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면에서 어리바리했던 첫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 대통령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을 건넸다. “소감 한마디 해보세요.” ‘소감이라……. 만감이 교차하지요, 대통령님.’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할 얘기는 미리 생각해두었지만 잠깐 호흡을 다듬으면서 생각을 고쳤다. 앞서 들어갔던 회의에서 당시 황덕순 일자리수석이 해준 얘기가 떠올라서였다. 8시 10분 노영민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나는 신입 인사를 아주 장황하게 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갈 때 황덕순 일자리수석이 웃으며 “역대 가장 긴 인사말”이라고 알려주었다?황덕순 수석은 서울 경성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황 수석은 티타임 멤버는 아니었다. 어쨌든 티타임에서는 미리 준비한 긴 인사말은 하지 않고, 즉석에서 떠오른 말로 짧게 한마디만 했다. “한 달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대통령님께서 ‘복덩이가 굴러왔네’라는 생각이 드시도록 하겠습니다!”
‘복덩이’란 말에 문재인 대통령이 미소를 지으셨던 기억이 난다. 첫날부터 대통령 앞에서 큰소리를 뻥뻥 쳤다.
--- pp.16~17
문 대통령은 2020년 3월 10일, 벼르고 벼르다 충북 청주에 있는 질병관리본부를 깜짝 방문했다. 직원들의 ‘밥차’에 담을 갈비찜 등의 특식을 선물로 준비해서 예고 없이 질본을 찾았다. 코로나 국면에서 문 대통령의 첫 방문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즉석 인사말을 이렇게 했다. “오늘 브리핑이나 보고 안 받겠습니다. 지시할 일, 없을 겁니다. (다들 웃음) 고맙고, 또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질본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보고와 브리핑도 생략하고, 격려의 말만 전하고 서둘러 떠나는 문 대통령에게 질본 직원들은 일제히 “대통령님 건강하세요!”를 외쳤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광경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로부터 6개월 뒤 두 번째로 질본을 방문했다. 이번에도 선물 꾸러미를 준비했다. 선물은 질병관리본부의 ‘질병관리청’ 승격과 초대 정은경 청장의 ‘임명장’이었다. 임명장 수여식을 청와대 본관에서 하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장을 들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시라도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부담인 질병관리본부의 상황을 감안한 것이었지만, 장기간 코로나에 맞서 함께 싸워온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이 정 청장과 한자리에서 승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였다.
--- pp.71~73
특별점검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한 말이다. “경제하는 분들은 ‘과거의 비상 상황’에 준해서 생각합니다. 메르스, 사스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비상경제 시국’입니다. 정부는 과거에 하지 않았던 대책, 전례 없는 대책을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 “국민은 상황을 냉정하게 봅니다.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무슨 대책도 통하는 것입니다. 실효성이 있다면 국민이 동의합니다. 그건 포퓰리즘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지시는 “경제학 교과서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뜻이었다. 코로나 경제 시국에 대응하는 대통령의 고민이 담긴 말이자 큰 방향의 제시였다. 재정 당국이 지금 같은 비상경제 시국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강조한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지만 언론에는 알리지 않았다. 총선을 한 달 남겨놓은 상황에서 무슨 시비가 걸릴지 몰라서였다. 책잡힐 말이 전혀 아니었는데, 청와대 대변인 생활 두 달도 안 되어 어느덧 새가슴이 되어버렸다. 코로나 비상경제 시국에 대응하기 위한 큰 가닥을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 잡았다. 문 대통령이 밝혔듯 비상경제회의는 ‘논의하고 검토하는 회의가 아니라 결정하고 행동하는 회의체’였다.
비상경제회의는 대통령이 요구한 ‘전례 없는 대책’, ‘안 해본 일’을 찾아나갔다.
