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민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날부터 나는 날마다 보민이를 새로이 발견한다. 어제의 발견이 오늘의 발견에 묻혀 사라지는 게 아쉬워 ‘오늘의 보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걸 볼 수 있을까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더 눈여겨보고, 더 귀 기울여 듣고, 더 아이를 꼭 안아 보았다. 날마다 만나는 이 아이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pp.6-7 「두 줄」
보민이가 7일 만에 똥을 눴다. 남의 똥을 두 손 모아 기다리긴 난생처음이다.
‘난생처음’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
이 아이에게 ‘난생처음’인 일들은 내게도 모두 ‘난생처음’이다.
나는 엄마로, 너는 자식으로,
우리, 한날한시 같이 태어난 게 맞구나.
---p.11 「난생처음」
버스 타려고
보민이 안고 서 있는데
옆에 있던 할머니 두 분
웃으며 이야기한다.
“니는 다시 아 키우라면 키우겠나?”
“하이고, 나는 인자 몬 한다, 영감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래도 저래 쪼그만 거 키우는 저 때가 봄날인기라.”
“그르게.”
지금 우리는,
서로의
봄날이다.
---p.35 「봄날」
“엄마, 우리 첫 번째 엄마가 나 햄버거랑 핫도그 넣은 밥 해 줬어.”
“첫 번째 엄마는 이거 하게 해 줬는데. 내가 옛날에는 첫 번째 엄마랑 살았거든. 그때 참 좋았는데.”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할 때 여지없이 등장하는, 보민이 ‘첫 번째 엄마’는 보민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엄마다. 이 첫 번째 엄마는 인심도 좋고, 살림도 넉넉하고, 마음은 또 어찌나 너그러운지 보민이가 원하는 건 무조건 다 하게 해 준단다.
하도 첫 번째 엄마를 자랑하길래, 어느 날 보민이에게 물었다.
“보민아, 그러면 나는 도대체 몇 번째 엄마야?”
“엄마? 음, 여섯 번째? 김구민 엄마는 여섯 번째?”
---pp.92-93 「여섯 번째 엄마」
지난해 보민이 아토피가 심해진 후로 병보다 더 힘든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대놓고 혀를 차는 사람부터 시작해, 징그럽다고 수군대는 사람, 아토피에 좋은 제품을 소개해 주겠다며 무턱대고 잡아끄는 사람, 첫 만남부터 기도해 주겠다며 덥석 두 손을 잡는 사람들까지, 우리를 구제해 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하루라도 편히 있고 싶었다.
---p.125 「벽보다 창」
보민이와 처음 여기 온 날부터 할머니는 보민이를 보고 단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가여워하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할머니뿐인가, 이 동네에 있는 동안 누구도 보민일 다시 돌아보거나 손가락으로 볼을 가리키지 않았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보민이 상처보다 더 험한 꼴로 살았다. 남들이야 어떻게든 말할 수 있지만, 엄마인 내가 그러면 안 되었다.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웠던 걸까, 보민이가 부끄러웠던 걸까, 아이에게 아무것도 못 해 주는 내가 싫었던 걸까, 나는 어디서든 숨기 바빴다.
… 아픈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기 결대로 살아갈 수 있게 곁에서 응원해 온 할머니와 이 마을 사람들을 보며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이 말한 ‘상냥함’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상냥함,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상냥함이야말로 지금 우리 둘에게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
숨으려 찾아든 곳인데, 날마다 여기저기에서 숨지 말고 나오라고 손 내밀어 준다.
---pp.132-133 「상냥한 손길」
스무 살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나에게는 늘 ‘나만의 방’이 있었다. 밖에서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 방 안에서만큼은 편안하게 쉬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나는 이 방의 존재를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보민이 아토피와 뒤엉켜 싸우며 보낸 수많은 밤 속에서, 새삼 이 방이 다시 생각났다. 그리고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 방에 오늘 나는 간다. 읽고 싶었던 책 두 권과 컵라면 하나를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가는 길에 통닭 한 마리를 샀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편안한 소파와 침대, 멋진 야경이 나를 맞아 준다.
…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조용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몽글몽글한 행복함이 눈 밑까지 차오른다. 이게 뭐라고, 이 하룻밤이면 되는데.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게 무언지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나를 몰아붙이며 살고 있었구나. 나만의 침대, 나만의 소파, 나만의 커피, 나만의 책…. 모두 한 번씩 쓸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만의 나’를 꼭 안아 준 뒤 방을 나왔다.
모든 것이 충분한 하루였다.
---pp.136-137 「나만의 방」
돌이켜 보면 걷는 것, 숟가락질, 젓가락질, 앉아서 오줌 누는 법, 똥 누고 닦는 것까지 어디 말로 가르쳤나. 어찌하는지 보여 준 뒤엔 저 혼자 부단히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자라는 동안 익히는 것들은 뭐 하나 얻어걸리거나 공짜인 게 없다. 하다못해 풍선껌 부는 일도.
네 몫이다, 보민.
---p.210 「네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