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사회에 선 기독교
오늘날 사회에서 사람들이 맺는 관계는 다양하며, 그만큼 사회를 보는 관점도 다양하게 나타나 공존하고 있다. 공존하는 관점들은 공론장에서 경쟁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서로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유의 강한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다양한 관점을 대하며 어떠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어떤 그리스도인은 다원주의를 용인하는 것은 그대로 상대주의를 용인하는 것이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는 이에 반응해, 기독교는 본디 배타적이므로 아예 공론장에서 빠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리처드 마우와 산더 흐리피운은 현대 사회의 다원성과 기독교의 관계를 고민해 온 기독교 철학자로서,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사회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일종의 다원주의 설명서를 집필했다. 두 저자는 기독교가 다원주의를 충분히 긍정하는 가운데 사회 속에서도 유의미하게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원주의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기독교
마우와 흐리피운은 한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다원주의라는 현실 및 그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가치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두 저자는 이러한 다양성이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통해 구현한 현실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선하게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현실이 주는 함의는 명확하다. 다양성을 제대로 인정할 때라야 포괄적인 기독교적 공공선의 추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다른 한편에서, 두 저자는 공론장에서 종교가 설 자리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공론장은 전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곳이 아니라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두고 각축이 벌어지는 곳으로서, 종교 역시 그 안에서 ‘공적 삶’에 기여하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우와 흐리피운은 개혁주의 기독교 철학자라는 입장에서 존 롤스, 로버트 벨라, 피터 버거,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리처드 세넷, 마이클 노박, 리처드 뉴하우스, 맥스 스택하우스, 레슬리 뉴비긴 등 정치학, 사회학, 신학 분야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논한 다양한 학자의 논의를 다루며 기독교의 자리를 정립하려 한다. 네덜란드 개혁파 배경을 가진 저자들답게, 두 사람은 기독교가 삶의 다양성과 포괄적인 통일성이라는 두 측면을 고루 긍정하는 종교이며 결국 이를 통해 좋은 삶을 증진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말한다.
두 저자는 다원성 자체를 무조건 긍정하기보다는 다원성이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을 부각하려 한다. 그리하여 다원주의를 방향적?연합적?맥락적 측면에서 분류하고 각 측면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다원주의를 세밀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물론 도식화된 분류는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지만, 두 저자는 이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작업이 현대의 다양성 속에서 가치의 혼란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지형도로서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책을 집필했다.
겸손한 확신을 지닌 기독교
두 저자는 기독교 복음이 사회를 변혁하는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저자들이 취하는 태도는 자신감보다는 겸손이다. 이는 저자들이 기독교 복음의 큰 메시지를 확고히 믿고 있음에도, 그 메시지에 기반한 윤리를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동안 세우는 실천적 기준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저자들은 깊이 인정한다. 역사 속에서 신앙을 근거로 한 불관용이 어떠한 스캔들로 불거졌는지 생각해 본다면, 저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세기 말엽에 이 책이 나온 이후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다루는 논의가 더 전개되었지만, 포괄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공론장 속 종교의 자리를 논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태도를 제시한 이 책의 시의성은 여전하다. 한국어판에는 원서 출간 이후 저자들이 쓴 글이 두 편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 하나는 이 책에 날카로운 비평을 제기한 요리스 판 에이나튼에게 답변한 내용이다. 거기서 두 저자는 “우리의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요리스 판 에이나튼과 같은 비판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지면들을 통해서 수행된 것과 같은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 이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과도한 종교적 확신이 몰이해와 증오로 이어지고 기독교를 사회에서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저자들과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 이 책이 그런 태도를 함양하는 데 일조하여 기독교가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종교로 존재하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독자 대상
- 복음이라는 진리가 다양한 가치를 어떻게 마주하는지 고민하는 독자
- 다원주의 사회 속 기독교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독자
-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활동하는 그리스도인
- 기독교는 오늘날 무의미한 종교가 아닐까 고민하는 독자
-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