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치유하고 이겨내는 힘을 책에서 찾다
: 루이자 메이 올컷,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
이 책은 김영란이 어린 시절에 읽은 소설들로부터 시작한다. 루이자 메이 올컷,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로 이어지는 흐름은 10~20대 여성의 보편적인 독서 경로라 할 수 있을 텐데, 여성에게 덧씌워진 가혹한 굴레를 감당하며 글을 써야 했던 이들의 서로 다른 행로와 작품세계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펼쳐진다.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컷은 힘든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자매들과 함께 상상했던 세계를 소설 속의 판타지월드로 구축했고, 브론테 자매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그려내기 위해 규범 파괴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이 약동하는 세계를 되살려냈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가족에 매인 일상 속에서 자신이 본 삶의 미묘한 진실을 잡아채기 위해 소설을 그물망으로 삼았다.
이 여성작가들은 가족으로 대표되는 현실세계에서 고통과 상처를 받았지만 주어진 제약으로 인해 그 상처를 극복할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고, 결국 소설을 쓰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냈다. 삶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해하고 이겨내는 방식에 대한 여성작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김영란 역시 성장하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상처에 대한 치유를 얻고자 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에서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 울프로 이어지는 김영란의 독서편력은 그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세상을 납득해보려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한편 이 책은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됨됨이를 연관지어 분석하고 작품에 대한 비평적 맥락을 경유함으로써 작가의 표현의지와 문학작품 그리고 객관적 현실 사이의 복잡한 변증법을 꼼꼼하게 해명해내고 있다.
‘여성’이라는 변방에 존재했던 작가들에게 보내는 우정 어린 편지
: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김영란은 여성의 수가 극소수였던 법률가 사회에서 일하면서 분투하던 시절에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만났다. 도리스 레싱은 문학사에서 페미니즘의 전사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어머니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던 아이였다고 분석하면서 ‘모성’이라는 신화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도리스의 좌절과 안간힘을 『금색 공책』『생존자의 회고록』 등의 소설 속에서 면밀히 읽어낸다. 김영란은 도리스 레싱의 삶과 문학에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삶의 중요한 어떤 부분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을 발견하고 강한 연민을 느끼는데, 도리스의 삶에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자신의 삶이 포개어졌기 때문이다. 김영란은 엘리트 남성이 주류를 차지하는 집단에서 여성이기에 업무적으로 열등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일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완벽한 집안의 천사로 살아가기를 요구받았음을 고백하는 한편, 이러한 현실이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떠안고 있는 문제임을 지적한다.
도리스 레싱과 함께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 꼽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페미니즘 소설로만 규정되는 데 반발하는 마거릿 애트우드에 대해서도 김영란은 사려 깊은 분석을 시도한다. 『시녀 이야기』와 그 후속작인 『증언들』은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권력이 스스로 신격화하여 비인격화되고 관료주의화하는 세계를 단순명료하게 보여주면서 그런 세계에서 가장 힘이 없는 계층인 여성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놀라운 상상력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미로를 헤매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사유
: 쿤데라와 카프카, 커트 보니것, 안데르센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지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면 결국 세상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문제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는 시기가 온다. 김영란은 카프카와 쿤데라의 소설을 통해 이 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다. 특히 카프카의 『성』은 관료주의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세계에 대한 암울한 예측이라고 해석하면서, 법해석학을 수행하며 살아온 법률가로서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이미 만들어진 법의 여러 해석 앞에서, 그중 어느 길을 선택하여 나아갈지 결정하는 정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자유였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서늘한 감성이 깊은 울림을 준다. 김영란은 스스로를 ‘무성찰적 담지자’로 지칭하면서 세상이라는 미로를 헤매는 이의 무력감을 호소하지만, 독자는 그가 누구보다 ‘삶의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풍요로운 성찰자’임을 느끼게 된다.
김영란은 커트 보니것의 작품을 읽으면서는 한발 물러서서 세상의 관찰자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시선을 발견했고, 은퇴 무렵에 이르니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찬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준 안데르센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김영란은 일생 동안 책을 읽어오면서 독서하는 순간에는 잠시나마 루이자 올컷이 되었다가 브론테 자매들 중의 하나가 되어보기도 하고, 안데르센이 되어보기도 하는 가운데 그들의 삶에 대한 사유가 종내는 자신의 사유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독서 에세이라기보다는 인간 김영란의 영혼의 고백록이다. 스스로를 생에 대한 관찰자이자 방관자라 고백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삶을 온전히 읽어내려는 사람이며 ‘모든 일을 심장과 영혼과 힘을 다해서 하는 사람’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독서가 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