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09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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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36쪽 | 438g | 140*210*20mm |
ISBN13 | 9788954682220 |
ISBN10 | 8954682227 |
발행일 | 2021년 09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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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36쪽 | 438g | 140*210*20mm |
ISBN13 | 9788954682220 |
ISBN10 | 8954682227 |
<와일드 게임>이라는 제목만 봤을 땐,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책 소개를 봤을 땐 당연히 소설인 줄 알았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고 있는 14살의 딸을 깨워서 '내가 네 아빠 친구랑 키스를 했어.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는 고백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책을 읽으며 세상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라는 황정은 작가님의 말을 떠올리면서.
이 책은 회고록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어린 시절 직접 겪은 일을 재구성한 책이다. 앞서 말했던 '자는 딸아이를 깨워서 자신의 불륜을 고백하고, 더 나아가 비밀을 지켜주고 불륜을 도와달라고 하는 엄마'는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하고, 딸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엄마였다. 사실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엄마 말라바는 알코올 의존증이 심해서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말라바의 첫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고, 처음으로 낳은 아이가 2살 무렵 갑작스럽게 질식사했다. 그러다 두 번째 남편 찰스를 만났는데, 찰스는 돈도 많은데다 가정에 충실하고 엄마를 사랑해주며 아이들에게도 친절한, 완벽에 가까운 남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완벽남에게 '건강 문제'가 생기고 만다. 뇌졸중 때문에 신체를 예전처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인공 에이드리엔은 이런 엄마의 심정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던, 어찌 보면 조숙한 딸이었다. 남아 있는 앨범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큰오빠'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주인공은 엄마의 운명을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엄마도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으며, 엄마가 행복하다면 의붓아버지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 것 정도는 눈감아주고 그들이 더욱 마음놓고 진도를 나가도록 돕기로 했다. (덧붙이자면, 책 제목인 '와일드 게임'도 그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요리 칼럼니스트인 말라바가 사냥을 좋아하는 불륜남을 더 자주 만나기 위해 '와일드 게임(야생에서 사냥한 동물)'을 주제로 요리책을 써 보겠다고 한 것이다.) 말라바는 항상 에이드리엔에게 말했다. "우리는 온전한 전체의 반반이야." 에이드리엔은 그 말이 너무나 듣기 좋았고, 자기에게 와서 불륜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는 엄마와의 시간을 학수고대했다.
사실 말라바가 에이드리엔을 그렇게 조숙한 딸로 만들었던 것 같다. 엄마가 아빠의 친구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은, 14살의 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크고 불편한 진실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아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을 법한 나이에 에이드리엔은 거꾸로 엄마의 사랑과 비밀에 매이게 된 것이다.
행복할 자격이 있는 엄마. 아버지의 친구와 바람을 필 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딸이 들어줄 때 가장 행복한 엄마. 그런 엄마를 위해 에이드리엔은 다시 오지 않을 자신의 청춘을 허비해 버렸다. 에이드리엔은 엄마를 동경하고, 심지어 우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엄마를 우선시했다. 엄마의 연애사로 충분했기 때문에, 자신은 그 피끓는 청춘기에 연애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에이드리엔의 청소년기에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엄마의 비밀을 먹고 쑥쑥 자란 그것은 성장을 해 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 같은 것이어서 에이드리엔의 마음을 계속 짓눌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면 중요한 단 하나, 진실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잃는다(84면)"고 했던 말처럼, 에이드리엔은 마침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으면서도 그에게 모든 것(즉, 엄마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한다.
