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55도 이북에 정착할 때 직면했던 난제가 반드시 추위였던 것은 아니다. 물론 지독하게 춥긴 했지만, 인간 정착의 특성이 희석된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특히 광범한 지역 연결망을 매개하는 재화의 교환이, 그리고 친족화와 같은 관습이 희석되었다. 인구 밀도가 낮고 식량을 저장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인간 집단들이 예측 가능한 접촉과 회합을 통해 사회적 단위로 기능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 p.63
비슷한 스텐실 기법의 흔적을 유럽의 몇몇 동굴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럽에 유물이 풍부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증거의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전 세계적 현상의 한구석을 유달리 꾸준하고도 꼼꼼하게 발굴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 동굴 벽화를 사냥꾼의 기억술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타당한 논거도 있다. 짐승들의 발굽 모양, 계절별 습성, 가장 좋아하는 먹이, 발자국 등은 예술가들의 이미지 레퍼토리에서 중요한 항목이었다.
--- p.82
동굴들을 찬찬히 훑어보면, 무력 계급과 나란히 지식 계급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빙하 시대 사회들은 영혼과 소통하는 자질을 가진 엘리트들을 선택함으로써 육체적으로 강한 자들이나 특권층으로 태어나는 자들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정치적 혁명이라 부를 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샤머니즘은 강자를 선지자와 현자로 대체했다.
--- p.101
이처럼 새로운 생태계들에는 각각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콩꼬투리가 있었으며, 설령 더 익숙한 형태를 구할 수 없었다 해도 덜 익숙한 형태를 시도해볼 수 있었다. 이는 저위험 전략보다 ‘감당할 수 있는 위험’ 전략으로 묘사하는 편이 가장 적절할 것이며, 어느 정도의 소화 불량과 이따금 더 심하게 탈이 날 위험은 콩 실험의 지속적인 특징이었을 것이다.
--- p.117
그런 소수는 본거지로 돌아가기 전에 까마득한 거리를 이동하거나 심지어 대륙을 횡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선사 시대에는 그런 소수의 규모가 훨씬 더 작았을 것이고 여행에 몇 달, 어쩌면 몇 년이 걸렸을 테지만, 그럼에도 대륙을 가로지를 가능성이 있었다. (…) 본거지가 더 안전할수록 더 야심 찬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 p.153
함무라비 법전은 통치자의 육체적 현전과 구두 발언을 대신했다. “억울하게 탄압받은 사람은 누구든 정의의 왕인 나의 입상 앞에 와서 나의 비문을 공들여 읽고 나의 귀한 말을 들어라. 나의 돌이 그의 사건을 명확하게 밝혀주리라.” 이는 우리가 아는 법, 즉 예로부터 물려받거나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제정한 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왕의 명령을 영속화하는 수단이었다.
--- p.179
큰 강 유역들은 서로 비슷하기는 해도 당대에 문화적 발산이 일어난 최소 두 가지 이유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 발산은 환경에 좌우되었다. 자원 기반이 더 크거나 더 다양할수록 사회가 더 크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환경의 다양성 덕에 강 유역 사람들은 덜 풍족한 지역들과 비교해 더 많은 자원을 누릴 수 있었다. (…) 둘째, 사회들이 서로 배우고 경쟁하고 문화를 교환하는 상호 작용이 중요했다.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 메소포타미아는 하라파와 접촉을 유지했다. 중국의 상대적 고립은 (신세계 여러 문명의 극단적인 고립과 비슷하게) 큰 강 유역 사회들이 모두 경험한 변화의 과정들 중 일부를 중국이 뒤늦게 시작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 p.190∼191
구세계의 증거는 이 위기의 수백 년간 환경이 혹독했으며 청동기 시대 위기와 함께 틀림없이 전염병이 엄습했음을 시사한다.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 기원전 12세기 트로이 전쟁과 이스라엘 12지파 시절의 기록이 현존한다. 한때 중세 후기에만 발병했다고 여겨진 페스트가 훨씬 더 이른 시점에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이른 유전학적 증거는 기원전 2800년경 중앙아시아 알타이 지방의 공동묘지에서 나오는데, 페스트가 청동기 시대 내내 스텝 지대에서 풍토병이었으며 서쪽으로 유럽까지 이동한 인도유럽계 유목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 p.215
무엇이 이 시대의 중요한 사상가들을 낳았을까? 일부 학자들은 이 시대의 지적 전통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기원하기는 했으나 비슷한 철학적 원리나 종교적 통찰을 공유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자들은 위대한 현인들이 등장한 시기에 문해력, 제국, 주화 역시 확산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 축의 시대의 특출한 개인들은 지적·영적 통찰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유지된 핵심 이유는 글로 적혔다는 데 있다.
