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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중고도서

운명이다

: 노무현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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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4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364쪽 | 620g | 153*224*30mm
ISBN13 9788971993873
ISBN10 8971993871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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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고맙습니다
노무현 자서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프롤로그: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

제1부 출세

1. 유년의 기억
2. 은인 김지태 선생
3. 내 인생의 부산상고
4. 막노동판에서
5. 권양숙을 만나다
6. 사법고시 합격
7. 세속의 변호사

제2부 꿈

1. 부림사건
2. 운동 전문 변호사
3. 사람 사는 세상
4. 분열과 좌절
5. 국회의원이 되다
6. 청문회 스타
7. 의원직 사퇴
8. 김영삼과 결별하다
9. 『조선일보』와 싸우다
10. 첫번째 낙선
11. 야권통합
12. 지방자치실무연구소
13. 두번째 낙선
14. 세번째 낙선
15. 정권교체의 감격
16. 다시 국회로
17. 종로를 떠나다
18. 자동차 산업 살리기
19. 네번째 낙선, 노사모의 탄생
20. 해양수산부 장관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1.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하다
2. 광주의 기적
3. 김대중 대통령과 나
4. 후보단일화
5. 단일화 파기의 우여곡절
6. 대통령 당선
7. 구시대의 막차
8.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거짓말
9. 양극화
10. 부동산 정책
11. 방폐장과 세종시
12. 대북송금특검법
13. 탄핵
14. 이라크 파병
15. 남북관계의 핵심은 신뢰
16. 한미 자유무역협정
17. 남북정상회담
18. 국정원장 독대보고
19. 검찰 개혁의 실패
20. 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
21. 대연정 제안
22. 원칙 잃은 패배
23. 청와대를 떠나다

제4부 작별

1. 귀향
2. 봉하오리쌀
3. 화포천, 둠벙, 무논
4. 장군차
5. 국가기록물 사건
6. 수렁에 빠지다
7. 노무현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이다
8. 마지막으로 본 세상

에필로그: 청년의 죽음

저자 소개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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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중학교에서 나는 나름대로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교모를 비뚜룸하게 쓰고 다니면서 불량한 장난도 많이 쳤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자주 학교를 빼먹었다. 몸이 아파 결석한 날도 많았다. 큰형님 덕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좀 아는 편이라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제법 있었다. 그러다가 큰 사고를 냈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그해 2월에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앞두고 모든 학교가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짓기 행사를 열었다. 진영중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이 부당한 일이니 백지를 내자고 급우들을 선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기 싫은 터에 잘됐다면서 모두들 백지를 냈다. 나는 택(턱)도 없다는 뜻으로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라 쓰고 이름을 적어서 냈다. 감독하러 들어온 여선생님이 울음을 터뜨렸다.

괘씸죄에 걸려 교무실에서 종일 벌을 섰다. 그런데 그날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선생님이 신문을 보면서 말했다. “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고 하늘이 내신 분이야” 더 반감이 생겨서 반성문을 쓰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다. 큰형님이 꾸지람을 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반성문을 쓸 일이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버텨야지, 사내놈이 왜 도망을 치느냐는 것이다. 다시 학교에 갔다. 그러나 반성문은 끝내 쓰지 않고 경위서만 냈다. 다행히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교감선생님이 나를 보고 “조그만 놈이 우월감이 굉장하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그땐 몰랐다. ---pp.48~49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
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민주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일 것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날 잘못된 역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장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소유자가 정권까지 잡겠다고 했다. 그런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자니 너무나 힘들었다. ---p.52

고시 공부
모든 것이 힘들었다. 3년 내내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 하숙, 자취, 가정교사, 빈 공장 숙직실을 전전했다. 부산 영주동 작은누님 집에서 비비고 산 날도 많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지나고 보면 예쁜 추억으로 채색되기도 한다지만, 그때는 너무 서럽고 괴로워 수없이 눈물을 쏟았다.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초겨울 어느 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학교 교실에서 두 밤을 혼자 지냈다. 밤새껏 이를 악물고 떨면서 추위를 견뎠다. 다음날 이가 아파 밥을 한 숟갈도 먹지 못했다. 농협 입사시험에 떨어졌다.---pp.54~55

당장 먹고살기가 힘든 판이라 공부가 잘 될 리 없었다. 수험서도 헌 책 몇 권뿐이었다. 책값을 벌고 집에도 보탬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친구와 같이 ‘한국비료’ 공장 건설 공사가 한창이던 울산으로 갔다. 일꾼들 합숙소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자면서 일당 180원 막노동을 했다. 하지만 돈을 모을 수 없었다. 세 끼 밥값 105원을 제하면 겨우 75원이 남았다. 일자리가 없어 공치는 날도 많았다. 밥을 굶는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공사장에서 큰 못을 밟는 바람에 일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밀린 밥값 2,000원을 갚지 못하고 몰래 집으로 도망쳐 왔다. 울산역 플랫폼에서 누가 뒤꼭지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국회의원이 된 후 전국일용노동자조합 간부들을 여러 번 만났는데, 내 기억 속의 노동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의젓하고 당당했다. 노동조합도 아주 건강하게 잘 운영하고 있었다. 환경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꼈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직업적 자부심을 체득하면서, 사회에 대해서도 나름의 건전한 생각을 키우고 있었다. 버림받은 사람은 도덕적 성숙을 이루기 어렵다. 자기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자부심이 있어야 모범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책임 있는 주체로 참여시켜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기회, 참여, 책임…… 대통령을 하면서도 늘 이런 것들을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했다.

연애와 결혼
2년 동안 커피 한 잔 값 들이는 일 없이 맨입으로 연애를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화포천 둑길을 함께 걸었다. 밤하늘에 쏟아질듯 은하수가 흐르는 여름날, 벼 이삭에 매달린 이슬에 달빛이 떨어지면 들판 가득 은구슬을 뿌린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사이 논길을 따라 걷곤 했다. 아내는 그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푹 빠져 있었다. 『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두꺼운 소설을 끼고 살았다. 동네에 둘이 사?다고 소문이 났다. 우리 둘 말고는 처녀 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소문이 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서로 사랑했지만 혼인은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좋은 신랑감이 아니었다. 상고밖에 나오지 못한 시골뜨기가 고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붙들고 있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당시에는 60명만 뽑았기 때문에 서울법대를 나오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장모님 보시기에 나는, 귀한 딸 밥 굶기기에 딱 좋은 남자였다. 그런데도 재주 있는 막내가 고시에 붙을 것이라고 믿은 형님들은 나중에 학벌 좋고 집안 좋은 부잣집 처녀한테 장가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미리 김치국을 마셨다. 어머니는 아내의 친정아버지 전력 때문에 고시 합격해도 판검사 임용이 안 된다고 걱정하셨다.

