그 가능성에 대한 탐색
유리천장은 유리벽현상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유리벽에 막혀 있는 여성들의 리더십은 능력이라는 잣대로 평가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승진을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주요 보직에서 제외되거나 조직의 이너서클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여성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한다면 여성이 상위직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현장에서 유리벽에 가로막힌 여성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가치 없는 일’ 혹은 ‘중요하지 않은 업무’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p.232

젠더와 과학기술, 무엇이 문제인가?
신규채용 시 28.9%인 여성의 비율은 재직자로 가면 20.0%로 낮아지며 승진을 하거나 관리자 직급이 되는 여성은 전체의 17.4%와 10.0%로 더욱 감소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 인력이 새어나가는 ‘새는 파이프라인’ 현상이 뚜렷하게 보인다. 전체 재직자 중 20.0%를 차지하는 여성들 중 비정규직은 35.6%로 16.9%인 남성 비정규직 비율을 크게 웃돈다는 점도 여성들이 끝까지 생존하기 힘든 상황을 보여준다.
--- p.251

페미니스트 과학소설의 젠더상상력
팁트리 주니어는 앨리스 셸던이라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 남성 필명을 사용하여 과학소설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데뷔작품부터 강렬하고 견고한 문체의 남성 작가라고 인정을 받는데 이는 그녀의 작품이 완벽하게 남성적 스타일이라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결국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과학소설계는 혼란에 빠졌으며 과연 ‘여성/남성 글쓰기’라는 젠더화된 양식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팁트리는 “말하기 위한 권위를 위해서 뿐 아니라, 게임을 할 용기를 위해서도 남자이름이 필요했다”고 말하면서 당시의 폐쇄적인 과학출판계를 언급하였다. 실제로 과학소설계를 지배했던 유명 편집자 존 캠벨의 “여성에게 과학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찬성하지도 않는다”라는 말처럼 과학소설계는 여성들에게 단절된 곳이며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 p.295-296

기후위기 시대, 페미니즘과 생태를 사유하기
‘기후위기는 성차별적이다’는 명제를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 유엔여성기구는 2015년에 발생한 네팔 지진 이후에 네팔 여성과 아동 대상 인신매매와 조혼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지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발생했지만 지진 이후 취약해진 경제 상황 속에서 여성과 아동이 젠더폭력젠더 폭력의 주요 대상이 된 것이다. 최근 한 연구보고서에서도 환경파괴가 늘어날수록 젠더폭력이 증가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들어가며<br/><br/>숙명여자대학교는 한국의 근·현대 시기 대한제국 황실이 설립한 최초의 민족여성사학으로 여성 교육의 역사를 대표한다. 그중에서도 아시아여성연구원은 여성교육과 여성연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가장 역사 깊은 기관이다.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원은 1960년 9월에 설립된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에서 출발하였다.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는 설립 직후인 1962년 ?아세아여성연구?를 창간하고, 여성 연구의 성과를 축적해왔다. 1960년대 여성의 대졸 이상 학력 비율이 1.5%가 채 되지 않고 여성 관련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아시아여성연구원은 여성의 리더십이 사회를 바꾼다는 기조 아래 관련 기초 연구를 수행해 왔다. 그 결과로 다양한 여성 관련 정책을 제안하고,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다수의 여성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다. <br/><br/>2000년대 이후 아시아여성연구원은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추어 여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국내 및 국제 학술대회를 정기적으로 주최하여왔다. 여성과 인권, 페미니즘과 정치사상, 한국 이주여성의 사회문화적 적응실태와 이주정책, 현대 아시아 여성의 지위변천과 21세기의 과제, 여성과 미디어, 환경과 인권, 과학기술 분야의 젠더혁신 등이 그간 학술대회에서 다룬 주제들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변모와 더불어 부상하는 주요 이슈를 선제적으로 발굴하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하는 비정기적 강좌를 통해 여성 연구가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일에 아시아여성연구원은 노력을 다해왔다. <br/><br/>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원은 『다시 쓰는 여성학』을 기획하였다. 책의 제목을 두고 여러 논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성학’과 ‘젠더학’을 두고 씨름했다. 결국 ‘젠더학’이 아닌 ‘여성학’으로 기운 이유가 이 책이 가지는 특징이자 시대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와 2부가 아주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젠더화된 질서를 질문하다’라는 제목의 1부에서는 역사와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젠더 질서를 다양한 분야와 연계하여 반추하고 분석하는 내용을 담고자 하였다. 2부 ‘젠더 관점으로 세상을 상상하다’에서는 젠더 관점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고 기획하는 내용을 담으려 하였다.<br/><br/>1부 ‘젠더화된 질서를 질문하다’에서는 젠더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와 사회를 돌아보며 근대 가부장제 사회가 지니는 특징을 살펴보고(장민선·강인화) 페미니즘 법이론과 성평등에 관한 페미니즘 법학의 다양한 시각을 논하였다(장다혜). 이어서 여성의 몸과 관련하여 젠더에 기반한 폭력(변혜정)의 문제와 여성의 인권과 몸/건강(박민주)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여성의 삶이 미디어와 한국문학의 장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TV 드라마를 중심으로 미디어의 젠더 재현(김필애)과 한국 여성 작가 및 이들의 글쓰기(장미영)를 통해 살펴보았다. <br/><br/>2부 ‘젠더 관점으로 세상을 상상하다’에서는 여성이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나이 듦과 돌봄의 문제를 젠더 관점에서 살펴보고(김영옥), 가족을 구성할 권리와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를 논하였다(김순남). 이어서 여성 노동의 현실을 진단하고 성평등한 노동권을 위한 전망을 모색하며(박옥주), 여성의 리더십이 지닌 영향력과 가능성을 탐색하였다(이화영). 그리고 4차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분야인 과학기술과 연관하여 젠더 관점에서 기존의 과학기술을 혁신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임소연), 페미니스트 과학소설 속에 드러난 젠더상상력을 분석하며(김경옥),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여성주의 관점에서 생태적 장을 새롭게 모색하였다(김신효정). <br/><br/>2020년 아시아여성연구원은 설립 60주년을 맞았다. 또한 아시아여성연구원은 지난 1981년 6월에 『여성학』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하는 『다시 쓰는 여성학』은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한 세대가 바뀐 시점에서 발간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세계사적으로 전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시기에 젠더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업은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시급하다.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젠더 논쟁이 뜨겁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발간되는 이 책이 여성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br/><br/>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의 노고가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기획을 재조정하고, 저자들과 출판사를 오가며 엮은이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 아시아여성연구원의 강인화 연구교수와 교정·교열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면에 힘을 보태준 고은정, 권정현, 권준이, 장미영 연구교수, 박송은, 신혜순, 양은지, 이은미 연구원, 김소현 조교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묵묵하고 성실하게 작업해주신 한국문화사의 진나경 편집자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애초의 약속보다 출간 일정이 많이 늦어졌음에도 기꺼이 작업에 동참해주시고, 오랜 고민을 토대로 좋은 글을 써주신 저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br/><br/>2021년 2월 <br/>저자들을 대표하여 장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