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도 그것, 그곳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낯설게 자각될 때가 있었다. 사탕수수를 눌러 짠 주스를 마시다가 불현듯 슬픔 같은 것이 북받쳤다.
출발하고, 도착하고, 조우하고, 이별한다. 반복되는 접촉과 분리에 능숙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여행자는 초보자일 수밖에 없다.
--- 「여행자-구도에게」 중에서
구도는 구도의 길을 갔고, 나는 여기 있다.
여행자는 길에서 묻지 않는다. 길에서는 그저 만날 뿐이다.
--- 「여행자-구도에게」 중에서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펴 놓고 있는 사람들이 바다 건너 뉴요커들만큼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왜 이들과 다른가. 얼마나 다른가. 내 삶이 달라지지 않을까 봐, 앞으로도 달라질 수 없을까 봐 가슴이 답답했다.
창밖으로 글귀 하나가 보였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현수막에 매달려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노동하지 않았는데도 살이 뻐개지는 듯한 날이 많았다. 천근만근 잠이 쏟아졌다. 아침에는 두 눈이 퉁퉁 부었다. 보통과 멀어지고, 멀어지는 만큼 동굴 세계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 「서울은 처음이지?」 중에서
가난은 매일을 살게 하지 않고 버티게 했다. 라면 반 개에 즉석밥을 넣고 달걀 두 개를 풀었다. 카레 가루를 잔뜩 넣었다.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K가 찾아오면 술집에서 술을 마셨지만 옆에 누가 있을 때뿐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조금도 나를 챙기지 못했다. 싼 것만 골랐다. 천 원짜리 김밥을 샀고, 믹스커피만 마셨다. 과일도 먹지 않았고 냉동실에는 아이스크림 도 없었다.
--- 「서울은 처음이지?」 중에서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12층이었고, 창이 있었다. 전기를 동력으로 달리는 차량이 궤도를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방은 무덤보다 컸다.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자고 자고 또 잤다.
--- 「서울은 처음이지?」 중에서
방과후 교사로 일하는 이모는 개학이 연기되는 통에 실업자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정부에서 재난 지원금을 주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너 아사라고 들어 봤어? 굶어 죽는다는 말이야, 이모가 그렇게 될지도 몰라.
깔깔 웃었다.
아사. 이모랑 상관없이 예쁜 단어라고 생각했다.
작별 인사는 하고 죽을게.
그 말만 있었으면 걱정했을 텐데 연이어 하트 뿅뿅 이모티콘이 도착해서 안심했다.
--- 「코로나, 봄, 일시정지」 중에서
1인가구 특별동거법이 시행되면 18평(59㎡) 이상의 주거지에 거주하는 수도권 내 성인은 동일 성별의 동거인을 들이게 된다. 가구수 변동에 따른 인테리어 및 시세를 반영한 월세의 반은 정부가 지원한다. 이 의원은 “소유자의 권리나 행복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며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 「1인가구 특별동거법」 중에서
여전히 혼자인 여자는 일인용 장을 보고 일인용 요리를 하고 일인용 식탁에서 식사한다. 혼술을 하고, 혼영을 가고, 홀로 산책한다. 그리고 혼잣말이 늘었다. (덜 사랑한 것, 더 잘해 주지 못한 것, 키스조차 자주 허락하지 않은 것, 덜 보듬어 준 것, 아이처럼 대한 것, 많이 웃어 주지 못한 것, 사랑하지 말라고 다그친 것, 금방 잊게 될 거라고 말한 것,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충고한 것…… 내가 살아 있어, 죽은 네게 미안하다.)
--- 「나무들」 중에서
불빛은 흐릿하게 번져 있지만 소년은 어둠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녹색의 반짝임을 감지한다. 검붉은 빌딩 사이로 꺼질 듯 녹색이 이어진다. 그 빛은 소년의 것이다. 소년이 발견한 것이다. 소년은 그 색이 반갑다.
--- 「설탕밭」 중에서
어둠 속에서 노를 저을 때 말이다. 바다에 빠져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보다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더라. 나를 태워 준 청년에게 의지하면서도 웬일인지 혼자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더구나.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별이 있어 그랬다.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어. 몇 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빛나는 별이, 밝다고 할 수 없는 그 작은 빛이 나를 지켜 주는 것 같았다. 별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어.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걸 좋아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인간에겐 별빛 하나만으로 족해. 나를 비춰 주는 빛 하나만 있으면 된다. 가령 반딧불이 같은 거 말이다. 그것만 있으면 돼.
--- 「설탕밭」 중에서
투명한 사람은 슬픔이 탄로 나는 줄도 모르고 불쑥 자기를 드러낸다. 힘쓰는 줄도 모르고 기운을 낸다. 토로를 자책하느라 상대가 자기를 두 팔로 안은 줄도 모른다.
--- 「온라인 수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