예상 가능하듯이, 에이드리엔의 삶도 평탄하지 않다. 그녀가 결혼한 남자는 엄마의 불륜상대의 입양 아들이다. 엄마와 불륜상대는 순식간에 사돈이 되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 마침 불륜이 표면으로 드러나며 엄마의 연애사도 끝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보통의 엄마라면 이런 순간에 자신의 행동을 크게 반성하며, 딸의 행복한 앞날을 위해 행동을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말라바는 달랐다. 그녀는 불륜상대와 사돈이 된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역이용해, 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자신이 제일 주목받는 여인이 되기로 한다. 이를 위해 에이드리엔이 결혼할 때 물려주기로 했던, 자신이 자기 엄마에게서 받은 휘황찬란한 목걸이를 딸 대신 자기가 건다.
엄마의 부모님이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처럼, 정서적으로 방치된 아이들이 종종 사람 대신 물건에 집착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엄마에게 이 목걸이는 엄마의 사랑을 상징했다. (...)
엄마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내게 주려는 것이었고, 그 생각에 내 심장은 거의 터질 것 같았다.
250면
에이드리엔이 그 목걸이를 받는 순간을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도 모른 채. 아니, 알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말라바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녀에게 딸의 마음이 다치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은 자신의 불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책 전체에서 이 장면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수 있는 결혼식마저 자신을 위한 날로 만들려고 하는 엄마라니. 이런 엄마가 있다니. 우리 엄마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는, 말라바와 정 반대인 엄마이다. 나 역시도 자라나는 내 딸이 행복해진다면 뭐든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이럴 것이기 때문에, 딸의 결혼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채는 말라바가 나에게 던진 충격은 오래 갔다.
또 한 가지. 엄마의 보물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에이드리엔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해 왔는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가슴 벅차고 감동적인 일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동시에 이전에 읽었던 최진영 작가님의 소설 한 구절이 생각났다. '엄마라고 꼭 자식을 사랑해야만 하는 걸까'. 어릴 땐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기에, 내가 받은 모든 것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예전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우리 엄마가 말라바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엄마에게 감사해야지' 정도에서 감상이 멈췄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딸이자 엄마로서 읽은 이 책에서 나는 '친구같은 부모, 친구같은 자식'의 폐해를 발견했다. 예전에 어디선가 친근한 부모는 좋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신의 친구에게 하듯 아이를 대해서는 안된다는 구절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말라바와 에이드리엔을 보고 그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말라바의 마음은 가벼워졌을 지 몰라도,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딸 에이드리엔의 마음은 그의 백배 천배로 무거워졌고 그 무게가 그녀의 여생을 계속해서 짓눌렀기 때문이다.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엄마의 비밀을 자신의 것처럼 지켜주었지만, 그게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은 에이드리엔. 결국 그녀는 "타인의 삶에 빠져볼 때 자신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를 거야(203면)"는 말을 듣고, 수많은 책을 탐독하며 감정과 비밀의 깊은 수렁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신만은 외할머니로부터 말라바를 거쳐 자신에게까지 이어져 온 그 비뚤어진 모녀간의 유대관계를 털어버리고, 자신의 딸에게는 대물림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어린 딸에게 엄마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그 자리를 지켜주겠다고 결심하며.
에이드리엔이 결국에는 치유되었다는 것을 다음의 문장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자라면서 믿었던 것처럼 우리는 온전한 전체의 반반이 아니었다. 엄마는 엄마라는 한 개체였다. 내가 나라는 한 개체이듯. 그리고 나는 내가 엄마처럼 되지 않을 때마다, 더 많이 내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
329면
내 딸도 나와는 독립적인 개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며 행복하길.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책은>
리뷰어클럽 당첨 도서
<저자는>
저 : 에이드리엔 브로더 (Adrienne Brodeur)
전미잡지상을 수상한 『조이트로프: 올스토리』의 공동 제작자로, 영화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함께 출판 이력을 시작했다. 도서 편집자로 일했고, 현재 아스펜 인스티튜트의 프로그램인 아스펜 워즈의 총괄 담당자를 맡고 있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책 읽고 느낀 바>
제니 - 화자이면서 말라바의 딸이자 잭의 전부인. 새로 결혼해 자녀 둘을 낳는다.
