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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이방인들

시베리아의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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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9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404g | 140*210*19mm
ISBN13 9788970125213
ISBN10 897012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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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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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카믄…… 당신은 내 동지가 될 수 있습네까?”
페치카 안에서 탁, 탁, 장작 타는 소리와 미세하지만 주전자에서 물이 끓으며 크으윽…… 쉬이이…… 소리가 공간을 떠돌았다. 빅토르는 손바닥에 땀이 나서 허벅지에 문지르며 천천히 엉덩이를 의자에 도로 내려놓았다.
“기꺼이 친구가 되겠습니다.”
빅토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p.13

극동을 지나 중앙 시베리아로 들어갈수록 백야로 해가 졌어도 세상이 희뿌옇게 흐려질 뿐이었다. 저녁과 새벽이 공존하고 있었다. 기홍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루 이십사 시간도 우리하고 다르고 새벽이 저녁 같구, 저녁 이 새벽 같구, 자꾸 낯설어지는구만.”
철길을 따라 늘어선 자작나무 잎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빛에 반사된 물결처럼 반짝거렸다. 귀를 기울이면 자르르 자갈 굴러가는 소리와 비슷했다.
--- p.65

“지식인이라면 체제에 문제 제기하는 거, 이 아바지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남들은 다 옳다고 해도 옳지 않은 거를 발견했다믄, 다시 들여다보는 눈과 마음을 지녀야 진짜 지식인이 같지. 너는 인민들의 발밑으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외면하지 말고 살피는 진실한 지식인이 돼라. 기카지만 애미나이한테 빠져서 조국과 가족을 배신하려는 행위만은 결코 용서할 수 읎어! 알간?”
--- p.89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경리실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할아버지 사무실의 오른편에만 머물렀다. 위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나무판자 미닫이가 구분해주는 공간이었다. 미닫이는 열 때마다 찌그덕 소리가 났다. 마치 흑백영화 속 학교 교실 문처럼 낡아 있었다. 아버지는 양팔에 토시를 끼고 장부 정리를 하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낮은 목소리로 대성제재소입니다, 라고 전화를 받았다. 까맣던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듬직한 어깨가 굽고 뿔테안경이 은테로 바뀐 모습으로, 당신의 자리는 그 자리라고 여기며 언제나 그 공간으로 스며들어 갔다.
--- p.97

니체는 망각을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했다. 지난 칠 개월의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절대 잊히지 않을 기억이기 때문일까. 지금 잘 견디고 있는가? 아니 잘 버티고 있는가? 지석은 감기와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었다.
--- p.183

인간은 어떤 이념이나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능과 탐욕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노동자들은 순박했으며 천진난만했다. 두뇌도 뛰어났고 생존에 대한 욕구도 강했다. 부소장도 애초에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환경에 의해 방어적이고 타인에게 적대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 p.193

빅토르가 준호에게 말했다.
“형도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잖아!”
준호에게 상체를 바짝 기울이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잖아.”
--- p.204

겨울나무는 물이 없어 단단했고 벌목한 나무를 실어 나르는 길도 얼어 있어서 벌목하기에는 적기였지만 산판에 오래 지낼수록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고갈되었다. 나무는 기막히게 그런 노동자를 찾아내 괴롭히다가 데려갔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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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리 작가가 되살려낸 벌목장의 풍경은 근사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여서 현실 너머의 또 다른 세계인 것만 같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사나운 시베리아의 밀림으로 모여든 젊은이들. 그들은 운명처럼 실패하지만 그 자리에서 새로운 우정이 태어난다. 이 우정이야말로 “아름답지만 실패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서늘한 진실 앞에서 오래도록 눈이 부실 수밖에 없다.
- 손홍규 (소설가)
《시베리아의 이방인들》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생각하도록 하는 근래 보기 힘든 문제작이며 스케일 작은 ‘문단적 소설들’에 지쳐 있는 독자로 하여금 눈 크게 뜨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시원스러운 작품이다. 한국문학은 이렇게도 자신의 살과 뼈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 방민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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