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1년 10월 04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48쪽 | 348g | 135*195*17mm |
ISBN13 | 9788954682244 |
ISBN10 | 8954682243 |
출간일 | 2021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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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48쪽 | 348g | 135*195*17mm |
ISBN13 | 9788954682244 |
ISBN10 | 8954682243 |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둡고 깊숙한 곳에 대한 탐구이자 사회적·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실험작 코맥 매카시 세번째 장편소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서부의 셰익스피어’ ‘포크너와 헤밍웨이의 계승자’라 불리며 해마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 코맥 매카시. 그가 1973년에 발표한 세번째 장편소설 『신의 아이』가 출간되었다. 1965년 데뷔작인 『과수원지기』로 주목할 만한 첫 소설에 주어지는 포크너 재단 상을 받으며 작가로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딘 매카시는, 1968년 두번째 작품인 『바깥의 어둠』을, 그리고 1973년 세번째 작품 『신의 아이』를 발표하며 문단에서 차근차근 입지를 다져갔다. 작가가 본격적으로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서부 장르소설로 넘어가기 전 초기작에 해당하는 『신의 아이』는 남부 고딕소설의 스타일을 선보이는 작품으로, 사회와 사회질서로부터 멀어져 철저히 고립된 채 살아가다 결국 연쇄살인과 시간(屍姦)을 저지르고 비참하게 추락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너무나 강렬하고, 너무나 새롭고, 너무나 탁월해서 거의 미적인 범주화가 불가능할 정도”([뉴 리퍼블릭])라는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은 2013년 제임스 프랭코 감독의 영화 [차일드 오브 갓]으로 만들어졌고, 영화는 제7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
1부 007 2부 105 3부 175 옮긴이의 말 243 |
누군가에겐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게는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는 게 바로 그것이다. 저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국내에 소개된 작품만 고르면 더 줄어든다. 시간 순으로 보면 <핏빛 자오선>(1985), 일명 국경 삼부작으로 불리는 <모두 다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 <평원의 도시들>(1998),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 <로드>(2006), 최초의 영화 시나리오 <카운슬러>(2013), 희곡 <선셋 리미티드>(2015), 마지막으로 이 책 <신의 아이>(2021)가 있다.
매카시의 소설은 난해하다. 특히 소설의 배경이 과거로 갈수록 심하다. 문체가 시적이라 상징이 많은 데다(매카시의 소설 속에선 멕시코 마약 카르텔 두목마저 셰익스피어가 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이어 붙여 문장을 길게 끌고 가는 탓에 읽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번역의 한계까지 한 술 거들면 문장 하나를 집중해서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불분명한 인칭대명사의 사용은 악명이 높다. 지금 말한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 싶어 한참을 생각하거나 페이지를 되짚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카시를 읽는 이유는 그의 소설이 지닌 묵시록적 분위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소설이 가진 문학적 가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떤 답답한 행동을 고집스럽게 이어가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숙명성에 이끌린다. 그의 작품 세계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망설임 없이 inevitable이라 말하고 싶다.
<신의 아이>에서는 이런 생각이 좀 희석되는데 주인공의 악행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인 것 같다. 레스터 밸러드는 시간과 살인, 방화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말종이다. 정상참작 요소는 딱 하나뿐이다. 마몬(돈을 상징하는 악마)의 아이들이 그를 그의 땅에서 내쫓은 것. 하지만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아담과 이브가 보니 앤 클라이드가 됐던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매력적인 사냥꾼 루엘린 모스는 우연히 주운 돈 가방에 눈이 멀었고 그 대가를 치렀다. 그의 욕망은 충분히 공감할만하고 그 결과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레스터 밸러드는? 그는 벌을 받지 않는다. 대학병원에서 폐렴 치료를 받다 편안히 숨을 거둔다. 그의 시체가 덜컹덜컹 잘려 해부학 교재로 이용되기는 하지만, 산 채로 그런 일을 당했어도 시원찮을 인간이지 않은가? 매카시는 레스터 밸러드를 향해 '아마도 당신과 다를 바 없는 하느님의 자녀'라 부른다. 다른 작품들에서 매카시의 인물들은 죄를 '짓는' 인간으로 나타난다. 죄가 인간의 선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신의 아이>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죄'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매카시에게 신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에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의 아이'란 조롱의 의미로 들린다. 세상을 돌아보라. 인간이 어떻게 신의 피조물일 수 있는가?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 해도 우리를 낳은 게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도를 해도 사악한 인간이 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가장 희망적인 해석은 이 세상이 천국에 사는 진짜 신의 아이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기 위해 내려온 곳이라는 가정이다. 한때는 우리 모두 신의 아이였다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자위.
