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기 위하여
일찍부터 나는 봄날같이 따뜻한 시를 쓰려 했습니다. 냇물을 건너온 실바람 같은 시를 쓰려 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도 제 신명으로 붉게 피었다 지는 풀꽃 같은 시를 쓰려 했습니다. 길가에 흩어진 바지랑대 끝에서 오지 않는 짝을 기다리는 곤줄박이의 노래 같은 시를 쓰려 했습니다. 시 한 줄로 슬픔을 빗질할 수 있는 시, 세상의 연인들이 쓰는 편지의 첫 구절 같은 시를 쓰려 했습니다.
현란한 말들을 구기고 펴서 시를 만든 일은 없습니다. 구름같이 일었다 스러지는 오만 가지 생각과 마음의 빛깔들을 내 마음의 색연필로 베꼈습니다. 시 아니고는 다른 말로는 표현할 그릇이 없을 때 시에게 바리때를 내민 적은 있습니다.
그동안 써온 천여 편의 시 가운데서 쉰네 편의 시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쉰네 편의 시를 쓸 때의 심정을 흰 종이 위에 잉크를 붓듯 쏟아놓았습니다. 고백록이라 해도 좋고 시작 배경이라 해도 좋고 자작시 해설이라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 책의 글들이 행여 시를 쓰는 분들을 위한 조언이 되고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큰 행운으로 삼겠습니다.
--- 「책머리에」 중에서
그리움이 많은 당신도 쉬이 그 그리움에 닿지 못해 안타깝거든 텃밭에 별을 심어보세요. 별이 자라는 동안 당신의 가슴 밑바닥에서 별꽃이 봉지를 열고 꽃망울을 터뜨릴 것입니다. 그런 밤이면 아마도 별이 그 추억을 받아 싣고 종이비행기처럼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추억을 데리고 떠나는 하늘 여행자가 될 것입니다.
--- p.27, 「별밭마을」 중에서
시월은 나에게로 오던 애인이 단풍 숲에서 길을 잃고 달빛이 돌 틈에 끼인 벌레 울음을 씻어내는 저녁을 키우고 있습니다. 시월은 옛날 읽은 책의 끝 구절,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설화 속 미지의 밤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 시월은 소설가가 콩트를 쓰고 시인이 단행시를 쓰기 좋은 저녁을 가졌습니다. 썩은 과실 향내를 맡지 않으면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저녁을 가졌습니다.
--- p.51, 「사랑하는 사람은 시월에 죽는다」 중에서
쉰 해를 시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긴 시간을 함께 걸어보니 시라는 게 늘 근심덩어리입디다. 풀잎처럼 천연할 수도 구름처럼 태연할 수도 없습디다. 차라리 편안 한 꾸러미 지고 볕 잘 드는 옹두리 곁에 세 들어 물봉숭아 꽃잎같이 곱다란 숨이나 자주 쉬며 살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래저래 지나온 긴 시간, 까맣게 찌어든 장독에 꽃가지 몇 낱 피어난들 무어 그리 탓할 바 있겠습니까. 그리 마음 내려놓으니 이제 연필 쥔 손이 저녁의 수저처럼 편안합니다. 그래도 슬픔, 아픔 헤적여 더 써야지요. 시는 늘 부끄러움의 근원, 무안(無顔)의 소치라는 생각입니다.
--- p.76, 「내가 가꾸는 아침」 중에서
한 생의 열차가 긴 터널을 지나 환한 아침 햇빛 속을 달릴 수만 있다면 누구든 그 가슴에 열세 살의 소년과 서른의 청년과 마흔의 장년과 예순의 노년을 함께 지니고 불행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는 생을 펄럭이며 지나갈 수 있습니다. 시든 수필이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제 인생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담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값어치 있는 기록이고 측정할 수 없는 재산입니다.
--- p.119, 「송가─여자를 위하여」 중에서
오늘 밤하늘에 어제까지 없던 별이 하나 더 뜬다고 한들 누가 그것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안 보이는 들판 가운데 꽃 한 송이 더 핀다고 한들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시인이 어둠 속에서 새로운 시 한 편을 더 쓴다고 한들 누가 그 시를 기억하겠습니까. 그러나 둥지의 새가 제 가슴으로 알을 품듯 시인은 시를 품습니다. 그 시가 어느 날 당신의 눈에 들어가 당신의 가슴을 울릴 수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 p.146,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에서
기운 자리가 많은 옷이라고 반드시 남루는 아니며 급히 지난 마을이라고 반드시 망각 속에 묻혀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풀잎 끝에 매달렸다가 이내 땅으로 떨어지는 이슬방울도 시인에게는 자정을 적시는 사념으로 남습니다. 그것이 한 편의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됩니다.
--- p.190, 「하행선」 중에서
지금도 나는, 시는 생의 정맥이 도란도란 흐르는 실핏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두 손바닥을 모아 떠 마시던 옹달샘 물 같은 시, 그런 시를 읽거나 쓰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시를 다만 몇 편이라도 더 써놓고 이 세상 뜰 수 있을까요?
--- p.245, 「별이 뜰 때」 중에서
세상의 서정시란 모두 그리운 마음들이 남긴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 가장 알록달록하고 달콤하고 애틋한 말이 그립다는 말 외에 또 있습니까. 다른 마음으로는 도저히 대신할 수 없는 꽃망울 같은 마음, 세상의 아름다운 시는 그렇게 태어납니다.
--- p.278, 「그립다는 말 대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