이렇게 되자 우리는 티격태격 싸움을 했다. 스스로 크게 출세할 거라고 믿었던 나는 무슨 큰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행세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희생을 무릅쓰고 백수건달이 될지도 모를 남자를 받아들였는데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했다. 매일 만났고 매일 다투었다. 그래도 우리는 물불 가리지 않고 서로 좋아했다. 결국 가족들도 우리를 인정해 주었다. 나와 권양숙은 1973년 1월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 건호와 딸 정연을 낳아 기르면서 36년 긴 세월을 함께 살았다. 처음 알게 된 때부터 계산하면 50년을 함께 한 셈이다. ---pp.61~62

사법고시 합격
아내가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은 벌레가 사람이 된 것만큼이나 큰 사건이었다. 돼지를 잡고 풍물을 치면서, 일주일 넘도록 마을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영 읍내 큰길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혼자 공부해 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해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나도 아내도, 그 순간만큼 큰 성취감과 행복을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그때만은 못했다. ---p.65

판사 생활
대전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모범적인 법관도 아니었고 우수한 판사도 아니었다. 판사 업무는 매우 단조로웠다. 아침마다 서기가 책상 왼쪽 모서리에 기록을 올려두면 나는 그것을 검토하고 메모해 오른쪽 모서리로 옮겨 놓곤 했다. 언제나 그렇게 똑같은 하루가 흘렀다. 선배 판사들을 따라다니면서 변호사들한테 밥 대접 술 대접을 받았다. 선배들이 접대를 잘 하지 않는 변호사를 두고 짠돌이라고 욕하는 것을 듣고 그런 변호사들을 골탕 먹일 못된 궁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한 판사였다. 닭 서리를 하다 잡혀온 젊은이나 소액의 ‘촌지’를 받았다가 기소된 하급 공무원들에게는 무죄나 집행유예를 주려고 애썼다. 사연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구속영장 청구 서류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대충 영장을 발부한 일도 있었다. 판결을 내릴 때 법원 직원의 청탁 때문에 영향을 받은 적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결국 1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판사를 그만두었다. 더 계속했더라도 훌륭한 판사가 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p.67

변호사 시절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나는 적당히 돈을 밝히고 인생을 즐기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사기 혐의로 남편이 구속된 아주머니에게 사건을 수임했다. 합의만 되면 변론도 필요 없는 사건이었다. 마침 사무실에 돈이 딱 떨어진 때라 합의를 종용하지도 않고 수임료 60만 원에 덜컥 사건을 맡고 얼른 접견을 다녀왔다. 다음날 합의를 본 의뢰인이 찾아와 수임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했다. 나는 변호사 수임 약정서를 보여주면서 이미 접견을 했기 때문에 수임료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랑이 끝에 발길을 돌리면서 그 아주머니가 말했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힌 이 한마디는 수십 년 동안 내게 고통을 주었다.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p.69

부림 사건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법정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한 고통을 거론하면서 공안기관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검사뿐만 아니라 판사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법정 분위기가 험악했다. 다음날 보자고 해서 검사를 만났더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느냐고 나를 힐난하면서 협박했다.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 죽었다고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나는 오기가 나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해 가며 싸웠다. 그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었다. ---p.78

인권 변호사: 민주화운동으로의 전환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무료 변론은 돈 좀 덜 벌면 그만이었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언제 어디로 끌려가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쇠고랑을 찰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조그만 농장이나 별장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자식을 외국 유학이라도 보내서, 공부를 다 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의 한을 풀어 보자고 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이렇게 양심과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나는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했다. 요정과 룸살롱 같은 고급 술집에는 발길을 끊었다. 일본까지 가서 교육을 받을 정도로 열성이었던 요트 타기도 그만두었다.

내가 한동안 빠져 있었던 2인승 요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크게 돈이 드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집이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여서 부대 비용도 별로 들지 않았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운동인 것도 아니었다.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모래알 씹히는 불어터진 라면을 먹어 가면서 하는, 거친 남자들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은 곧 돈이 많이 드는 것이나 한가지여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승용차를 두고 버스로 출퇴근하면서 고급 일식집 대신 시장통 국밥을 먹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사무실 사람들과 부산의 동지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다. ---p.81

일손이 모자라서 부림사건 때 제일 오래 불법구금을 당했던 송병곤 씨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그는 이 인연으로 지금까지도 문재인 변호사가 몸담은 법무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정말 마음이 곱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모든 일을 책임감 있게 처리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월급 받으며 편하게 사는 것 자체를 몹시 괴로워했다. 그를 지켜보면서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건호를 생각했다. 건호도 몇 년 지나면 대학에 갈 것이다. 그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 청년과 같은 길을 가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걸 못 본 체 하면서 어떻게든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살라고 할 것인가? 양심이니 정의니 말은 쉬웠지만, 내 아들한테 고난의 삶을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민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은 세상을 바로잡아야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받을지 모르는 고통을 예방하는 길이었다. 아들한테 권하기보다는 아버지인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pp.82~83

산재 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노동자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 작업장에서 일한 탓에 난청이 된 것이다. 자기 자신도 산업재해 피해자이면서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산재 사건 증인으로 나온 노동자, 산재 사건 재판을 하면서 산재로 난청이 된 증인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짜증을 내는 판사와 변호사, 모두가 부조리극에 나온 배우 같았다. 나도 가해자의 한 사람인 것 같아서 참담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변호사로서 쉽게 돈을 버는 것이 죄 짓는 일처럼 느껴졌다.

거제도에서 어떤 노동자가 찾아왔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조합장이 되었는데, 보안대 거제 파견대장이 사무실로 불러 다짜고짜 정강이를 수없이 걷어찼다는 것이다. 바지를 올려보니 다리가 온통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는 겁이 나서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했다. 관할 마산지방노동청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냈다. 그런데 또 맞을까 겁이 나 자기가 맞은 사실을 빼 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그를 설득해 그 부분을 기어코 집어넣었다. 그러자 마산 보안대 간부가 찾아와 거제 파견대장이 옷을 벗게 생겼으니 구제신청을 취하해 달라고 사정했다. 그 가족이 불쌍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실직한 노동자의 가족이 겪는 고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협박하고 회유했는지 당사자까지 구제신청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분통 터질 일이었다. 나는 끝까지 그 노동자를 붙들어 결국 복직을 시키고 조합장 자리도 되찾도록 했다. ---pp.87~88

87년 대통령 선거와 진보 진영의 분열
1987년 12월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세력의 분열과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던 민주진영은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평민당), 그리고 백기완 선생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운 진보정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김종필 총재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 선거에 출전함으로써 보수세력도 분열되었다.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양김’의 후보단일화였으며, 이것이 대선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지도자는 끝내 분열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지만 청년, 학생, 노동, 종교 등 여러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던 부산의 재야 세력도 분열되었다. 부산 재야에는 김대중 후보에게 더 큰 정서적 정책적 연대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선 가능성만 두고 볼 때 김영삼 후보로 단일화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부산에서 우리끼리 토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치의 중심은 서울이었다. 바닥 모를 무력감을 느꼈다. 모두들 분열과 갈등을 두려워했다. 그래서인지 서로 조심해서 크게 다투지는 않았다. 그러나 끝까지 분열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파’, 내심 김영삼 후보로 단일화하기를 원한 ‘후보단일화파’, 그리고 백기완 선생 지지파로 나뉘었다. 대통령 선거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았다. 선거가 임박하자 6월 민주항쟁을 한 마음으로 치러냈던 사람들 사이에도 분열과 대립이 점차 심각해졌다. 양극단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서로 모략하는 일도 있었다. 공개적인 논의를 하지 않고 어디엔가 가담해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래도 부산 재야의 본류는 중립을 지켰다. 엄밀하게 말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94~95쪽)