말라바- 전남편의 자식을 데리고 찰스와 재혼. 찰스가 죽은 후 벤과 재혼.
찰스 - 재혼한 말라바의 남편.
벤 - 릴리의 남편였고, 릴리가 죽은 후 말라바와 재혼해 20년을 산다.
릴리 - 벤의 아내로 심장병으로 평생을 고생하다 죽기 2년 전 둘의 불륜을 알게 된다.
잭 - 벤과 릴리의 입양아. 제니와 결혼했었으나 자식없이 헤어진다.
프롤로그 중에서
한 번의 거짓말이 다음 거짓말을 낳는다는 격언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속이려면 밀어붙이는 힘과 조심성과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다. 진실을 계속 묻어두려면, 신경써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엄마의 비밀을 묻어두려고 손이든 삽이든 들통이든 뭐든 그 순간 쓸 수 있는 것을 이용해 모래로 덮었다. p14
내 엄마가 첫 번의 결혼에서 오빠 둘과 나를 낳았지만 이혼했다. 공교롭게도 큰아들이 죽었던 날 내가 태어났다. 엄마는 지성미 넘치고 요리 실력이 빼어난 여인. 어떤 재료를 갖다줘도 자신의 오감에 의해 만들어내 모두의 찬사를 받는다. 이 여인이 안정된 심성과 재력을 가진 14살 차이의 남자와 약혼을 했다. 찰스의 이혼이 늦어지다 찰스가 쓰러진다.
열네 살의 나는 이웃의 남자애랑 성에 대해 조금씩 호기심 탐색중이었다. 자고 있던 나를 엄마가 허겁지겁 깨웠다. 벤이 내게 키스를 했다고. 이렇게나 행복한 엄마의 표정을 본 게 얼마만인지. 찰스와 약혼을 한 상태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결혼을 고민해 볼 겨를도 없이 자동으로 진행이 되었고 간병하느라 엄마는 미소를 잃었다. 찰스의 의지에다 엄마의 헌신이 있어서 그나마 생활은 되지만. 성에 대한 호기심보다 엄마를 위한 공범되는게 더 짜릿했던 나.
찰스의 절친인 벤과 릴리 부부는 가까이 살았다. 연상인 릴리는 심장병으로 목소리가 쉬었지만 갖가지 꽃을 가꾸는 현모양처. 벤은 사냥을 하고 에너지 넘치는 남자. 사냥 전리품으로 찰스네서 요리하는 시간을 즐겼다. 말라바는 찰스의 경제력에 편승해 요리 실력을 벤 부부와 함께 하면서 외모도 아름답지만 칼럼도 쓴다. 내 주장으로 책 제목인 와일드 게임 책을 쓰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벤과 함께 한다.
다섯 살쯤 됐을 때, 나는 꽃을 한아름 따서 엄마를 즐겁게 해주기로 했다......찰스의 이혼 과정이 오래 걸려 실의에 빠져 있었는지, 나로서는 결코 알 수 없었다......이유야 어쨌건,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늘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p64
엄마가 여태 받아보지 못했을 가장 예쁜 꽃을 가장 풍성하게 따주겠다고 마음먹고, 나는 부엌용 가위를 움켜쥐고 미션 수행에 나섰다. 우리집 긴 비포장 진입로의 길게 펼쳐진 잡초처럼 자라는 데이지나......엄마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만들기에 딱 좋은 꽃이 우리 사유지를 지나 저쪽 땅 언덕 꼭대기에서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나는 이웃이 무슨 생각을 할지 잠시 생각해보지도 않고, 3분 만에 그 땅을 평정했다. 내가 지나간 길에는 꽃가지에서 잘라낸 줄기가 흔적으로 남았다......
"오, 레니." 엄마가 꽃과 함께 나를 안아올려 아일랜드 식탁에 앉히며 말했다. "넌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야."
