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장(葬)에서 운위된 ‘예’는 주권자와 법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정치권위의 본질을 왜곡한다. 특히 ‘예의를 지키라’는 말은 법적 책임에 이어 정치적 책임의 문제를 은폐함으로써 민주적 정치권위를 권위주의로 둔갑시킨다. 서울특별시장은 주권자와 법의 함수를 오작동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주권자와 법의 온전한 관계는 무엇일까? 민주적 권위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이 글은 정치권위가 질서의 중지를 거부할 때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문제를 다룬다. 바로 정치권위를 지닌 주권자의 죽음이다. --- 「조무원, 「왕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중에서
당시 우세했던 의견은 딸에게 일부러라도 ‘집안일’을 가르치지 않으려 하는데, 그런 일이 시장에서 얼마로 해결될 수 있는지 계산해 보면 커리어를 쌓아 고임금 노동자가 되었을 때 개인 차원에서 금세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돌봄을 시장에 떠넘긴 채 일부 여성만 승자가 되는 것이 정말 페미니즘의 해답이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봄은 누군가가 그만둔다고 해서 필요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고, 돌봄 시장은 이미 성별화되어 더 취약한 여성에게 저임금 일자리가 전가될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돌봄 윤리가 고려되는 더 나은 관계망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을 권리는 지불 능력이 있는 여성 개인이 아닌 모든 여성에게 있다. --- 「홍혜은, 「서로 돌보는 법을 알아가기」」중에서
우리는 홀로 꼿꼿이 서 있는 단독자가 아니라 타자에게 기꺼이 몸을 기울이는 존재의 권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돌보는 일과 활동, 보살피고 살리는 일에 관한 지식과 그 쓰임에 충분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을까? 카바레로가 제시한 부성과 모성의 대립은 물론 모성을 여성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혹은 돌봄을 여성의 일로 여기는 것과는 매우 다른 접근이다. (……) 경사의 상징계는 대상을 향해 기울어지는 관계성에 토대를 둔다. 아픈 사람을 들여다보든, 나무를 매만지든,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보든,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에 몸은 대상을 향해 기울어진다. --- 「서보경, 「살리는 일의 권위」」중에서
‘좋은 연극’에 대한 구성원들의 합의가 달라지면서, 미학적 완성도를 제일의 목적으로 삼던 공연 제작자들은 이제 안전과 존중이라는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연극의 권위를 담당했던 주체들에게도 새로운 능력이 필요해졌다. 단적으로 말하면 극작가에게는 정치적 올바름이, 연출가에게는 돌봄의 능력이, 평론가에게는 다양한 감수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
실험적인 시도와 배우의 안전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어떤 가치를 우선할지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결부된다. 미학적 전문가로 공인되었던 연출가가 안전 관리자로서의 적합성 혹은 전문성도 공인받아야 하는 순간인 셈이다. 이런 때 카리스마적 권위는 딱히 소용이 없다. --- 「정진새, 「거장이 처벌받은 후」」중에서
지금의 비평 담론은 특정 플랫폼에 특별히 의지하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망으로 존재하며, 망을 구성하는 유저들의 기본적인 관심사와 스탯이 모두 제각각으로 상이하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지형은 계와 계를 넘나들려다가 ‘더 큰 계’를 생성하게 되는 시행착오보다 오히려 더 리좀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전적 분과들을 묶어 사후적으로 역사를 짜 맞추는 겸손한 역사학자를 자처하는 대신, 계나 베이스캠프 따위의 자의식 없이 끊임없는 핑퐁 작용 사이에서 온갖 사유들을 마구잡이로 링크하는 난장 말이다. --- 「정경담, 「권위에서 탈출하는 길」」중에서
우리 동아시아인들의 머릿속에는 두 아버지가 사는 셈이다. 하나는 미국이 대표하는 자유민주주의 담론을 체화하도록 명령하는 서구문명의 아버지, 또 하나는 가국천하(家國天下)의 유교이념을 내재화한 중화문명의 아버지다. 현재 시점에서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에게는 그래도 아버지의 위계가 분명하니 큰 문제가 없다. 즉 미국 아버지를 따르면 된다. 그런데 중국인들도 그럴까? 만일 두 아버지의 언어가 충돌하는 가운데 이 위계가 엎치락뒤치락한다면, 이 사람 혹은 이 사회는 어떤 히스테리를 보이게 될까?
--- 「김유익, 「중국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중에서
“지방대는, 아니 지잡대는 시국선언을 하지 말랍니다. (……)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관심받으려고 하지 말랍니다. 허탈했습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졌습니다. 조용히, 숨어 있던 의심이 커져 갔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한 애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건가?”(○○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2016년 11월 1일)
2016년 시국선언 때의 일이다. 나는 어느 지방대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려진 이 질문을 시작으로 시국선언한 지방대학생을 만났다. 시국선언의 ‘자격’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실명으로 자신을 드러낸 그들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불안, 갈등 속에서도 자기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선언 후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되겠다며” 제 일상과 삶을 변화시켰다.
--- 「권수빈, 「지방청년은 말할 수 있는가?」」중에서
공부와 대학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수업 중 쉬는 시간에 교과서를 들고 담당 교수자에게 질문을 했던 20대 초반의 모습이다. 당시 강좌 제목과 질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긴장했던 마음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글자지식이 갖는 신성하면서도 파괴적인 힘에 대한 경외심, 암기식의 공부가 아닌 질문하고 사유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막연한 설렘,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나온 교수자의 권위에 대한 긴장이 버무려진 상황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 이 글에서는 지식생산의 중요 장인 대학을 중심으로 지식과 연구자의 자세에 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는 어떤 지식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라는 문제를 늘 고민해야 하는 연구자 정체성에서 비롯된 질문이자 교수자로서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 「김미덕, 「대학조직과 연구의 원칙」」중에서
2021년 초 방영된 EBS 다큐멘터리 「당신의 문해력」은 다소 충격적인 장면들을 보여 준다. 학생들은 ‘가제(假題)’ 나 ‘난(亂)’처럼 수업에 사용되는 기본적인 어휘의 뜻을 몰라서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문장 독해를 못 해서 문제를 풀지 못하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은 ‘문해력 테스트’를 제시함으로써 많은 시청자들의 문해력이 높지 않다는 충격적인 문제 상황을 공동체 전체에게 확인시켰다. (……)
교사이자 미디어 연구자인 나에게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이뤄져 온 문해력에 대한 논의를 퇴행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문해력」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휘와 문장의 뜻을 파악하는 단순한 ‘읽기(reading)’ 능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해력에 대한 복잡한 교육적 논의를 개인의 학습 및 평가와 관련된 기능적 문제로 환원하고, ‘문맹’의 공포를 환기하여 21세기에도 인쇄문화의 권위가 여전함을 확인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박유신, 「당신을 위한 문해력」」중에서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외국의 사례를 분석하고 발표하다가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고 무기력증에 빠져들 때가 있다. 지역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21년 여름 기후위기 부산비상행동 차원에서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2동 에너지전환마을을 방문했다. ‘에너지 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곳 활동가들은 앞으로 마을의 태양광 자원을 조사하고, 집에서 쓰는 온실가스 사용량을 점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을 활동가의 태평함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 「박상현, 「우리가 원하는 기후행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