제도권 정치로
나는 좋은 남편도 아니었지만 좋은 아버지였던 것도 아니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후로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쓰지 못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키웠는데, 정치를 하는 동안 집에서 아침 먹을 때 말고는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다. 네 식구 모두 모이는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아내는 이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건호가 군에 갈 때 몇 번이나 약속을 하고서도 가족사진 찍을 시간을 내지 못해서 결국은 옛날 찍었던 사진을 가지고 갔다. 면회도 한 번밖에 가지 않았다. 보통 국민들이 돈 걱정 취직 걱정 덜 하고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치의 목적인데, 정작 정치를 하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정치에 무엇을 바쳤는지는 헤아릴 수가 없다.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렵다. 그런 것이 정치인의 삶이다. 아내가 정치 입문을 그토록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본능적으로 예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결국 정치를 함으로써 아내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사는 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김영삼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소박하게 판단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들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을 한 동지들과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대선 패배로 인한 6월 민주항쟁의 좌절을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었다. 더 진보적인 김대중 총재의 정책노선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려면 통일민주당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선되기에 수월한 지역구를 고르라는 김영삼 총재의 호의를 사양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부산 동구를 선택했다. 상대가 모두들 기피하던 전두환 정권의 실세 허삼수 씨였기에 거기에는 지원자가 없었다. 이왕이면 센 상대와 대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전두환 대통령의 왼팔로 통한 5공화국 독재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화운동 세력을 대표해서 이기고 싶었다. 허삼수 선거캠프에는 주먹들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거운동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허삼수 후보 선거사무소를 찾아갔다. 가서 인사를 하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어 보자고 말한 다음 아무 일없이 돌아왔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pp.97~98

원진레이온 사건
그런데 통일민주당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아한 언행으로 국민의 신망을 받았던 평화민주당 박영숙 부총재와 함께 현장 조사를 나갔다. 우리는 회사를 추궁해 직업병임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합의서를 받아 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다시 회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휠체어에 앉은 사지마비 환자를 만났다. 어린 딸이 곁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안면 근육이 전부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려 했다. 열서넛 먹어 보이는 딸이 내 차 유리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우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 아버지의 일?러지고 굳어 버린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괴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988년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하면서 참담한 노동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있는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 국회의원회관 사무실로 수없이 많은 격려 전화가 왔다. 그러나 당장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pp.102~103

5공비리특위 청문회
당에서 정주영 회장이 고령인 데다 업적이 많은 기업인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증인들한테는 고함을 치고 욕설까지 했던 의원들이 정주영 회장에게는 회장님 소리를 해 가며 예우를 했다. 문을 열어 주며 과잉 친절을 베푸는 의원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확실히 돈이 말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국민들은 일해재단 문제를 ‘강제 모금’이 아닌 ‘정경유착’으로 판단했다. 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국민들은 법률과 상식을 짓밟으면서 권력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과, 그 권력에 야합하여 이권을 챙겨먹은 기업인 모두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으며,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이 분노를 대변해 주기를 기대했다. 나는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증인 심문을 했다.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 주지 않았다.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고 말했던 정주영 회장이 마침내 말문이 막혔다. 결국 바른 말을 하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이게 되었던 것은 국민들과 눈높이가 맞았기 때문이었을 뿐,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집과 의원회관 전화는 아예 불통이 되었다. 내 기사가 실리지 않는 신문 잡지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정치인으로서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런데 보도가 하나같이 입지전적 성공담으로 흘렀다. 집이 가난해 대학도 못 간 사람이 사법고시에 붙었고 국회의원이 되었고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는 식이었다. 불우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사회 구조를 변혁하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목표라고, 내가 주로 하는 일이 그것이라고 누누이 강조를 했지만 기사에는 모조리 잘려나가고 없었다. ---pp.105~106

국회의원직 사퇴
1989년 3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가로수들이 화창한 봄볕 아래서 싱그럽게 어린잎을 피워 올렸고 하늘빛도 무척이나 고왔다. 오전 본회의를 마치고 국회 정문을 빠져나오다가 버스 정류장에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 우두커니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수행비서가 상계동 철거민들인데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려났다고 했다. 플래카드를 둘둘 말아들고 맥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사람들 앞으로 국회의원들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슬픔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이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막는 국회에 몸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하는 일이 혹시 정의롭지 못한 권력을 위한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양심의 쓰라림뿐이었다. 문득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pp.109~110

3당합당 반대
이해찬, 이상수, 김정길, 이철 의원과 함께 마포에 비밀 사무실을 얻었다. 모임 이름을 ‘정치발전연구회’로 지었다. 우리는 각자 소속 정당 안에서 야권통합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3당합당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맞았다.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세 사람이 상식을 뛰어넘어 세 정당의 합당을 전격 선언한 것이다. 1990년 1월 국회 개헌선을 확보한 거대여당 민자당이 출범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통일민주당의 합당결의 대회장에서 주먹을 쥐고 외쳤다.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당 내부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보스가 결정하면 무엇이든 모두 우르르 따라갔다.

3당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첫째,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정치사에 심각한 ?유증을 남겼다. 지역구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화되었다. 둘째, 우리 정치를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뜨렸다. 철새 정치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려고 당을 옮겨 다니는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정치 지도자가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3당합당으로 인해 한국정치는 적나라한 기회주의 문화에 휩쓸려 들어갔다. 소신도 원칙도 없이 국회의원 당선이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떼를 지어 보따리를 싸들고 이 당 저 당 돌아다니는 것이 별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20년 동안 나는 쉼 없이 싸웠다. 지역 분열주의에 맞섰고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내세웠던 구호 ‘원칙과 통합’은 이 기나긴 싸움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3당합당은 국가적 분열이자 민주 세력의 분열이었기에, 분열에 가담할 수 없어서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선 노동 현장에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영남과 서울에서 옛 통일민주당 세력을 되살리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청문회에서 얻은 명성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국회 활동도 뒤로 밀어 버렸다. 민자당이 국회만 열면 날치기를 하니 국회에서는 할 일도 없었다. 전국을 다니면서 지구당을 창당했다. 사람들을 모아 단합대회를 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pp.115~116

14대 총선 낙선
4년 전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병 환자’라고 비난했던 허삼수 후보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김영삼 총재님을 모시고 부산 발전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겠다”고 했다. 4년 전 그를 ‘반란군 총잡이’로 규정하고 “국회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민자당 김영삼 총재는 지원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삼수 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뽑아 주시면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시려면 허삼수 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주십시오.” 뽕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었다. 나에게는 김영삼 총재를 이길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국회의원 자리를 잃었다. ---p.123

김영삼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을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직의 탁월한 보스’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도망갔을 때, 어쩌다 보니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긴 말 할 것 없이 일단 만나자고 했다. 상도동으로 갔더니 김영삼 총재가 손님들을 다 내보냈다. 그가 뭐라고 하든 단호한 사퇴 의사를 밝히려고 마음먹었지만 바늘방석에 앉은 심정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뜻밖에도 당신 마음을 다 이해한다며 나를 위로했다. 노 의원 같은 사람이 견디기에 정치판이 너무 험하다고 했다. 어디 가서 낚시라도 하라며 200만 원이 든 봉투를 쥐어 주었다. 사퇴 철회 문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어 부하로 만드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p.126

당 최고의원 당선
1993년 3월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대중 총재가 없는 첫 전당대회였다. 이기택 씨가 당 대표에 출마했다. 나는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했다. 대의원 한 명이 네 사람씩 찍는 선거였는데 나는 정치적 입지가 없었다. 통합 협상과 국회의원 공천 과정에서 유별나고 거칠게 싸웠기 때문에 당 주류인 동교동계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기택 대표 쪽에도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독자적으로 해보려 했지만 돈과 조직이 없어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곁불을 쬐며 선거운동을 했다.