엄마는 그게 다른 집 백일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겠지만, 잘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사유재산에 대한 훈계도 없었으며, 이 기회를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가르침이 가능한 순간'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시도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는 꽃병에 꽃을 한 줄기씩 꽂았는데......일주일쯤 지나 그 친구들이 시들기 시작하자, 엄마는 가위를 건네며 나가라는 뜻으로 나를 쿡 찔렀다. 나는 여름 내내 꽃을 한아름씩 따서 집으로 가져왔다. p65~66
에너지 발산 방법은 다르지만 넘친다는 면에서 벤과 말라바는 닮았다. 절친한 친구의 아내이자 남편의 절친한 친구인 둘의 불륜에 나를 공범으로 끌어들였다. 고작 열네 살이었지만 엄마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참여했다. 의붓아버지를 둔 채로 엄마의 부엌에서 나누는 애정 담긴 대화. 음식 재료를 건네주며 스치는 손끝. 둘을 위해 어색한 순간에선 '건강 산책' 을 제안해 셋이 나온 후엔 빠져줬다. 찰스와 릴리는 정녕 몰랐을까? 나는 두고 두고 의문을 가졌었다.
나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엄마를 기쁘게 해줄지만 생각했다. 내겐 윤리 기준이 없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어떤 힘이 엄마의 모습을 형성하고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는지 이해했고, 우리 두 사람이 타인에게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인식했다. 당시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 알았고, 그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했다. 내가 열네 살일 때부터 엄마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은 벤 사우더였다. 그 사실과 함께 내 거짓말은 어두운 국면을 맞았다. 말하지 않는 형태의 거짓말이 책임지고 지키는 형태의 거짓말이 되었다. 선택으로 시작한 것이 습관이 되었고, 내 양심의 근육 기억이 되었다. p67
내가 한 그 모든 위험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말라바의 불륜은 여전히 내 가슴을 뛰게 하고 강한 흥분을 일으켰다. 엄마의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이, 길을 떠나온 내게 일어난 어떤 일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게다가 내가 엄마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엄마는 상황이 나빠지면 내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순간을 위해 살았다. 말라바에 관한 한 나는 여전히 공모자이자, 엄마가 뛰쳐나오는 순간 언제라도 차를 출발시킬 수 있게 도주차량의 운전대를 잡은 채 은행 밖에서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는 공범자였다. p119
"기억해. 우리는 전체의 반반이야, 난 너 없이는 완전하지 않아. 내 가장 좋은 친구가 돌아와주면 좋겠어." p121
"자, 달링." 벤이 엄마에게 과장된 어투로 말했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바닷가재?줄무늬농어?홍합?백합? 언제나처럼 당신이 원하는 걸 대령합죠."
나는 이런 대담한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찰스를 관찰했다. 벤이 늘 이렇게 대놓고 수작을 부렸나? 의붓아버지의 왼쪽 입가에 어중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 시선이 마주쳤고, 찰스가 내 시선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아니면 적어도 의심한다는 것을. 그가 갑자기 아래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까? p132
" 네 어머니는 그냥 외로우신 거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라바는 거의 매주 주말에 저녁 파티를 했다. 두 남자를 가지고 저글링을 한 게 벌써 여러 해였다. "엄마는 외롭지 않아." 내가 말했다.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키라가 말했다.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와 상관없어. 누군가와 진정한 연결감을 느끼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지. 그리고 자기가 자기 자신일 수 있는지 없는지와 관련된 거고."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라바가 말라바이면서 말라바가 아니다?
"무슨 뜻인지 넌도 알 거야." 키라가 덧붙여 설명했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찾아오지." p170
나는 찰스가 살아서 그 헤드라인, 그가 오랫동안 최후를 궁금해하던 해적선의 증거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의붓아버지는 내게 잘해주기만 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그의 유머와 너그러움이 집안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다. 나는 고통의 담요를 두른 채 겨울을 났다. 사람들을 피했고, 매일 오래 잠을 잤으며, 끊임없이 먹어서 두꺼운 보호막을 만들었다.
