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플라타너스단풍과 구주물푸레나무의 묘목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몇몇은 시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대부분 자란 지 몇 년 정도는 된 것 같았다. 시신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블랙베리덤불 또한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숨진 사람은 그곳에 아주 오래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2장, [결정적 증거는 식물의 나이]]」중에서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손상된 뼈와 잔인하게 훼손된 시신은 죽음으로 이어지던 순간의 정신상태를 압축한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강간 후에 살해당한 젊은 여자의 부패한 팔다리에서 느껴지던, 공포에 사로잡힌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여자의 시신은 한 배수로에 외로이 누워있었고, 바람에 불어온 가을 낙엽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낙엽이 그 죽음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준 것이다.
---「3장, [법의식물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중에서
내가 하필 1년 중 가장 습하고 추운 계절에 야외 작업을 자주 하게 되는 이유는, 나무에 이파리가 달리지 않는 시기라서 그런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뭇가지가 헐벗어야 사람들이 시신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중략) 나무와 덤불에 이파리가 잔뜩 달렸을 때는 개가 덤불로 뛰어들어도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 주인이 알아볼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이파리가 떨어지고 나면 코가 못한 역할을 눈이 대신하기 때문에 시신이 발견된다.
---「3장, [법의식물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중에서
일반적으로 식물학자들은 식물 전체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하다. 또는 식물의 일부를 바라보는 경우라 해도 나무에서 꽃이 핀 가지나 씨앗을 보는 등 비교적 온전한 상태에서 관찰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내가 조사하는 대상은 보통 진흙이 묻고, 신발이나 자동차 바퀴에 밟혀 짓이겨진 경우가 많다. 때로는 부패하는 사람의 조직에 오랫동안 붙어있다 보니 심하게 오염되거나, 오랜 기간 비바람에 노출된 경우도 있다. 나는 기억 속에 새겨진 방대한 식물학적 경험을 총동원해서 이 조각난 식물의 정체를 추리해야 한다.
---「3장, [법의식물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중에서
일부 블랙베리덤불은 사람들이 많은 곳과 범죄가 저질러지는 곳에 흔하다. 이 나무가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농업, 하수, 운송을 통해 흙과 수로의 영양분을 늘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블랙베리덤불은 이런 환경에서 잘 자란다. 영양분을 크게 탐하는 종이고, 인간이 공급하는 과잉의 영양분은 이 덤불의 입맛에 잘 맞는 것들이다.
---「4장, [블랙베리덤불은 시체를 먹고 자란다]]」중에서
우리 눈에는 줄기들이 무질서 그 자체로 보이지만 블랙베리덤불은 산울타리, 숲 그리고 많은 범죄가 저질러지는 영양분 풍부한 거주지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전략을 갖춘 아주 ‘짜임새 있는’ 식물이다. 일단 시신이 한번 블랙베리덤불에 둘러싸이면, 머지않아 완전히 덤불로 뒤덮여 발견될 날만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역할은 이러한 식물의 구조에 담긴 결정적인 신호를 이용해서 시신이 그 자리에 얼마나 있었는지 추정하는 것이다.
---「4장, [블랙베리덤불은 시체를 먹고 자란다]]」중에서
나무는 그 안에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죠. 매년 있었던 폭풍, 가뭄, 홍수, 손상의 흔적은 물론이고 사람이 손을 댄 흔적들도 모두 충실하게 보존합니다. 나무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위조하거나 만들어낼 수는 없죠.
---「5장,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중에서
꽃가루와 식물 포자의 세포는 억센 외피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오랜 시간 동안 버틸 수 있다는 의미다. 환경조건만 적당하면 꽃가루는 흙 속에서 몇천 년이나 살 수도 있다. 환경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이 꽃가루를 범죄과학에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 열쇠다. 모든 식물은 특별히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식물은 영양이 풍부한 흙을 필요로 하고, 어떤 식물은 풍부한 햇빛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많은 식물이 뚜렷한 분포 패턴을 가진다. 범죄과학에서 꽃가루를 이용할 때의 핵심은 바로 이 분포 패턴이다.