이기택 대표가 사람들을 모아 밥을 먹는 자리에 끼어 밥을 얻어먹었다. 이기택 대표와 김정길 의원의 연설이 끝나고 나면 슬그머니 일어서서 나도 연설을 했다. 그때마다 김정길 의원이 나를 소개해 주었다. “품안의 자식만 귀한 게 아닙니다. 새어머니 등쌀에 구박을 받고 나가서 얻어먹고 다녀도, 나중에 효도하는 수가 있습니다.” 나는 동정표를 많이 얻어서 5등으로 당선되었다. 동교동계와 이기택계가 손잡고 최고위원 후보 세 명을 밀었다. 김정길 의원이 1등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 영남 쪽에 한 표를 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호남 대의원들이 노무현 불쌍하다고 표를 너무 많이 주었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김정길 의원이 떨어져 버렸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김정길 의원은 그래도 나를 원망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는 고마운 평생 동지였다. ---pp.128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정보화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컴퓨터에 재미를 붙였다. 연구소에 많은 자료가 쌓이고 있었다. 10명의 연구원들이 한 달에 한 차례 이상 세미나를 했다. 발표와 토론 자료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개인 정보와 전문가들이 만든 참고 자료, 수입과 지출 관련 정보들이 축적되었다. 그런데 이 정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인명 ?료는 주소와 전화번호 변경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각자 하는 일에 대한 보고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 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유용한 정보를 일상적으로 업데이트하고 누구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그런 시스템을 돌리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150만 원 예산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굴러가면서 눈덩이처럼 커졌다. 비용이 700만 원으로 늘어나더니 급기야 6,000만 원짜리 프로젝트가 되었다. 나중에는 그것도 다 걷어치우고 2억 원을 개발비로 투입해서 ‘노하우’라는 업무표준화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이 프로그램을 대통령후보 때 사용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는 ‘e-지원’이라는 청와대 업무관리 시스템으로 발전시켰다. 특허도 받았고 임기 말에는 중앙정부 행정부처에도 확산시켰다.

‘노하우’를 개발하면서 데이터베이스를 공부했고 컴퓨터 프로그램의 종류와 원리를 익혔다. 정치 활동과 연구소의 업무 전반에 대해 직접 직무분석을 했다. 정보 축적과 재활용 시스템을 만드는 프로그램 기획안도 내 손으로 직접 썼다. 내가 원하는 시스템 전체의 구조와 요구 사항들을 종이에 일일이 적었다. 두툼한 바인더로 10권이나 되는 주문서를 만들었다. A4지로 300쪽 정도 분량이었다. 그 다음에는 서류도 없이 받아 적게 하면서 다섯 시간에 걸쳐 설명했더니 프로그래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어 오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확인했더니, 이 사람들이 나를 만나는 것 자체에 겁을 먹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정, 인명 정보, 자료와 회계를 전부 통합했다. 인명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수천, 수만 개의 명부를 생산하고 축적하는 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품화해서 투자비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업무 분석과 표준화가 지나치게 세밀해서 상품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지식공유 시스템의 기본 개념을 알게 되었다. ---pp.131~132

기회주의와의 싸움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씨는 원래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회창 씨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로 김영삼 대통령의 초법적 국정운영에 반기를 들어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절묘하게 타협을 한 것이다.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잡게 만들었던 것은 대구와 충청도의 이반이었다.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 건국 이래 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권력의 편에 서야만 비로소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역사였다. 권력에 맞섰던 사람 가운데 패가망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손들의 앞길까지도 막아 버렸다. 적어도 무사하게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권력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기회주의 역사가 무려 600년이었다. 결국 이회창 씨도 조순 씨도 권력에 줄을 서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pp.140~141

1998년 종로구 국회의원 당선
서울시장 꿈을 버리지 못했다. 당에서는 한광옥 씨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당내경선 후보로 등록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가 여론조사 결과를 드렸다. 한광옥 씨는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를 이기지 못하지만 나는 이기는 조사 결과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시장보다 종로지구당을 맡으라고 권했다. 며칠 후 이강래 정무수석이 찾아와 고건 씨를 후보로 하는 것이 대통령 뜻이라고 했다. 그가 ‘성공시대’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한 후로 지지율이 솟구쳤다는 것이다. 나는 이 결정에 승복하고 종로지구당을 맡았다.

매몰차게 공격했던 과거사 때문에 무척 민망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조직을 인수받았다. 장차 종로에 복귀할 생각이 있어서 조직을 잘 넘겨 주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종찬 부총재는 옛날 일을 하나도 따지지 않고 성의껏 조직을 인계하고 당원들을 설득해 주었다. 덕분에 별다른 애로사항 없이 보궐선거를 잘 치러 낼 수 있었다. 이광재, 안희정, 백원우 등 젊은 참모들이 모두 종로에 와서 조직을 인수하고 선거운동 준비를 했다. 1998년 7월 21일,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 두 번, 부산시장 선거 한 번, 모두 세 번 낙선한 끝에 맛본 10년 만의 승리였다. 이 선거를 치르면서, 그동안 너무 내 논리만 가지고 까다롭게 정치를 해 온 것을 반성했다. 이종찬 씨에 대해서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p.149

제16대 총선을 부산에서 출마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1999년 2월 9일,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지 반 년, 총선을 1년 2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지역 분열을 더 부추겨서는 안 됩니다. 동서통합을 위해서 부산 경남 지역으로 갑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심 ‘이익을 위한 정치’와는 다른 ‘희생의 정치’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언론보도는 내 희망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이종찬 씨에게 지역구를 돌려주기로 밀약”, “당내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 “여당 지도부의 동진 정책 전략의 일환”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나마 “대권을 향한 노무현의 승부수”라는 기사가 제일 잘 써 준 것이었다. 안타까움을 넘어 좌절감을 느꼈다. 이종찬 씨는 종로 지역구를 되찾으려 하지 않았다. 나도 미리 그와 상의하지 않았다. 선거를 1년 넘게 앞두고 발표한 것은 순전히 한나라당의 영남권 집회 때문이었다. 어차피 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하루라도 빨리 경고를 하고 싶어서 그 시점을 택했던 것이다.

종로구청 강당에 지구당 당직자와 지역 유지들이 모였다. 참으로 미안한 자리였다. 종로에 국회의원다운 국회의원이 왔다고 좋아한 당원이 많았다. 그런데 6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부산으로 간다고 선언을 했으니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나도 슬펐다. 종로는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동네 생김새가 그림 같았다. 롯데호텔에서 바라보는 청와대의 모습도 좋았고, 곳곳에 체육공원과 약수터가 있어서 건강 관리와 선거운동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당직 인선을 발표한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 하는 것이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간곡하게 용서를 청했다. 반쪽 정권을 극복하려면 여당이 꼭 전국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분위기가 숙연해지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들이 전부 박수를 쳤다. 왈칵 눈물이 났다. 찔끔이 아니고 펑펑 쏟아졌다. 왜 그리 울었는지 모르겠다. ---pp.151~152

노사모
노사모는 좌절감에 빠졌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시민들 스스로 노무현을 지지하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조금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의 성원을 받는 것은 행복한 특권이었다. 2001년 5월 기자간담회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갈 뜻을 밝혔을 때 내가 마음으로 기댄 것은 바로 노사모의 성원이었다.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팬클럽 수준을 넘어 전업을 하다시피 뛰어든 청년들이 있었다. 몇 달씩 휴직하거나 고시공부를 중단하고 자원봉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선거를 돕기 위해 사표를 내고 선거가 끝난 다음 다른 직장을 구한 사람까지 있었다. 모두 남의 자식들이라 무척 신경이 쓰였다. ---p.165

