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발효와 숙성을 주관해왔던 그녀가 술독 안에서 스스로 발효되고 숙성되어가는 동안, 그녀의 마음도 술의 화학 변화 만큼이나 복잡다단하게 변해갔다. 처음엔 자신을 술독 밖으로 꺼내주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신력을 동원해 그를 행복하게 해주겠노라 결심했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난 후에는, 자신을 술독 밖으로 꺼내준 이에 대한 절실함으로 “신의 자리를 양보하겠노라” 맹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에 나가지 못한 백 년이라는 세월은 신인 그녀에게도 ‘원망과 분노’라는 신들의 영역 밖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하여 그녀는 결심했다.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이는, 영원히 나의 노예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려 백 년 만에, 그녀를 술독 밖으로 꺼낸 이가 생긴다.
--- 「어느 집이나 백 년 된 비밀 하나쯤 가지고 있으니까」 중에서
“무슨 생각 했어요?”
“옛날 생각.”
“얼마나 옛날이요?”
“……. 글쎄…… 백 원으로 집 살 수 있던 시절?”
가승이가 웃자 수블아씨의 미간 주름이 조금 펴졌다.
“정말 백 원으로 집도 살 수 있었어요?”
“옛날엔 그랬지.”
사실 수블아씨의 기억은 더 과거에 닿아있었지만, 그냥 그렇다고 해두었다. 자신이 이렇게 심술궂지 않던 시절. 타인의 사정에 관심이 많던 시절. 몇 달에 한 번씩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던 벗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바다 위에 배가 서로 맞닿아 하나의 거대한 땅을 이루던 바다 위의 시장, 파시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저 남쪽에서 조기떼가 밀고 올라오면 온 바다가 다 조기울음으로 가득 찼거든.”
“조기는 어떻게 우는데요?”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도 했었다. ‘직접 들어 봐.’ 그는 인간 지산하의 손을 잡고 바다로 데려가주었지. 바다를 처음 본 건 아니었는데, 그런 바다는 처음이었다. 기이한 소리로 가득 찬 바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조기의 울음이라고 했다. 이 땅 사람들의 귀엔 왜 모든 것이 울음소리로 들렸을까. 새가 울고, 조기가 울고, 심지어 죽은 귀신도 운다. 이 땅에는 우는 존재들이 너무 많았다.
“나도 들어볼 수 있어요?”
조기떼는 철쭉 피는 계절에 운다. 이미 너무 늦었지. 대신 수블아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조기 울음소리를 흉내 냈고, 가승이가 가만히 듣더니, 개구리 울음소리 같다고 했다. 햇살을 받아 따뜻하던 모래가 천천히 식어갔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만」 중에서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해준은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 않았다. 누군가 기거하는 집에 가끔은 식구 수보다 더 많은 가신들이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응원하며 같이 살아간다는 것도 몰랐다. 전 세계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 술신의 저주 아닌 저주에 걸려 억지로 술을 빚게 될 줄도 몰랐다. 술을 빚어 누군가의 삶을 구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 해준 앞에 너무나 명확하게 펼쳐져 있다. 해서 알려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며 보고 느껴온 것이 밀리나가 살아갈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아직 만나보지 못한 기적이 분명 있을 거라고.
--- 「먼 곳에서 온 이야기」 중에서
“가신도 죽으면, 당신이 데려갑니까?”
“가신에겐 죽음이 허락되지 않아. 저이는 그냥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안내할 영혼이나 먼지 한 톨의 육신도 없이. 그냥 이곳에 있었던 흔적 자체가 다 지워지는 것이지.”
아아. 그랬지. 해준은 새삼 두 존재 사이에 놓인 크나큰 간극을 깨닫는다. 인간은 병들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혹은 노쇠해 죽음을 맞이하지만, 신은 다르다. 천천히 소멸하는 방법을 택하든, 아니면 스스로 소멸의 시기를 정하든,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완벽한 無가 되는 것이다.
“아마 여기 모인 가신들 대부분이 어렴풋이 눈치 챘을 거야. 오늘이 조왕신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하지만 신들에겐 죽음처럼 안타깝거나 가혹한 일은 아니거든. 끝까지 웃고 마시고 떠들면서 배웅할 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들이 왜 이 연회에 참석했는지도 잊은 채, 서로의 안부를 묻고 헤어지겠지.”
“당신도 잊게 됩니까?”
“그건 좀 가혹하잖아. 한 명은…… 기억해야지.”
그 한 명이 사신이라면…… 이 자는 얼마나 많은 신들의 소멸을 지켜봤던 걸까. 태연한 얼굴로 분초를 재며 인간의 생명을 거둬가는 사신의 얼굴이, 오늘은 조금 달라보였다.
--- 「이별을 준비하는 그들만의 자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