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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의 수줍음

꼭대기의 수줍음

: 유계영 에세이

[ 양장 ] 매일과 영원-03이동
리뷰 총점9.5 리뷰 11건 | 판매지수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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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9월 27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36쪽 | 320g | 134*195*16mm
ISBN13 9788937419454
ISBN10 8937419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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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비둘기 세 마리가 맞은편 지붕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충격에 휩싸인 채 10분 정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무엇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기와를 장식하기 위한 조형물인 줄 알았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올 땐 이 많은 새들이 다 어디로 가지?
콧속이 얼어붙는 겨울밤에는 그 많은 고양이가 다 어디에 숨지?
늘 그런 게 궁금했다. 늘 그런 것만 궁금했다.
--- p.9, 「서문」 중에서

노인의 피부를 나무껍질 따위로 처음 비유한 사람은 틀림없이 제 할머니의 팔을 만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무심한 표현이 노인에 대한 관습적 인식을 낳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오늘의 충격은 그 자의 탓 때문이라기보다는 할머니의 팔을 만지자마자 즉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살의 촉감이 촉촉하고 흐물거린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아, 촉촉해! 아, 부드러워! 하고 마음속에서 곧바로 언어화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검진 결과가 좋아야만 한다. 작은 발을 쭉 뻗어 내게 내밀고는,
손녀 집에 놀러가려고 양말 신었지.
수줍게 웃는 나의 할머니.
--- p.42~43, 「지난여름의 일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넉넉하게 남아 있는 시간의 표면 위를 둥둥 떠가는 거야. 해초처럼 부드럽게. 내가 너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고 네가 나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지 않고 일하며.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삶의 형식을 우리가 발명할 수 있을까?
--- p.102, 「노동 없이 노동하며 사랑 없이 사랑하는」 중에서

한동안은 실종 사건 플롯에 사로잡혀 지냈다. 늘 여기 있던 사람이 여기 없게 되는 과정만큼 신비로운 드라마가 없었으니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자의 삶이 울타리 너머에서 천연덕스럽게 이어지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묘한 공포심에 마음이 떨렸다. 실종을 다룬 영화와 소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전봇대에 붙여 둔 전단지들도 빠짐없이 읽었다. 갈색 푸들, 하얀 말티즈, 치매 노인,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의 보청기를 찾는다는 전단지를 보았다.
--- p.108~109, 「흰 종이, 거의 검은 종이에 가까운 흰 종이」 중에서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말해 보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거창하고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평상시 떠들고 다니는 나의 말들이 대개 이렇게 무모하다 느낀다. 뻔뻔해지거나 용감해지는 것 말고는 이 문제를 돌파할 지혜가 없다. 그럼에도 앞선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적어 보려 했던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뻔뻔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한 내가 무모함을 무릅쓸 만큼 잊히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빛이었다.
--- p.184, 「사랑스러운 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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