--- p.260
기독교와 이슬람교, 불교 모두 자신들의 핵심 가치관과 지역별 문화를 조화시키려는 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예비 개종자의 문화에 맞추어 종교적 개념과 관행을 조정했다.
--- p.281
성장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로 대략 10만 년 전에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의 유달리 생산적인 두뇌가, 둘째로 빙하 시대가 끝난 이래 우세한 온난하고 습한 기후(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이 말하는 ‘긴 여름’)가 필요했다. 기원전 10만 년 이전에 몇 차례 긴 여름이 있었으나 그런 긴 여름에 반응해 더 큰 조직을 만들어낼 호모 사피엔스는 없었다. 그리고 기원전 10만 년에서 1만 5000년 사이에 호모 사피엔스는 있었으나 긴 여름은 없었다. 지난 1만 5000년 동안만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있었으며, 이로써 ‘아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성장하는 인간’ 호모 수페란스(Homo Superans)가 되었다.
--- p.317
수나라 문제는 성공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카롤루스, 알마문은 실패한 이유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문제가 거둔 성공의 결과는 분명하다. 바로 세계 조직의 중심축이 유라시아 서부에서 동부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700년경 장안에는 100만 명이, 낙양에는 또다른 50만 명이 살고 있었다. 수나라는 논을 넓혀가는 남부의 양쯔강 유역에서 북부의 번성하는 도시들로 쌀을 실어나르기 위해 대운하를 팠다.
--- p.349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아시아를 유럽과 아메리카의 시장에 직접 연결하는 대양횡단 교역을 개척한 유럽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교역의 양으로 보나 가치로 보나 아시아 내부의 거래가 대륙 간 거래를 크게 웃돌았다. 유럽인들은 주로 아시아 내부의 가격 패턴에서 수익을 얻을 기회를 찾았다. 예컨대 은과 구리의 가격은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중국에서 더 비쌌으며, 금의 가격은 인도에서 높았다.
--- p.374∼375
세계화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문화 세계화다. 문화 세계화는 다른 모든 형태(경제·기술·과학·생태 세계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선호했던 세계사 서사, 즉 유럽을 나머지 세계에 투영해온 과정으로서의 서사(섭리적·선형적·진보적 서사)의 제약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이런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런 서사는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전개된 사태를 마치 생존에 적합한 우월한 문명이 야만을 상대로, 또는 선택받은 ‘인류’(또는 인류의 일부)가 야만인을 상대로 목적론적 승리를 거두는 진화적 에피소드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문명으로 규정한 ‘중심들’은 그들이 정복하거나 착취할 수 있는 열등한 곳으로 치부한 ‘주변부들’과 마찬가지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 p.406
쿡 선장이 1779년 하와이 해변에서 찔려 죽기 전에 말했다는 ‘맨 처음 보는 사람’이 되려는 욕망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독자의 시선을 놀라운 사건으로 돌려놓는, 태곳적부터 여행 문학을 뒤덮은 신비감과 불가분한 것이었다. 탐험가들의 진실성은 언제나 미심쩍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텍스트가 어쩌면 기만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모든 왜곡을 바로잡을 만큼 강력한 렌즈인 양 여행 문학을 지금까지도 읽고 있다.
--- p.441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관계는 복잡하다. 두 용어는 서로 거북하게 양립하던 특징과 사건의 집합들을 포함한다.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성급한 가정이다. 계몽주의의 경우, 한편에는 세속성이 뚜렷한 이신론적·자연주의적 계몽주의가 있었다.
--- p.444
유럽부터 명나라와 청나라까지, 하나의 공통된 가닥이 근대 초 제국들을 연결했다. 이 제국들은 모두 역사가들이 말하는 군사 혁명, 가볍고 다루기 쉬운 화기의 도입을 계기로 일어난 혁명을 겪었다. 이런 화기의 사용법을 남자들에게 훈련시켜야 했으므로 군대를 유지하는 제도가 발전했다. 이는 정복을 완료하고 나면 군대를 해산한 중세 튀르크 제국, 몽골 제국과의 주된 차이점이었다. 상비군은 군주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안겨주었다. 군대는 외부의 적을 격퇴하고 내부의 반란을 진압했다. 군대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돈을 공급하고, 새로운 조직 체계를 마련하고, 행정 기구를 관료제화해야 했다. 문서 사용의 도움을 받아 팽창한 관료제 역시 근대 초 제국들의 공통점이었다.
