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이른 아침을 걸으며, 약간의 식탐도 부리며 먹는 크루아상. 겨울 아침은 당신 몸 안에서 크루아상이 되고, 당신은 크루아상의 오븐과 집과 쉴 곳이 된다. 서서히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딘다. 당신은 황금빛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푸른빛과 잿빛을, 그리고 사라져가는 장밋빛을 가로지른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어쩌나. 당신은 이미 하루 중 가장 좋은 부분을 먹어버렸으니.
--- p.9~10,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중에서
샐러드 볼에 가득 담긴 콩 속에 손을 넣어본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둥근 완두콩들이 은은한 초록색 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손이 젖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연한 빛깔 행복이 침묵 속에서 한동안 이어진다. 이윽고 말 한마디가 톡 터져 나온다. “빵 사올 일만 남았네.”
--- p.12~14, 「완두콩 깍지를 까는 일」 중에서
중요한 것은 딱 한 모금이다. 두번째로 넘어가는 맥주는 점점 더 싱거워지고 평범해진다. 미적지근하고, 들쩍지근하고, 두서없이 질척거릴 뿐이다…… 사실 맥주 첫 모금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이미 모두 씌어 있다. 우리의 마음을 꾀어 부추기는 데 이상적인 것은 지나치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맥주의 양이다. 이윽고 맥주를 들이켜면 숨소리가 바뀌고, 혀가 달싹대며, 그것들에 비길 만한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즉각적인 행복감이 찾아든다. 무한을 향해 기쁨이 열리는, 거짓말 같은 느낌…… 동시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최고의 기쁨을 벌써 맛보아버렸다는 것을……
이제 맥주를 마시면 마실수록 기쁨은 점점 더 줄어든다. 이것은 씁쓸한 행복이다. 우리는 첫 모금을 잊기 위해 계속 마신다.
--- p.18~20, 「첫 맥주 한 모금」 중에서
목욕물을 받는다. 일요일 저녁의 진짜 목욕, 푸르스름한 거품이 바글대는 욕조에서 뽀얗게 낀 수증기와 보드라운 솜 같은 사소한 것들 사이로 둥실 몸을 내맡기며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그런 목욕을 해보기로 한다. 욕실의 거울에는 뽀얗게 김이 피어오르고 머릿속은 나른해진다. 특히 지나간 한 주에 대해 생각하지 말기를. 내일이면 다가올 한 주에 대해서도 더더욱 마찬가지다. 따뜻한 물에 불어 쪼글쪼글해진 손가락 끝에서 찰랑대는 작은 물결에 몸과 마음을 맡겨보자.
--- p.29, 「일요일 저녁」 중에서
두 팔을 펼쳐 모은 상태로 오래 책을 읽다 보면, 턱이 스르르 내려가 모래사장에 파묻힌다. 입안으로 모래가 들어온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몸을 일으켜서 두 팔을 가슴 위로 마주 낀다. 이번에는 한쪽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거나, 이따금 읽은 페이지를 접어본다. 흔히 이런 포즈를 ‘청춘기의 포즈’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고 책을 읽으면, 서글프고 허무하고 작디작은 것이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보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고, 싫증이나 들쭉날쭉 쾌락을 맛보기도 하는 것, 이 모든 게 다 바닷가에서 책 읽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눈이 아닌 몸으로 책을 읽는, 그런 느낌이 든다.
--- p.40, 「바닷가에서 책 읽기」 중에서
그러자면 새 스웨터가 한 벌 필요하다…… 몸이 털실에 푹 싸여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헐렁한 스웨터라야 한다. 그런 스웨터를 입게 되면 계절과 한 몸이 된다. 어깨에까지 흘러내려 뭔가 여지를 남겨놓는 스웨터. 한 해의 막바지로 흘러가는 이 시기를 모양과 빛깔을 달리해서 즐긴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멜랑콜리의 나태함을 선택할 것, 그리고 남은 날들의 빛깔과 같은 새 스웨터를 살 것.
--- p.74~75, 「가을 스웨터」 중에서
입술이 말라온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갈증은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사과의 하얀 과육을 베어 물어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0월이 와야 할 것이다. 대지가 다져지고, 부드럽게 굽은 지하 저장고의 천장 아래 사과가 놓이고, 비가 내리고, 기다림이 시작되는 10월이. 사과 냄새를 맡으면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 강건한 어떤 삶, 더 이상 우리 것으로 누릴 수 없는 ‘느림’의 냄새이기 때문이리라.
--- p.78, 「집 안 가득 사과 냄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