레스터 밸러드는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많은 사람들이 살아생전 심판받지 않은 자들이 죽어서 가는 곳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어야만 레스터 밸러드의 죽음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맞다면, 그건 우리 자신에게도 꽤나 잔인한 믿음 아닐까? 레스터 밸러드만큼의 악마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며 살아간다. 신의 아이로 착실히 살아왔다고 믿은 당신이 죽어서 레스터 밸러드를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당신은 그를 만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신약 성서의 저자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 예수의 십자가 옆에서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를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래된 숲 길이, 한 때 세상에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숲이 있었고, 이 곳이 그런 곳이었다." -156쪽
터무니없이 잔혹한 폭력이 지극히 무심하게, 세상 어느 곳에도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오직 어두운 욕망만을 따르는 인물을 쫓게된다. 아마 '하데스에서 솟아오른 영혼'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어울리는 비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의 도입부에 색슨과 켈트 혈통의 이 살인마를 "아마도 당신과 다를 바 없을 '하느님의 자녀(child of God)'"라고 정의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이 정의가 괴물을 괴물로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거북함이 된다.
밤의 더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면 그곳을 찾아냈을 인간, '레스터 밸러드', 이 자의 시야에 들어 온 여자들의 삶은 더 이상 연속되지 않는다. 시간(屍奸),살인, 방화(放火),유기(遺棄)를 일상으로 하는 종자다. 추악한 배설을 위해 시신을 소유하는 괴물, 그리곤 불타오르는 자신의 거처인 미늘벽 판자집을 뒤로 하고 동굴에 은신처를 마련한다. 레스터는 "자신이 신들에 대항하는 매우 통탄할 만한 사례"라는 자신의 생각이 반쯤은 맞다고 믿는다.
사실 이 소설의 도입부야말로 이해 불가능한 괴물의 행위를 납득케하는 단서일지도 모르겠다. '서비어 카운티'의 아무 소리도 없던 골짜기의 목가적 아침을 흔들어 깨운 것은 탐욕스런 부동산 경매를 위해 몰려든 일단의 무리들이 레스터에게 저지른 폭력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선하신 주님이 세상에서 딱 몇 군데는 사람들이 들어가 살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고 레스터를 쫓는 보안관에게 들려주는 한 노파의 말처럼 추방되어 되돌아 갈 수 없는 에덴동산(Garden of Eden)이었을까?
"그를 보라. 그는 같은 인간들, 당신 같은 인간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190쪽
인간이 저지른 원죄로 더렵혀진 곳, 레스터를 덮친 무시무시한 영혼이란 특수한 것이 아니라는 각성의 촉구인가? 소설은 강렬한 충격들과 어둡고 구불구불한 텅 빈 돌 틈새의 동굴을 헤매는 구원을 향한 신화로 해석하고픈 충동으로 변질시킨다. 암흑의 동굴에 포위되어 꼼짝할 수 없는 상태의 유일한 빛인 "시원찮은 손전등 빛줄기가 축축한 벽을 따라 떨어져 내리다 무(無)와 밤에서 끝나고 멎었다."는 레스터의 생각은 구원의 실패인가?
비인간이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어 제도와 규범 등 문명과 충돌하며 발생되는 비열함과 잔혹함의 서사 끝에 어둠의 동굴에 도망해 "아침 틈새의 빛", 계속해서 "동쪽을 살피"고 마침내 자진해서 출두한 인간들의 법정이 심판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없는 죄로 처형되고 마는 카프카의 소설 '요제프 K'의 역설적 판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잔혹한 살인자의 암울한 욕망으로 연결된 서사에서 문자로 서술 될 수 없는 신비, 말 할 수 없음으로서 드러나는 죄와 심판의 문자적 죄물음이 실패하는 결말은 '죽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낙원의 인간'이었다는 카프카의 의심의 여지 없는 죄와 닮아있다.
그런데 과연 이 소설이 죄의 구원이나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긴 한가? 이 폭력적 이야기 끝에 만나는 법의 결합은 성공한 것만 같다. 카프카는 실패함으로써 인류 기원의 표현 할 수 없음이라는 실패를 보여줌으로써 성공적 소설을 썼다. 코맥 매카시는 에덴에 돌아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인간이 태생적 비열함을 떨어내고 무구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심판이 지닌 내재적 신비성이 지닌 단죄의 불가능성이라는 또 다른 실패의 표현인가? 결코 단순치 않은 인간 기원에 대한 또 하나의 독특한 서사시의 출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