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영화를 대중 철학으로 승화시킨 역작이다. 저자의 전작인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에서 형성한 이론과 사상을 영화 철학으로 녹여냈다. 사회구성체의 생산양식과 통치양식, 개인구성체의 생활양식과 주체양식이라는 네 가지 실존 양식과, 어포던스, 미메시스, 오토포이에시스라는 세 가지 인지생태학적 역량을 결합해 영화철학의 특이점을 이룩했다. 영화에서 미분해낸 개인구성체는 다시 사회구성체로 적분된다.
현실과 영화와 대중의 역동적인 관계를 이보다 더 정교하고 심오하게 포착할 수 있을까. 이 책에는 대중이 영화를 통해 만드는 새로운 역사가 기술된다. 역사와 미래가 선택되고 영화가 시뮬레이션하며 다시 역사가 만들어지는 의식적·사회적 과정들이 섬세하게 탐구된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그 역사에 깃들어 있는, ‘나 자신을 포함한 대중이 암묵적으로 원하고 분투하고 꿈을 키우는 대중의 철학’을 찾아내 ‘현실의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로 제시한다.
천만 영화를 분석하는 곳에서 독자는 사회과학적·예술적·철학적·뇌과학적 메타버스를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여행을 위한 친절한 지도도 마련되어 있다. 인공지능 자본주의가 본격화될 2020년대에 꼭 읽어야 할 책이며, 영화를 보는 나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 정병기 (영남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시인)
급변하는 우리의 환경과 매체의 생태계로 인해 영화의 종말이 논의되는 요즘이다. 더 이상 극장을 가지 않는 파편화된 관람 유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불/가능성으로 해석되며 영화가 필연적으로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종말’이란 단어에 기입된 부정적인 인식이 반영하고 있듯, 영화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로 (Cinema, Film, Movie, 그 무엇이 되었든)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종식을 고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변하는 환경 속에서 도저히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뒤로한 채 저물어가는 해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심광현의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는 이러한 질문에 적절한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가 보기에 영화는 대중의 집단 무의식이 기입된?예술 장치를?넘어서서 한 개인의 의식 체계를 혁명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저자는 정신분석과?역사지리-인지 생태학,?뇌 과학과 시스템 이론, 철학과 영화이론을 경유한다. 저자가 펼쳐낸 방대한 지도 속을 거닐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화 내에서 작동하는 역동적 힘과 만나게 된다. 특히 미국과 중국, 인도 다음으로 자국 영화의 비율이 가장 높은 한국의 경우, 천만이 넘는 관객을 수용한 대중영화들은 그 자체로 징후적이며 선험적이다. 저자는 이 작품들을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 위치한 작인으로서?역사화하고?이를 통해 한국의 집단 무의식을 들여다본다. 한국 대중영화가 지닌 내적 힘을 발견하고 이론화 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해볼만 성과다.
영화 비평/연구가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는 시대 속에서 심광현의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는 새로운 영감의 지평을 열어주며 또 다른 도전을 제시한다. 과연 우리는 영화의 내적 가치들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사유해왔는가? 영화가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왔는가? 무엇보다 손쉽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던 대중영화들 속에 내재된 가치들을 얼마나 단순하게 비평해왔는가? 우리가 간과해왔던 영화를 둘러싼 많은 담론들이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를 통해서 새롭게 부활하길 기대해본다.
- 이동윤 (영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비판적 문화이론가의 대중영화 옹호론
이 책은 그동안 융합 인문학의 선구적 시도를 통해 사회문제를 통찰하고자 했던 심광현 선생이 그간의 이론적 연구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20년 전 선생의 제자로서 영상이론에 대해 공부할 때도 선생의 궁극적 시선은 사회적 실천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별 영화작품에 대해선 단편적인 사유 밖에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당대의 문화이론가인 선생은 한국의 대중영화, 그것도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영화산업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로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구와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스페인 영화로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한 편도 없다 (950만 명을 동원한 영화가 지금까지의 기록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무려 19편이나 된다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특수한 한국적 맥락이 자리 잡고 있음은 틀림없다. 이 책은 대중영화의 철학적 효용론을 바탕으로 ‘천만 영화’에 담긴 2000년대 한국 사회의 대중적 무의식을 탐사한다.
영화가 무의식의 발현인 꿈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현대 영화이론의 가장 중요한 가지 중의 하나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마음에 작동하는지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상징계 개념으로 설명해 냈다. 심광현 선생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의 인지생태학적 관점과 2000년대 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여 대중영화의 작동기제 뿐만 아니라 천만 영화의 문화정치를 밝히고자 한다.
무엇보다 비판적 문화이론가인 선생이 2000년대의 대중영화를 대중의 철학적 사유의 장(場)으로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놀랍다. 그것은 사변적 철학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중과 점차 유리되면서 일상 속의 사색이 그 역할을 대신 맡을 수밖에 없는데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잠시나마 삶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대중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에 지친 대중들에게 영화는 꿈과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적인 소원 성취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중영화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2000년대 한국에서 두드러진 ‘천만 영화’ 현상이다.
물론 한국의 ‘천만 영화’ 현상이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제작, 배급 상영을 장악한 대기업 영화의 독과점 흥행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대중영화를 통한 카타르시스의 경험이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대중영화가 대중의 무의식을 왜곡된 방식으로 연결하여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도록 유도할 수 있고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해 왔음을 지적한다. 다만 할리우드의 SF 영화들은 현란한 기술 변화의 시대에 개인들에게 잠재된 역량을 끌어올려 소원 성취의 꿈을 시뮬레이션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천만 영화’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2000년대 한국 시장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외국 영화들의 대부분이 SF-판타지물이다.
3부에서는 이 책의 공저자가 앞에서 논의된, 대중의 철학적 성찰의 항로로 기능해 온 ‘천만 영화’를 실제로 분석하고 있다. 이론적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3부의 내용이 친숙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1,2부와 다소 이질감은 있지만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이 책을 더욱 다성적(polyphonic)으로 만든다.
돌이켜보면 심광현 선생의 연구 궤적은 일관되게 문화혁신을 통한 사회변화라는 주제에 수렴되어 있었다. 소장학자 시절 진보적 문화이론의 토대를 세우는 작업과 함께 문화산업과 정책에 대해서도 발언하던 선생은, 어느덧 노교수가 되었지만 여전히 치열하게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며 문화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서 한국인의 일상을 함께 하는 대중영화의 순기능을 이론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대중서이면서도 충분한 학술적 가치를 갖는다.
- 임호준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