노사모는 민주당 국민경선 승리의 주역이었고, 대선 승리의 견인차가 되었다. 대통령을 하면서 국민들의 신임을 잃었을 때도 변함없이 나를 지켜 주었다. 봉하마을 생태농업과 숲 가꾸기, 장군차 심기와 화포천 청소를 할 때는 자원봉사자로 함께 했다. 심지어는 나의 잘못과 흠결이 드러났을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노사모는 내가 검찰에 소환되어 봉하 집을 나설 때 버스 앞에 노란 국화 꽃잎을 뿌려 주었다. 피의자로 조사를 받은 그 긴 시간 내내 검찰청사 앞에서 노란풍선을 들고 기다려 주었다. 노무현을 버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내 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노사모였다. ---p.167

2002년 대통령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
후보는 일곱이었다. 이인제, 김근태,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유종근, 노무현. 내 캠프가 제일 초라했다. 경선 캠프에 국회의원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후보인 나도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당원 조직도 취약했고 돈도 없었다. 노사모와 부산상고 동문회가 있었지만 모두 비정치적인 조직이었다. 그러나 노사모는 일당백의 활약을 했다. 노사모는 수십만 명의 선거인단 참여 신청서를 모았으며 선거인단으로 뽑힌 사람들을 찾아가 투표 참여를 부탁했다. 영남 노사모는 호남 선거인단에게, 호남 노사모는 영남 선거인단에게 눈물겨운 호소를 담은 편지를 직접 손으로 써서 보냈다. 문성근, 명계남 씨와 같은 유명인사들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선거인단을 한 사람씩 방문해 무릎을 땅에 대고 노무현을 도와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내가 후보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2002년 3월 9일 토요일, 제주도에서 첫 경선을 했다. 여론조사에서 절대강자는 없었고 실제 득표도 그러했다. 조직력이 강했던 한화갑 후보가 1위, 이인제 후보가 2위, 내가 3위, 정동영 후보가 4위를 했다. 표 차이는 크지 않았다. 다음날 울산 경선에서는 내가 1위를 했다. 첫 주말 2연전 결과를 합산하자 근소한 차이로 내가 1등이 되었다. 울산은 조직이 전혀 없다시피 했는데 부산상고 동기생인 이재필을 비롯한 동문들이 노사모의 코치를 받아가며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어떤 후보는 호텔방에 선거인단을 한 사람씩 불러 돈봉투를 쥐어 주었는데, 같은 시간에 부산상고 동문 선후배의 부인들은 선거인단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노무현 지지를 읍소했다. 열정과 진심이 돈과 조직을 이긴 것이다. ---p.183

광주 염주종합체육관에서 실시한 경선에는 선거인단 1,572명이 참가했다. 투표율이 무려 81%였다. 광주 전남의 대표 정치인이던 한화갑 후보를 3위로 밀어내고 득표율 37.9%, 595표를 얻어 1등을 했다. 2위 이인제 후보보다 104표를 더 받았다. 부산 출신 원외 정치인 노무현이 민주 진영의 심장 광주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압승을 거둔 것이다. 스탠드에서 가슴을 졸였던 지지자와 자원봉사자들이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민주당 국민경선은 사실상 여기서 끝났다. ‘이인제 대세론’은 언론과 정치인들이 만든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들은 기회주의자를 용납하기는 하지만 지도자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p.187

미국 방문 문제
기나긴 논란 끝에 미국 방문 문제를 정리했다. “갈 일이 있으면 간다. 일이 없어도 한가하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바쁜데 일도 없으면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갈 일도 없고 바쁘기도 해서 결국 미국을 가지 않은 채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미국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일수록 더 그랬다.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국민들이 대통령후보가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근거 없는 불안감.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이런 것에 휘둘려 일도 없이 사진 찍으려고 미국에 가는 것은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방문을 대통령 선거 후로 미루었다. ---p.187

김대중 대통령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였다. 우리 역사에 그런 지도자는 없었다. 정말 오랜 기간 동안 독재와 싸웠다. 암살 위기도 겪었다. 구속당하고 연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래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국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런 사람은 보통 투표를 할 필요도 없는 수준의 지도자가 된다. 건국의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 바츨라프 하벨, 레흐 바웬사 대통령이 모두 그랬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민주세력은 분열을 거듭했고 냉전시대 독재정권은 민주세력을 마치 공산주의자인 것처럼 그 이미지에 덧칠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민주주의 지도자가 아니라 친북인사 또는 용공분자인 것처럼 잘못 보았다. 게다가 호남인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과 지역감정까지 작용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국민의 지도자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에서 그런 것처럼 나라 안에서도 국보급 지도자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pp.188~189

무엇보다 김대중 대통령은 독서를 많이 하는 지도자였다. 세종대왕의 리더십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저자가 서문에 이렇게 써 놓은 것을 보았다. “세종대왕은 책을 많이 보면서 거기서 정책을 찾곤 했는데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아주 잘못 안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 계실 때 큰 방 하나가 통째로 서고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감옥에 갇히고 자택에 불법 연금되어 있었던 시기에 독서를 많이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그런 엉뚱한 소리를 써 놓은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냥 민주투사가 아니고 뛰어난 사상가였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지식을 전략적으로 요령 있게 활용하는 지혜까지 지닌 특별한 지도자였다. 국민들이 그것을 잘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p.190

2002년 대선
그는 불과 넉 달 전만 해도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였다. 손을 잡고 지원유세를 했던 나는 말할 것도 없었고, 평범한 국민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지기는 했지만, 그는 밝은 내일이 약속된 개혁진영의 촉망받는 젊은 정치 지도자였다. 아마도 후보단일화를 해야만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신념과 충정의 발로였을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수 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정치적으로 좋은 결과를 안겨 주지는 않았다. 조만간 수십 명의 후단협 국회의원들이 뒤를 따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날 밤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갑자기 후원금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내 홈페이지에 접속해 10만원 내외의 소액 후원금을 보냈다. 이날 밤 들어온 후원금이 7,000만 원을 넘었다. 다음날은 1억 원을 넘겼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김민석 의원의 탈당 사건이 나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마음 어느 곳을 건드린 것 같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의사 표시를 하고 참여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이 사건으로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지지율이 상승 흐름을 탔다. 10월 20일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개혁국민정당이 창당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이 정당은 인터넷 당원 투표를 해서 민주당 후보인 노무현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서 문성근 씨의 격정적인 연설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났다. 선거방송 광고에 나간 것이 바로 이 장면이었다.---pp.194~195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은 후보단일화의 정신에 따라 정권을 함께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어디까지나 원칙적이고 추상적인 합의였다. 그런데 정몽준 씨가 유세장에 나오지 않았다. 이해찬 의원과 김원기 고문이 동분서주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권력분점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려고 했다. 국무총리, 국정원장 등 소위 4대 권력기관장을 포함한 내각 절반, 그리고 정부 산하단체와 공기업 기관장 절반의 인사권을 요구했다. 그것도 말이 아니라 문서로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이 요구를 거절했다. 서로 믿으면서 정권을 공동운영하는 것은 단일화 정신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국가권력을 물건 거래하듯 나눌 수는 없었다. 한 동안 줄다리기를 한 끝에 요구 수준이 낮아졌다. 문서가 아니라 말로라도 후보가 약속하라고 했다. 이것도 거절했다. 대통령은 글이나 말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글로 써 줄 수 없는 것은 말로도 약속할 수 없다고 했다. 선대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김원기 고문과 이해찬 의원이 우리가 자금과 조직이 약하기 때문에 5% 남짓한 여론조사 우위를 선거 종반까지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니 일단 문서가 아닌 말로 하되 비공개로 약속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그것도 거절했다. 비밀리에 약속하는 것도 문제였고, 그것을 나중에 지키지 않으면 더 문제가 될 것이었다.
김원기 고문이 최후의 수단을 강구했다. 후보가 구두 약속했다고 정몽준 씨에게 거짓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에, 사실은 후보가 반대했는데 후보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서 자기가 모든 비난과 책임을 뒤집어쓰고 정계 은퇴라도 할 테니 거짓말 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나는 화를 냈다. “대통령후보가 거짓 술수를 허락하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이 되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실패한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실패한 대통령후보로 남겠습니다.”