--- pp.132~133
문 대통령은 진흙 천지가 된 오이 비닐하우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바닥에 있는 오이를 매만지며 “잘 키웠는데 흙탕물에 빠져서 곤죽이 됐어요”라고 하소연하는 농민에게 문 대통령은 “그러게요. 작물을 다 키워놓고 그랬네요”라며 같이 안타까워했다. 멜론 농가의 피해도 걸으면서 눈으로 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주민들에게 약속했다. “다 키운 오이와 멜론을 한순간에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싶습니다. 지금 가장 바라는 게 신속한 복구 지원일 텐데, 재해 재난에 대비하는 예산은 충분히 비축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최대한 빠르게 집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서울로 돌아온 문 대통령은 다음 날인 8월 13일, 특별재난지역으로 하동군과 구례군 등 11곳을 선포했다. 속도 있는 지원을 하겠다고 한 약속을 바로 이행했다. 나아가 문 대통령은 “특별재난지역을 선정할 때 시군 단위로 여건이 안 되면, 읍면동 단위까지 세부적으로 지정하는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A시 전체를 특별재난지역으로 하기 어렵다면 A시 안에서 피해를 입은 B동이나 C동을 지정하라는 지시였다. 그야말로 문 대통령다운 지시였다. ‘적극 행정이란 이런 것’이었다. 8월 24일에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충북 진천군 진천읍과 백곡면, 전남 광양시 진월면과 다압면 등 36개 읍면동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추가 지정됐다. 읍면동 단위로 특별재난지역이 선포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 pp.216~217
물량 확보 지시에 그치지 않고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 백신 확보전에 뛰어들었다. 문 대통령은 2020년 12월 29일 스테판 방셀 모더나 CEO와 밤 9시 53분부터 10시 20분까지 심야 영상통화를 했다. 언론은 물론 청와대 내부에도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한 일정이었다. 모더나는 당초 한국에 1천만 명분(2천만 도즈)의 백신을 공급키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27분간의 통화에서 문 대통령과 방셀 CEO는 우리나라에 2천만 명분(4천만 도즈)의 백신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당초 잡아놓았던 물량보다 두 배로 늘어났다. (……)방셀 CEO도 “따뜻한 말씀과 우리 백신에 대한 높은 평가에 매우 감사드리며, 조기 공급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방셀 CEO는 특히 “한국 정부가 빠른 계약 체결을 원하면 연내에도 계약이 가능할 것”이라며 “한국 국민에게 희망이 되는 소식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날 문 대통령이 제약회사 CEO와 직접 통화하면서 우리나라가 확보한 백신은 4,400만 명분에서 5,600만 명분?모더나 외에 얀센과의 협상으로 200만 명분 백신 추가 확보?으로 늘어났다.
--- pp.287~288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은 한국 정부에 2020년의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분담금을 50억 달러(약 6조 원) 가까이 늘리라고 요구했다. …… 2019년은 1조389억 원이었는데, 5배 가까이 올려달라고 한 것이다. (……) 문 대통령은 아예 ‘협상 중단’을 지시해버렸다. 미국을 상대로 말이다. 문 대통령은 주한미군 노동자 문제에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미국 측에 알리고, 협상 장기화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몰려서 협상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도 줬다. 데드라인은…… 지워버렸다. 해가 넘어가도 문 대통령은 초조해하거나 뒷걸음질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당혹스러웠을 것 같다. (……)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결국 바이든 정부 출범 후 타결이 됐다. 무려 1년 6개월만이었다. 5년짜리 장기합의였다. …… 올해 2021년 한국 측 분담금은 13.9퍼센트 인상하기로 했다. 하지만 앞으로 4년 동안은 한국의 국방 예산 인상률에 준해서 올린다. 2022년 분담금의 경우 올해 국방비 증가율인 5.4퍼센트다. 다만 주한미군이 고용한 한국인 노동자 임금의 85퍼센트 이상을 반드시 분담금에서 쓰도록 했다. 그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중 미군이 한국에서 고용하는 노동자의 인건비로 쓰는 건 약 40퍼센트였다. 그런데 85퍼센트로 두 배 이상 올라가도록 명문화했으니 분담금 증액분의 상당 부분은 다시 국내로 환원된다. 한미 양측이 협상 공백이 생기면 임금 선先지급을 우리 노동자에게 하도록 명문화한 것도 성과였다.
--- pp.321~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