나는 엄마의 맹렬한 목적을 따르겠다고 서약한 오래전 그해 여름에,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의 흐름 너머에 무엇이 잠복하고 있는지, 바늘구멍만한 전조도, 어두운 암시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찰스가 죽고 난 지금 그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도 친절했으나, 나는 그 친절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 엄마의 불륜을 돕기로 동의했을 때 내가 돌진한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래톱에 좌초된 채 수면 아래에서 보여지는 상태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막는 데 지쳐 있었다. p177~178
처음에 나는 열네 살 때부터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데서 해방감을 느꼈다. 오랜 시간 끝에, 엄마와 벤의 불륜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줄타기에서 마침내 내 역할이 끝난 것이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접시를 돌리고 있었고, 마침내 모든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나니 거의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했다.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말라바는 내게 세이렌과 같은 존재라서 나를 또다시 홀릴 수 있었다. 물론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내 결혼식 날 밤 금지된 춤을 추는 동안 벤이 엄마에게 어떤 말을 속삭였는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가 만나자고 했을까? 엄마에게 기다려달라고 했을까? 나는 벌써 말라바와 우리의 비밀이 몹시 그리웠다. 엄마의 발걸음을 뒤따라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것 없이 나아가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p208~209
나는 '허영의 시장'에 나오는 주인공 베키 샤프를 생각했다. 날것 그대로의 야망을 위해 비방을 일삼는 여자. 이 소설에 대한 독서 카드에는 다음 부분을 옮겨놓았다. "우리 중 이 세상에서 행복한 자는 누구인가?우리 중 소망을 이루는 자는 누구인가?"그 옆에는 말라바라고 적혀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게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나에 대개 그런 말은 아예 불가능했다. 내가 다음으로 옮겨놓은 인용문은 이것이었다. "모두의 삶에는 아무것 아닌 것 같아도, 그럼에도 남은 인생 전부에 영향을 미치는 짧은 시기가 있지 않은가?" 그 옆에 나는 이렇게 써놓았다. 키스. p275~276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합법적일 수 있는 관계를 12년 넘게 빼았겼으니, 엄마는 충분히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벤은, 릴리의 심장병을 2년 동안 견딘 터라, 말라바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데 열심이었다. 예순하나와 일흔다섯인 엄마와 벤은 결혼식 날짜를 9월 초순으로 잡았다. 릴리가 죽고 아홉 달 반 만이었다. p285
그들의 끊임없는 관심사는 백악관에서 벌어진 클린턴 스캔들의 전개였다. 말라바는 유지를 입증하는, 모니카 르윈스키의 푸른 드레스에 묻은 얼룩을 분석했다. 벤은 빌 클린턴의 끝없는 성욕에 대해 큰소리로 떠들었다. 두 사람 다 힐러리의 흉측한 야망을 헐뜰었다. 그들은 남편이 바람피운 건 그녀 책임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화나는 게 뭔지 알아?" 벤이 역겹다는 듯이 말했다.
말라바는 포크를 내려놓고 남편에게 오롯이 집중했다.
"첼시(힐러리와 클린턴의 딸)"가 잘 지내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는 사실. 잠시라도 말이지." 의붓아버지가 말했다.
엄마가 고개를 내둘렀다.
잭이 식탁 밑으로 내 무릎을 꽉 잡았고, 우리는 서로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 부모의 불륜에서 잭이 가장 소름 끼치게 생각한 게 바로 이런 점이었다. 각자의 배우자를 배신한 것도 아니고, 교묘하게 속인 것도 아니고, 그들의 관계를 더 편하게 이어가려고 나를 이용한 뒤 내게 일으킨 고통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점.
잭의 마음의 문이 쾅 닫혔다.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우리 부모가 저지른 불륜을 용서했고 급하게 진행한 결혼도 참았지만, 이건 너무한 것이었다.
