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 마시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배에 불을 밝힌 듯한 느낌이리라. 달콤함이 입안에 번지고, 힘도 불끈 솟으리라. 아주 뜨겁지는 않은, 적당히 따끈한 온도일 것이다. 천천히 침투해 훈훈하게 몸을 데우는 동시에 허기를 살짝 채워주고, 기분을 달래주고 또 기운도 나게 하는 액체에 어울리는 온도.---따뜻한 주스 중에서
나는 편애하는 계란 프라이에 대해 생각하고 만다. 어렸을 때, 거뭇거뭇하고 묵직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계란 프라이를 멋지게 구웠었다. 노릇노릇한 테두리는 프릴이나 레이스처럼 물결치고, 흰자는 올록볼록해도 노른자는 적당히 익은 계란 프라이. 접시에 옮길 때면 노른자가 터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아무리 조마조마해도 옮길 수밖에 없었다.---프라이팬과 계란 프라이 중에서
대신 아빠에게 이상한 취미가 생겼다.
“눈 꼭 감고 아, 해봐.”
그러고는 나와 동생에게 조그만 김밥을 먹이는 것. 김밥은 캔에 든 구운 김에 밥, 그리고 아빠 전용 안주로 만들어졌다. 안주는 그냥 젓갈일 때도 있고, 숭어 난소 젓갈일 때도 있고, 간장만 살짝 뿌린 데친 시금치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누에콩일 때도, 건어물일 때도, 통조림에 든 연어 살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것일 때도 있었다.
“안에 뭐 들었어?” 하고 물어서는 안 되었다. 조심조심 입을 열면“ 아빠를 믿어.” 했다. 그리고 꼭꼭 씹으면 대개는 맛있는 것―안주 대부분이 밥과 잘 어울린다―이었지만, 때로는 엉뚱한 것도 들어 있었다. 동그랗게 자른 레몬 조각이나 귤 한 조각(귤은 물론 안주가 아니다. 아빠가 테이블 밑에서 몰래, 늘 옆에 놓여 있는 재떨이에다 껍질을 까고 준비해두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움찔 놀라면,“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선 때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단다.” 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꼬들꼬들 중에서
그래서 소설 때문에 취재하러 나간 거리에서, 자르기 전의 우무가 물이 찰랑찰랑한 양동이에 담겨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바로 저거야!’ 하고 생각했다. 물론 우무를 사면 그 자리에서 잘라주는 듯했지만, 부탁하면 그대로 팔 수도 있을 테고, 그럼 나는 그 아름다운 나의‘ 우무 자르개’로 우무를 잘라 먹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이 가게 옆에 산다면……. 그런 몽상을 하다가 소설에 불쑥 우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목하 우무 가게는, 동물 병원, 우체국, 스포츠센터에 이어 우리 집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네 번째 장소다. ---우무찬가 중에서
언어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비 내리는 아침 부엌에서, 비파는 이런 색과 모양과 맛이라서 친절한 것이 아니라, 친절하기 때문에 이런 색과 모양이고 이런 맛이 나는 과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니까. ---비 내리는 아침 부엌에서 중에서
20대에는, 특히 여행을 계획할 때는 예약 없이 떠나는 것을 좋아했다. 예약을 하는 건 구태의연하고 멋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참맛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1년짜리 싸구려 오픈티켓을 사서 비행기에 오르고, 묵는 곳은 물론 이동할 곳도 정하지 않은 채 떠나는 것이 자유로운 여행이라고. 그 시절은 그 시절 나름대로 즐거웠다. 발 닿은 곳이 어디든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는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나 인생이나 안심할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여행이나 외식 같은 소소한 즐거움만은 안심하고 즐기고 싶어 예약을 하고 나선다.---예약병 중에서
뜨끈뜨끈한 고기 요리도 물론 맛있지만, 콜드미트에는 뭐랄까 옛 친구를 만난 듯한 푸근함이 있다. 그래서 그만 마음을 허락하고 만다. 언제 먹어도 좋다. 배가 부르거나 더부룩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더 좋은 점은 콜드미트의 냉담함이랄까 매정함, 예의 바름이다. 옛날 친구이기는 하지만 과도하게 반가운 척하지 않는다. 친근하게 굴지 않으므로 성가시지도 않다.
낮에, 과일만으로는 좀 허전하다 싶으면 종종 콜드미트를 먹는다.
콜드미트는 촉촉하다. 조심스럽다. 하지만 가공된 고기 자체의 맛도 나고 씹는 맛도 있다. 양념으로 가미된 것―후추면 후추, 훈제 칩이면 훈제 칩, 피망이면 피망, 콩소메면 콩소메―의 풍미가 소박하지만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한다. 심플하고, 정말 알기 쉬운 맛.---콜드미트 중에서
포타주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콘 포타주, 비시수아즈, 완두콩 포타주. 이 세 가지가 빛나는 주역. 하지만 갖가지 채소로 다양한 포타주를 만들 수 있다. 양송이버섯이나 크레송, 당근, 단호박.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샐러리 포타주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서 먹는다.
포타주의 좋은 점은 우선 온도―따뜻한 경우에는 그 따뜻함, 차가운 경우에는 그 차가움―이고, 그다음은 혀에 닿는 감촉―너무 부드럽지 않고 채소의 존재감이 살짝 가칠하게 느껴지는―, 그리고 진하면서도 모나지 않은 맛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포타주를 먹으면 그 맛이 온몸, 온 세포에 고루 퍼지는 느낌이 든다.
고요한 음식이다(음식에는 고요한 것과 시끌벅적한 것이 있다). 포타주는 철저하게 고요하고, 나는 그 점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포타주와 기계 중에서
그런데 나와 동생 사이에는 빵을 둘러싼 불문율이 있다. 바게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 온 날 다 먹는다는 것이다. 그 불문율이 생긴 후로―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동생은 초등학생이고 나는 대학생일 무렵이었을 거다―, 우리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바게트는 하룻밤이 지나면 다른 빵으로 변했나 싶을 만큼 맛이 떨어진다. 우선 고소하게 말라 바삭바삭 부서지는 껍질이 사라진다. 그다음 습기를 머금은 말랑말랑한 속살에 밀가루의 달콤함이 밴 안쪽이 말라버린다. 그래서 사 온 날 바로 먹는다는 불문율을 지키는데, 이렇게 지키지 않아도 누구 하나 곤란하지 않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누군가는 곤란해지는 약속보다 더 잘 지키는 이유는 우리가 고집스럽기 때문인 듯하다.
---빵과 불문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