이것이 12월 9일 있었던 일이다. 내가 심하게 화를 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야기를 다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선대위에는 후보가 국가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한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원기 고문이 단단히 화가 났다. 선대위 직책을 사임하고 외국에나 가 버리겠다고 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12월 10일 오후 이회창, 권영길 후보와 경제 정책 토론을 했다. 12월 11일 실시한 여론조사를 그 다음날 아침에 받아 보았더니 격차가 더 벌어져 10%를 넘게 이기고 있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지원유세를 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나왔다.---pp.196~197

부동산 정책
강력한 LTV와 DTI 규제를 투입한 시점은 부동산 투기 열풍이 전국을 휩쓸던 2006년 11월 15일이었다. 당시 언론보도는 온통 부동산 뉴스밖에 없었다. 아파트 분양 사무소 앞에 사람들이 밤새 장사진을 쳤다. 불안해진 서민들이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 대출을 받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서울 강북의 소형 아파트와 지방의 아파트 값까지 덩달아 뛰어올랐다. 미국과 유럽 부동산 가격 하락이 시작되었고 종부세 본격 시행이 임박했으며 정부가 고강도 대책 투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내보냈지만 국민들은 정부를 믿지 않았다. 『한국일보』 경제부장 출신인 이백만 홍보수석이 청와대 브리핑에 글을 하나 올렸다. 지금 값이 너무 올라간 집을 샀다가는 자칫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서민들은 조금 기다렸다가 정부의 대책을 보고 나서 집을 사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는 글이었다.

언론들이 난리가 났다. 모든 미디어가 ‘집 사면 낭패’라는 제목을 달아 청와대와 홍보수석을 비난했다. 문책 경질하라는 사설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왜 강남에 사느냐는 인신공격과 아파트를 편법 분양받았다는 의혹 제기까지 나왔다. 민정수석실에서 조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백만 홍보수석에게 이메일을 보내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문제로 11·15조치의 초점이 ?려질 우려가 있다며 사표를 냈다. 11월 15일 강력한 대출 규제 조처를 시행해 투기자금의 입구를 막아 버렸다. 이백만 수석은 그 다음날 청와대를 떠났다. 그때 정부를 불신하면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들은 해가 바뀌기도 전에 정말로 큰 낭패를 보았다. 적기에 적절한 정책 수단을 투입해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면 이런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pp.222~224

신행정수도
묵은 과제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신행정수도 건설이었다. 나는 원외 정치인 시절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하면서 이 문제를 공부했다. 서울과 수도권이 돈과 자원과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이 계속되면 헌법이 명한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은 서울대로 인구 과밀화, 환경 악화, 혼잡비용 증가, 부동산 가격 폭등 때문에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게 되고, 지방은 지방대로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말라죽을 것이라는 우려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에 벌써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충청권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국가의 균형 발전을 이루고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수도의 행정 기능을 분리해 국토의 중심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p.227

대북 송금 특검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 불법송금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겠는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국민의 합의를 모아서 해 나가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었다. 대북송금이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수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4억 달러를 제공하고 다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더 받기로 했던 현대 쪽에서 그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되자 자꾸 말이 흘러나왔다. 야당과 보수언론이 주고받기를 하면서 의혹을 눈덩이처럼 부풀렸다.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 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옳다고 우기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서 주셔야 했다. “남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이다. 실정법 위반이 혹시 있었다고 해도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 법 위반은 작은 것이고 남북관계는 큰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통치행위론’을 내세워 검찰 수사를 막았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필요한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참모가 대통령 모르게 한 일까지 ‘통치행위론’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략)
송두환 특검은 송금의 절차적 위법성 문제만 정확하게 수사했다. 다른 것은 손대지 않아 남북관계에도 큰 타격은 없었다. 박지원 실장을 비롯해서 유죄 선고를 받은 모든 관련자들을 형이 확정되자마자 사면했다. 나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결과도 가장 바람직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박지원 실장에게도 전후사정을 다 설명해 드렸다. 김 대통령도 처음에는 서운해하셨지만 나중에는 이해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어떤 정치인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나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이간시키려 했다.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pp.231~233

언어 습관
무엇보다 말이 문제였다. 나는 구어체 현장 언어를 구사했으며 반어법과 냉소적 표현을 즐겨 썼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인권변호사로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이런 언어습관이 생겼다. 그때는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이 필요한 시대였다. 언로가 막혀 있었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서 반정부 투쟁을 하는 데는 그런 어법이 효과가 있다. 야당을 할 때도 억울한 노동자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격앙된 때가 많아서 그렇게 했다. 대통령후보가 되고 선거를 하는 과정에서 언어습관을 고쳤어야 했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문화는 극복해야 할 문제였지만, 국민들에게 믿음과 안정감을 주는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일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이 약점을 정말 집요하게 공격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비틀어 보도하고 인용했다. 현장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던 말도, 언론에서 앞뒤를 잘라내고 보도하면 아주 품위 없는 이상한 말이 되어 버리곤 했다. 퇴임한 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과 토론을 보았다. 그는 사회적 소수파에 속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지만 매우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나도 그렇게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p.234

탄핵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그날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집회가 열렸다. 관저 앞마당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관저 마당 왼쪽 나무 계단을 밟고 뒷산으로 올라가면 등산로 진입로에 조그만 탁자를 놓은 작은 쉼터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데크’라고 불렀다. 이 쉼터에 올라가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부근까지 불빛이 보인다.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무어라고 소리치는지는 알 수 없다. 멀리서 사람들이 외치는 함성이 아련히 들릴 뿐이다. 관저 안에서는 유리가 두꺼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용암처럼 일렁거리던 촛불 바다는 텔레비전 뉴스로만 보았다. 쉼터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아내는 우리 편이 저렇게 많이 왔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겁이 났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밤마다 촛불을 들고 와서 나를 탄핵에서 구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 무엇을 요구할까?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이 촛불 시민들의 함성에 실려 왔다.---pp.240~241

이라크 파병
이라크 파병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서 파병한 것이다. 때로는 뻔히 알면서도 오류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하는 대통령 자리, 참으로 어렵고 무거웠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해 효과적인 외교를 했다. 애초 미국의 요구는 1만 명 이상의 전투병력 파견이었다. 청와대 안보팀과 국방부는 최소 7,000명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참모들이 파병 자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론은 전투병 3,000명을 보내되 비전투 임무를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절충적 해법을 찾고 미국의 양해를 구하는 데서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파병 반대운동이 큰 의지가 되었다. 시민사회의 강력한 반대운동과 매우 비판적인 국민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도 이런 수준의 파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p.245

한미 관계
모든 대통령에게 한미관계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한미관계는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얼마나 긴 시간을 두고 어떤 순서로 해결할 것인지 살펴야 한다. 어떤 문제는 뻔히 알면서도 손대지 말고 가야 한다. 나는 한미관계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서로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합의해서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가는 전략을 선택했다. 주한미군 재배치, 용산기지 이전,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이라크 파병 등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그런 전략에 입각해 관리했다.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는 게 아니라 5년 10년 뒤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바꾸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많다. 경제적으로도 미국과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 마른 나뭇가지 부러뜨리듯이 할 수는 없다. 차근차근 변화를 이루어 나가면, 언젠가는 옳지 않은 전쟁에 대한 파병 요청을 거절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p.248