---「8장, [꽃가루는 말한다, 당신이 현장에 있었다고]]」중에서
이 이파리는 피해자의 삶을 집어삼킨 끔찍한 사건의 목격자인 셈이었다. 나는 실험실에서 그 이파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증거물을 전문가답게 다뤄야 하기도 했지만, 이 이파리 조각이 아주 끔찍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심하게 훼손된 녹갈색의 이 작은 이파리 조각을 통해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10장, [부서진 이파리 조각]]」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식물 표본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서는 식물 표본실의 중요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도서관도 놀라운 곳이기는 하지만 도서관에는 대체로 다른 곳에 있는 자료의 복사본이 있다. 하지만 식물 표본실에 있는 각각의 표본들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10장, [부서진 이파리 조각]]」중에서
온갖 특이한 서식지에 사는 특성 덕분에 균류는 범죄과학에서 아주 유용하다. 하지만 큰 장애물이 하나 가로막고 있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에 비해 균류에 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균류의 대다수는 현미경으로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이들의 번식 구조물인 포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분명 균류 포자의 다양성과 발생에 관한 이해를 넓히면 법의환경학 도구상자에 도구가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다.
---「11장,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증거들]]」중에서
불가리아의 반체제 작가 조지 마르코프는 리신을 사용한 불가리아 비밀경찰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마르코프는 런던 워털루다리 근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오른쪽 허벅지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뒤를 돌아보자 한 남자가 우산을 거둬 서둘러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르코프는 네 시간 뒤 병원에서 사망했다. 시신을 부검해보니 허벅지에서 직경이 2밀리미터도 안 되는 작은 금속 알약이 발견됐다. 그 알약에는 작은 구멍들이 뚫려있었고 그 안에는 리신이 채워져 있었다.
---「12장, [자연은 독성의 발전소]]」중에서
수사의 일부로 수집된 생물학적 증거는 따로 떼어놓고 바라봐서는 안 된다. 만약에 내게 찰진흙 입자와 돌장미 꽃가루가 든 증거물이 온다면 나는 그 표본이 정원에서 온 것이라 결론 내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백악 입자, 돌장미 꽃가루 그리고 맨투라매슈시의 겉날개가 든 표본이 온다면 나는 그것이 백악질 초원지대에서 온 것이라 결론 내릴 것이다.
---「13장, [복잡한 생태계를 올바로 이해한다면]]」중에서
미국 애리조나주에서는 희생자를 싣고 갔던 트럭 뒤에서 찾아낸 푸른팔로베르데나무의 열매로 용의자가 범죄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식물 DNA를 이용해서 그 열매가 용의자 마크 보간이 희생자 데니스 존슨의 시신을 버린 곳으로 여겨지는 공장 마당의 나무에서 나온 것임을 밝혔다. 199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법정에서 식물 DNA 기반 증거가 처음으로 사용된 경우로 여겨져 주목을 받았다.
---「13장, [복잡한 생태계를 올바로 이해한다면]]」중에서
부패는 복잡하고 놀라운 생물학적 과정이다. 우리 몸이 부패하면 서로 다른 세균 집단과 다른 미생물들이 공간과 먹이를 놓고 경쟁한다. 초기 단계에는 미생물들이 우리 몸 곳곳에 퍼져 가장 쉽게 습득 가능한 먹이 공급원인 단당류와 탄수화물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점점 몸이 먹혀 들어가면서 인대나 연골 속에 든 단백질처럼 복잡한 화합물을 처리하는 미생물들이 득세하게 된다. 단당류와 탄수화물을 섭취하던 미생물들은 세력이 약해지고 점점 사라지다 죽는다. 결국에는 뼈만 남는데, 뼈도 골격의 억센 구성요소들을 소화할 수 있도록 진화한 생명체들에게 안락한 집이 되어준다.
---「13장, [복잡한 생태계를 올바로 이해한다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