"제가 가장 화나는 게 뭔지 아세요? 그가 날씨를 묻듯 차분하게 말했다. 그가 냅킨을 접어 접시와 나란히 놓았다. "위선." 그러고는 일어서서 고개를 끄덕여 내게 작별인사를 한 뒤 식탁과 그들의 집을 영원히 떠났다. 잭은 그뒤로도 아버지를 계속 찾아갔지만, 내가 아는 한 부모님 집에 머무른 적은 없고, 어떻게든 말라바를 피했다. p305~306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엄마가 나를 사랑한 건 알아." 말라바가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골랐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한 것만큼 많이 는 아니었어." p325
"엄마가 엄마의 어머니에 대해 방금 말씀하신 거요." 내가 비난하는 투 없이 말했다. "그게 정확히 제가 엄마에게 느끼는 거에요. 엄마가 저를 사랑하는 건 알지만, 엄마가 엄마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p326
세상에 이런 일이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만났다. 단순히 불륜이 주제가 아닌 불륜이 매개체가 된 모녀의 심리가 그려진다. 특이한 엄마를 둔 딸의 내적 상해가 적나라하다. 말라바라는 엄마는 딸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나, 자신이 항상 먼저였다. 내가 충족되기 위해선 딸이 희생을 하는 건 당연하고, 그러는 과정에 흡족할 때면 딸에게 애정을 표현한다. 그 애정이 너무 달콤하고 강렬해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기 위한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게 되고, 그런 딸에게 잘한다, 옳지 식의 반응을 보이는 엄마.
그런 엄마 말라바도 자신의 엄마에게 똑같은 방식의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시집살이 해 본 시어머니가 시집살이 시키는 것처럼.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바늘도둑이 소도둑된다는 속담은 일찍부터 못된 싹은 싹둑 자르라. 도덕적 기준이나 관점은 세뇌시키듯 양육해야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거늘 말라바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습득한대로 자신의 어머니식으로 자신의 딸에게 군림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상처를 받았을텐데, 거기서 사색적 접근으로 고리를 끊지 못하고 대물림하는 결과를 낳았다.
딸 역시 외할머니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엄마의 방식에 조련된 유년시절이 있었다. 번민하고 고뇌하면서 자신을 무기력하게 지배하는게 뭔지. 죽을만치 우울증을 경험하고 다행히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과감하게 끊어낸다. 그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이 3대를 간다고 했다. 무의식중에 습득한 정신이기에 알지 못하는 새 똑같이 행한다. 싫어하면서 안하는 사람과 싫어하면서 어느새 똑같이 하는 사람. 제니는 말라바와의 고리를 끊고 자신의 자녀에게 자신과는 다른 유년시절을 선사한다.
이 책은 참으로 흥미롭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섬세한 심리를 따라가게 한다. 쉽게 읽었지만 피력해내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내가 읽은 느낌을 어떻게 전달해야 독자가 근접하게 이해하려나 고민하다가 많은 부분을 옮겨보았다. 잘 읽어놓고도 써지지 않는 글은 힘겹다. 기한을 넘겼음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은 곤혹스럽다. 휴무인 오늘 하루를 오롯이 이 리뷰에 매달렸다. 끝내는 내 식의 리뷰를 완성하고 나니 숙제끝. 오래 남을 책이다.
불륜이라는 소재도 흥미를 유발하지만 불륜을 둘러싸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모른체 무조건적인 희생을 한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조차 모른채 억눌린 감정은 안정된 결혼생활이 이어지면서 무감정이 된다. 의붓아버지의 입양한 아들이 남편이 된 상황. 의붓오빠이기도 한 남편. 헤어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과정에 많은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무너지고 침잠하다가 결국은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 마침내 엄마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게 되면서 자존감 회복이 되고 엄마와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자녀에게 준다. 지극히 따스하고 밝은 남편의 가정을 보면서 자신도 동화되는 삶이 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