미국과 북한
그렇게 해서 다시 제자리를 잡아 가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미국이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계좌를 동결한 ‘BDA(Banco Delta Asia)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북한은 장거리미사일 발사 시험에 이어 2006년 10월 초 지하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정치적 외교적 무기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고 북쪽과 회복하기 어려운 갈등을 만들지 않으면서 상황을 관리해 나가는 일뿐이었다. 다행히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은 별로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당사자이면서도 북한과 미국이 벌이는 위험한 승부에 대해서 주도적 대응을 할 수 없는 대한민국 정부의 처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은 무력감과 분노를 느꼈다. 이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 한반도 평화와 남북의 공동번영을 열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p.249

남북정상회담
정상회담 첫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남쪽과 접촉할 때는 늘 하는 대로 무려 45분 동안이나 예의 그 장황한 이론을 펼쳐 놓았다. 대부분은 한국 정부의 태도를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왜 우리 민족끼리 하자고 해 놓고 계속 외세의 영향을 받느냐?” “그렇게 하니까 남북경제협력이 지체되고 합의도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남북협력을 할 수 있겠느냐?”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것들이었다. 게다가 남에서 온 방문자들이 북에서 ‘성지’(聖地)라고 하는 곳을 참배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라든가, 국가보안법을 없애라든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시종일관 훈계조 연설을 했다. 가만히 듣고 있기가 무척 힘이 들었지만, 꾹꾹 눌러가며 참았다.

듣기도 힘들었지만 대응하기는 더 어려웠다.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대응해 줘야 할지, 잘 들었다는 수준으로 대강 넘어갈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음날 김정일 위원장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 실제 회담은 언제 할 것인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잘 들었다고, 북측 입장이 그렇다는 것을 잘 알겠다고만 했다. 그러면서 가벼운 농담처럼 받아쳤다. “항상 우리 민족끼리 해결하자고 하면서 평화협정 문제는 왜 자꾸 우리를 빼려고 합니까?” 그리고는 한마디 못을 박아 두었다. “내일 김정일 위원장께서 하실 말씀을 미리 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내일도 이런 식이라면 보따리를 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면담을 끝냈다.

다음날 오전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나더러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내가 우리 쪽에서 준비한 여러 의제를 망라해 30분짜리 기조발언을 했다. 다행히 김정일 위원장은 김영남 위원장이 한 말들을 반복하지 않고 곧바로 몇 가지 실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무슨 선언을 하자고 하는데 ‘7·4공동성명’부터 여러 선언들이 지금 보면 그냥 종잇장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또 그는 “우리 민족끼리 하려는 자주성이 없다”고 했다. 특구 신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실질적으로 이득을 본 것이 없었으니 기왕에 시작한 개성공단이나 잘해서 마무리한 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회담이 꽉 막혀 버렸다. “이럴 거면 뭣 하러 오라고 했을까?” “논쟁이나 하자고 오라 한 것은 아닐 텐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오전에는 경제협력을 포함해서 어느 것 하나 매듭을 지은 게 없었다. 그런데도 북측은 대강 끝난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다. 오전 회담에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었다. 개혁, 개방이라는 말에 대해 북측이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준비해 간 그대로 말을 하기는 했는데, 부딪쳐 보니 그 메시지가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쪽 수행원 오찬장에서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가 개혁·개방이라는 용어를 너무 일방적으로 한 것 같은데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북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역지사지하는 자세로 대화합시다.” 오찬장 곳곳에 북측 관계자들이 있는 만큼, 그 말이 그대로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될 것을 기대했다. ---pp.263~264

김정일 위원장은 듣던 대로,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국정 전반을 아주 소상하게 꿰고 있었다. 개혁이니 개방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소신과 논리를 아주 분명하게 체계적으로 표현했다. 해주특별지대 문제가 나오자 해주의 특성과 사회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안변 이야기가 나오니 조선공업단지로서 안변이 가진 입지 조건과 강점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회의에는 다른 참모들은 밖에 머물게 하고 김양건 부장 한 사람만 배석시켰다. 무슨 일이든 시원시원하게 판단하고 결정했다. 식사를 하면서 참모들을 다루는 태도에는 절대권력자의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김정일 위원장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 충분히 이야기하면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본질 문제는 주장을 굽히지 않겠지만, 실무적인 문제는 유연하게 결정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북에서 만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그리로 홀로 유연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p.265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회담에서 공을 가장 많이 들였던 것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였다. NLL(서해북방한계선) 문제는 경제협력과 군사적 보장 문제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그동안 NLL의 지위에 대한 남북 간 주장이 달라 충돌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다. 실제로 충돌이 일어났고 희생도 있었다. 그대로 두면 앞으로도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목숨을 걸고 지켰다고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정착시킬 대안을 내야 했다. NLL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분쟁 발생을 막는 대책은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는 뒤로 미루고 먼저 평화 정착과 경제협력 방안을 다루었다. NLL에 관계없이 필요한 협력을 하면서 이곳을 평화지대로 만들면 분쟁을 예방하고 양측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미리 논리를 세우고 사업 계획을 만들었다. 통일부, 산자부, 건교부, 해수부 등 모든 관련 부처를 동원해 여러 차례 합동회의를 열었다. 일일이 보고를 받으면서 사업 제안을 만들었고, 북측을 설득하는 데몶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오전에 이 문제가 풀리지 않자, 우리 측에서 오후 회담을 강력히 요청했고 결국 합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남북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되는 이 합의를 없었던 것으로 되돌린 결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것이다. ---pp.268

국정원 개혁
국정원장 독대보고의 부작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정원은 독대보고를 무기로 삼아 더욱 넓고 깊게 정보를 수집한다. 국정원의 보고서는 모든 다른 기관의 보고서를 능가하게 된다. 그럴수록 대통령은 점점 더 국정원 보고에 의존하게 된다. 나중에는 대통령이 국정원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국정원이 정보의 힘으로 대통령을 조종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국정원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권력을 집중하려는 속성이 발동하면 정보를 왜곡하고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정원 보고에 의존하는 대통령이라면 이미 그런 왜곡을 알아차리기 어렵게 된다. 대통령이 나라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갈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정을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인권운동과 시민운동을 했던 고영구 변호사를 초대 국정원장으로 기용한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내 생각을 잘 이해하면서 업무를 수행했다. 후임 김승규 원장과 김만복 원장 때도 독대 정보보고는 받지 않았다. 국정원 스스로도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한 정보기관에서 국가를 위한 정보기관으로 변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안다. 야당 정치인 뒷조사를 하거나 반정부 세력을 위축시키기 위해 국정원 조직을 활용하는 행위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결코 해서는 안 될, 국가와 국민을 모독하는 추악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다시 대통령을 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271쪽)

검찰 개혁 실패
권력기관의 정치적 독립 또는 중립화와 관련하여 국가정보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검찰조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민변)가 국민의 정부 개혁 과제를 제안했는데, 그 첫번째가 검찰의 정치적 독립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민변이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 주된 이유가 검찰 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내내 검찰의 정치적 독립 요구를 외면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검찰 인사 개혁안을 준비했다. 그런데 당시 검찰 수뇌부가 사실을 왜곡하면서 인사 개혁에 대한 검사들의 불만을 부추겼다. 나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화를 공개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 9일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텔레비전 방송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토론했다. 검사들의 인사에 대한 오해와 불만을 해소하는 것과 함께, 젊은 검사들이 정치적 독립의 충정을 토로하면 공감을 표시하고 필요한 약속을 하려고 했다. 검사들이 미리 모여 준비를 해서 나온다고 들었다. 토론을 시작하자 검사들이 처음부터 인사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설명할 것은 설명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리를 했다. 그런데 다른 검사가 또 인사 문제를 제기하서 다시 마무리를 하고 나면 또 다른 검사가 또 제기하고 해서, 그래서 결국 인사 이야기에서 뱅뱅 돌다가 토론이 끝나고 말았다. 대표로 토론에 나오면서 대통령 앞이라고 주눅 들지 말고 인사 문제를 제대로 충언하라는 주문을 받은 모양인데, 결국 돌아가면서 준비해 온 말만 되풀이했던 것이다.