--- p.474
억압당한 아메리카 토착민이 피정복 트라우마를 견디고 전통 문명의 연속성을 지켜간 것처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인생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플랜테이션에서 새로운 생활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를테면 주인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새로운 자조 단체, 새로운 종교(대개 기독교의 단편과 아프리카 신들에 대한 기억을 결합했다), 새로운 음악(악기로 즉석에서 작곡했다), 새로운 언어(출신 지역이 제각각인 노예들끼리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주로 유럽인 주인의 언어를 변경했다)를 만들어냈다.
--- p.487
인류의 역사 전체, 심지어 지구의 역사 40억 년을 놓고 보더라도 지난 200년 동안 이루어진 변화는 폭발적이고도 혁명적인 변화였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일으켰을까?
--- p.511
2005년 30억 명 이상(1900년 세계 총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미화 2.50달러 이하로 생활했다. 부의 총액이 증가하긴 했지만, 부의 분배는 역사상 가장 불평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 세계 인구 중 부유한 상위 10퍼센트가 세계의 전체 부 가운데 87퍼센트를 통제한 반면, 하위 50퍼센트는 겨우 1퍼센트를 통제하는 데 그쳤다. (…) 오늘날 새로운 질병은 일단 출현하고 나면 여행을 통해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갈 수 있으며,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도 현대 의학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이동하고 뒤섞이고 진화할 수 있다.
--- p.543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대중’은 응집되었지만, 정신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은 ‘양 떼’에서 ‘공중(公衆)’으로 바뀌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화되었다.
--- p.555
대중, 근대 국가, 과학과 기술은 모두 ‘예술과 문학’이 없는 지역에서도 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의 현존 또는 부재는 모든 정신적·지적·예술적 산물의 핵심 요소다. 예술은 인간 세계와 영원한 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변성과 영원성의 충돌을 끊임없이 묘사했으며, 그런 묘사를 통해 예술적 실천을 정당화하고 가장 깊은 의미를 표현했다. 이렇게 가변성의 조건과 거룩한 장소의 근본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세계관은 예술의 신성한 차원을 옹호한다. 그런 세계관은 인간이 존재의 신비에 반응할 때 ‘신성한 영감’을 받는다고 암시한다. 이런 이유로 1789년 이후 이른바 ‘무신론으로의 전환’은 인류의 모든 지적·예술적·정신적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p.564∼565
국가들은 다수의 문화 변용 전략을 포함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문해율을 최대한 높이고, 의무 교육을 도입하고, 문학과 예술의 정전(正典)을 정하고, 농민과 프롤레타리아를 시민과 군인, 부르주아의 대용물로 바꾸었다. 나는 ‘정전’ 확립이 근대의 특징이자 문화 일반에 가장 해로운 요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국가에서 보수를 받은 지식인들의 산물인 정전은 세계 문학과 예술, 사상의 진짜 걸작들을 배제했고, 그리하여 학습 과정을 따분하게 만들었다. 나는 현대 지식인들이 정전 명단에 들기 위해 예술적 통합성을 유지하기는커녕 곧잘 자신의 특성을 바꾸는가 하면 심지어 대량 판매보다도 명망 있는 상을 더 원한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실례인 노벨상은 적절한 작가들의 작품을 정전에 집어넣는 동시에 주류를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는 작가들을 배격한다.
--- p.571∼572
움베르토 에코가 언젠가 말했듯이, ‘묵시록적’ 인물들은 실은 체제에 가장 잘 융화되는 부류로 드러났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었을 뿐 아니라 겉보기에 체제에 도전함으로써 체제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까지 했다.
--- p.576
카리스마 없는 사람이 말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조언은 중심부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데,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런 조언이 주변부의 청중에게만 들리도록 빈틈없이 단속하는 체제 때문이다.
--- p.579
종교, 전제적 권력, 계급 격차, 인간적·사회적 불평등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귀족, 노예, 그리고 여성과 소수자의 법률상 무능력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1815년 시점에 ‘구체제’를 복원하려던 사람들은 영원한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려 애쓰는 ‘유령들’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 유령들은 결코 영면에 들지 않았으며, 폭군과 독단론자는 타협이나 폭력을 통해 진보를 근절하고 아직 남은 계몽주의의 희미한 빛을 꺼뜨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여전히 현대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 p.588∼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