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어둡고, 급진적이며, 논란이 많은 철학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가 가장 어두운 철학자라는 것은 이전까지 인간에게 위로와 안정과 희망을 주었던 모든 것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급진적이라는 것은 수 세기 동안 가장 타당하게 영구적으로 통용되어 왔던 모든 것을 뿌리까지 송두리째 파헤치는 일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논란이 많은 철학자라는 것은 그의 도발적인 철학이 오늘날까지 많은 비판자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만큼 많은 열광적인 추종자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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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 의하면, 누구든지 항상 선하기만 할 수는 없다. 인간은 산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타인을 조금씩이라도 희생시키며, 삶의 가능성을 개척하기도 하고 강제로 약탈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가능성을 발현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니체는 지금까지의 모든 도덕적 가치가 급진적으로 전환되는 것, 즉 ‘옳다/좋다’ 혹은 ‘그르다/나쁘다’의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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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힘에의 의지다. 하지만 이러한 의지는 단순히 충동적인 힘이나 개인의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힘에의 의지는 그야말로 현실 전체의 근본 원리다. 그렇기에 이 의지는 동물과 식물, 심지어는 화학반응에서도 효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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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는 모든 살아있는 것의 근원적 힘이다. 그것은 우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영역 속에서 작동한다. 인간에게는 이 힘에의 의지를 억압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비열한 르상티망 속에서 분출하지 않고, 그가 가진 모든 창조적인 힘을 모으고 발휘하여 자신의 가장 높은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더 높은 유형의 인간, 바로 위버멘쉬의 시작점이자 위버멘쉬로 향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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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회귀의 가르침은 우리가 개인적인 삶을 구상하는 데에도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니체의 생각에 따르면 개인의 윤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 이후의 삶 또한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실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지금 있는바 이대로 나의 실존이 매번 반복될지라도 나는 이 실존의 반복을 정말로 원하고 있는가?
--- p.94
니체는 자신을 위대한 ‘반도덕주의자’, ‘적그리스도’라고 즐겨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낡은 도덕과 기독교를 나약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니체는 절대로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사람들이 더 높은 존재 또는 위버멘쉬로 향하는 길 위에서 자신을 낡은 가치 체계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대신 자기만의 가치와 도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길 원한다, - 새롭고, 한 번뿐이며, 비교 불가능하고, 자기 스스로 입법자가 되며, 창조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
--- p.101
니체의 사유가 오늘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논리적 사유라는 코르셋에 묶여 온몸이 굳어져 있다. 그런 나머지 우리 문화는 매사에 논리적 근거를 요구한다. 우리는 사고의 독재에 사로잡혀 있다. 질서를 잡고 형태를 부여하는 원리가 승리한다. 그러나 각각의 인간은 또한 자기 안에 도취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갖고 있다. 니체는 지금까지 오직 무의식적으로만 작용했던 힘들을 다시 열어 놓으라고 우리에게 강권한다. 자신의 디오니소스적인 움직임을 과도하게 억압하는 사람은 병에 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혹독한 벌은 무엇인가? 겸손이다; 자신의 가장 고유한 욕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 -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부족할 때, 그것은 온갖 종류의 손실로 되돌아온다. 바로 건강, 쾌감, 자부심, 명랑함, 자유, 견고함, 용기와 우정의 손실들로.”
--- p.113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사람은 그 자신 안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