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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 지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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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도서]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정아은 저 문예출판사
10% 13,500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0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412쪽 | 440g | 140*210*20mm
ISBN13 9788931022377
ISBN10 8931022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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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는 창에 한쪽 팔을 기대고 목을 양옆으로 움직였다. 민주의 사랑. 그것을 누가 믿는단 말인가. 민주는 보이는 모든 걸 사랑하는 종족이다. 우울증과 경계선 인격장애, 공황장애. 수많은 질병을 짊어진 채 만나는 생물들에게 잡아먹을 듯 덤벼든다. 지성은 상대에게 제 인생을 확 끼얹어버리는 듯한 민주가 부담스럽고 불길했다. 사랑한다니. 그런 얼굴로, 귀족처럼 꼿꼿이 앉아 만인 앞에서 명령하듯 제 감정을 공표하다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손을 내밀면 확 끌어당겨 순간을 만끽한 뒤 곧바로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것을 아는데 어찌 그 손을 잡는단 말인가.
--- p.78

“잘 봐. 한계에 갇혀 있는 건 형이야. 형이 학문에 갇혀 있는 거지. 내가 진짜로 살고 있는 거고. 형이야말로 그 함정에서 빠져나와. 말, 글,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지금 숨 쉬고, 말하고, 움직이는 몸, 그게 형이잖아? 그게 형이 그토록 좋아하는 실존이라고. 형한테 시뻘겋게 마음을 드러내는 이 여자!”
민주가 한 손으로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소리를 높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진심을 토해내는 이 여자가 더 살아 있는 거라고!”
--- p.137

“천천히.”
채리의 입에서 나온 말과 함께 그의 손동작이 느려졌다. 눈을 감은 채 그의 손길을 음미하던 채리의 손이 일순간 그의 허리께를 향했고, 준비 없이 허를 찔린 그가 비명을 질렀다.
“아, 뭐 해.”
“뭐 하는 건지 알잖아.”
날아갈 듯 말하며 환하게 웃는 채리. 그 표정과 채리가 하고 있는 행동의 부조화가 만들어내는 아찔함에 취해 그의 의식이 혼곤해졌다. 꼭 술에 취한 것 같구나, 생각하면서 그는 채리의 머리를 거칠게 젖혔다.
--- p.142~143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존재의 모든 측면을 정당화하며 살아온 자는, 더 이상 글쓰기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밥을 벌고 무엇으로 허허벌판 같은 생을 채워가야 하는가? 그는 자신에게 있는 글쓰기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문학에 대한 열망이 지긋지긋했다. 자격을 박탈당했는데 왜 재능은 사라지지 않는가. 왜 열망은 수그러들지 않는가.
--- p.261

생각해보면 그날 아침 민주의 연기는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간밤에 있었던 일을 국어책 읽듯 딱딱하게 늘어놓았다. 민주는 어떠한 경우에도 품격 있고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족속이었다. 모든 장면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에 미학을 부여하는 완벽주의자. 그러나 그는 평소와 다른 민주의 언행이 당황한 데서 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담대함의 대명사 같은 민주라도 과음 때문에 일어난 돌발상황 앞에서는 어쩔 줄 모르는 거라고. 그리고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휩싸여, 그의 사고회로는 막혀버렸다.
--- p.293~294

여성의 육체에 멋대로 손대고 제 것처럼 구는 것은 분명 범죄고 폭력이다. 폭력으로 분류돼 처벌받아야 한다. 지성은 그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가 없다. 남성들은 그 악습을 수십 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살아왔다. 사회의 상식이 급변했다면 그 변화 속도를 따라갈 기회를 조금이라도 마련해주어야 하지 않은가? 범죄가 아니라 여겨졌던 것을 범죄로 인식하고 갱생할 기간을 주어야 하지 않은가? 예전에는 터프함 또는 과격함으로 축소되고 용납되었던 크고 작은 범죄행위들을 속죄할 방법이 죽음 또는 사회적 매장밖에 없다면, 사회적 지위를 모두 잃고 낙인찍혀 남은 평생을 쓰레기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면, 어느 누가 성범죄자임을 인정하고 속죄하려 들겠는가.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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