무척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검사들이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을 온 국민에게 보여 줌으로써, 적어도 내가 검찰을 정치적으로 악용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해소하는 효과 정도는 있었다. 나는 검찰의 중립을 보장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면 검찰도 부당한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검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pp.272~273

검찰조직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해서 두 가지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하나는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를 만들어 수사권을 주는 것이었다. 고위공직자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공수처가 수사를 하여 검찰에 이첩해 기소하게 하고, 만약 기소를 하지 않으면 재정신청을 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공수처가 수사 대상으로 삼는 고위공직자에는 검사들도 포함된다. 두 법안 모두 열심히 공을 들였지만, 여야 정당과 국회의원들이 협조해 주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무조건 반대했다. 검찰은 조직의 역량을 총동원해 국회에 로비를 했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 정치인이라 그런지, 행정자치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국회의원들이 미적미적 심의를 미루었다. 여당 국회의원들도 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공수처의 수사 대상이 된다는 것이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검경 수사권 조정도 공수처 설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공수처 수사 대상에 국회의원을 포함시킨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면, 국회의원을 빼고서라도 제도 개혁을 했어야 옳았다.

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 내내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 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개쳐 버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pp.274~275

국세청 개혁
국세청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나는 대통령으로 일하는 동안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일에 국세청을 동원한 일이 없다. 야당 정치인을 후원하는 기업이라고 해서 세무조사를 한 적도 없었다. 정치적 세무조사를 하지 못하게 했고 기업에 대한 정기세무조사나 특별세무조사도 정치적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객관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따르게 했다. 국세청 스스로 이런 문화와 관행을 축적해 나가면 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착각이었다. 대통령이 정치적 중립과 투명성을 보장하려는 뜻이 없을 때 국세청과 같은 관료 조직은 하루아침에 정치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청와대를 떠난 후 정치인 노무현을 후원했던 기업인들이 숱하게 특별세무조사를 당했다. 검찰 수사까지 받아 회사가 망하는 지경으로 가는 것도 보았다. 다르게 했더라면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과연 잘못한 것일까? 민주주의 교과서가 말하는 그대로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려 했던 나의 선택이 어리석었던 것일까? 아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더라도, 영구집권을 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마찬가지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항변할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 국세청과 검찰에게 당한 수모보다 더 아프고 슬픈 것은, 올바른 이상을 추구한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모욕하는 세태, 그런 현실을 보는 것이다.---pp.275~276

언론
20년 정치를 하는 동안 언론과는 늘 불편한 관계였다. 정치인과 언론은 어느 정도 관계가 불편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신문들은 ‘특별하게’ 불편한 관계였다. 그들은 임기 내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했다. 나는 그 신문들과 끝없이 싸웠다. 그들은 몇 백만 부의 발행부수로 표현되는 막강한 미디어의 힘으로 나를 공격했다. 논리의 힘, 사실의 힘, 진실의 힘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싸움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무기로 쓰지 않았다. 국민이 언론과 싸우는 데 쓰라고 그 권력을 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만 가지고 싸웠다. 사실의 힘, 논리의 힘, 진실의 힘만으로 싸웠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믿었기에,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p.276

2007년 대선
17대 대통령 선거는 정당정치와 선거의 기본 원리가 다 무너진 선거였다. 노무현이 잘못해서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켰다는 비난을 숱하게 들었다. 대통령이 인기가 없으면 여당 후보가 불리하다는 상식에 비추어 옳은 비판이다. 미안하고 할 말이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패배는 쓰라리다. 그러나 원칙을 잃은 패배는 더욱 쓰라리다. 원칙 있는 승리가 가장 좋다. 원칙을 지키면서 지는 것과 원칙을 어기면서 이기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지는 상황과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이 원칙을 지키지 못하면서 패배하는 것이라는 데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 선거에는 사실상 여당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다 책임지겠다는 후보가 아무도 없었다. 근거도 없는 ‘경제파탄론' 앞에서 먼저 반성한다고 말해 버렸으니 무엇을 가지고 선거를 할 것인가. 원칙을 지키면서 패배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원칙을 잃고 패배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나는 이기든 지든, 매순간 원칙을 지키면서 선거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p.295

퇴임
각본에 따라 주어진 배역을 하는 연기자가 된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가 따라다닌다. 국민의 눈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대통령은 분장을 하고 의상을 갖추고 참모들이 만들어 놓은 행사에 가야 한다. 가끔은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청와대를 나온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깊은 안도감과 퇴임 후 삶에 대한 설렘을 가슴에 품고 청와대의 마지막 밤을 편안하게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다음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법연수원에 다니기 위해 봉하를 떠난 지 32년만의 귀향이었다.---pp.298~299

화포천 살리기, 봉하쌀 농사, 마을 살리기 사업
처음 왔을 때 화포천은 그야말로 끔찍한 상태였다. 화포천 유역 공단에서 불법 방류한 공장 폐수, 끝없이 흘러드는 생활 오수와 축산 폐수, 불법 투기한 대형 폐기물과 낚시 쓰레기까지, 화포천은 그야말로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다. 김해시장과 경남지사에게 말해서 청소부터 시작했다. 화포천 바닥에 버려진 불법 그물과 지천에서 떠내려 온 쓰레기를 끝도 없이 치웠다. 1t 화물차로 백 대가 훌쩍 넘었다. 본산공단에서 흘러들어 와 봉하마을 농수로에 쌓인 슬러지에서 악취가 났다. 친환경 농사를 하자면서 방치할 수가 없어 농어촌공사에 지원 요청을 했다. 준설한 슬러지가 15t 덤프트럭으로 백 대가 넘었다. 퍼낼 데가 없어서 큰 논을 빌려 임시로 쌓아 두었다가 겨우 처리했다. 화포천 곳곳에 불법으로 설치한 그물이 깔려 있었다. 어느 날은 삼강망에 팔뚝만 한 잉어가 수십 마리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버려져 뻘에 묻힌 삼강망을 35개나 제거했다. 그렇게 하자 낙동강 잉어가 화포천을 거쳐 얕은 농수로까지 올라와 산란을 했다. 볼 만한 풍경이었다. 어디 화포천만 이렇겠는가. 온 나라가 다 이럴 것이다. 대통령을 하면서 강의 지천과 실개천, 습지들이 이토록 처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pp.310~312

건평 형님이 구속된 다음날 마지막 방문객 인사를 한 후로는 집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서 내다보면 겨울철새가 많이 보였다. 내가 외출을 하지 않으니까, 집에서라도 보라고 김정호 비서관이 열심히 무논을 만들어 기를 쓰고 철새를 불러 모으는 것 같았다. “우리 잘하고 있습니다. 한번 나와 보세요.” 새를 불러 모아 시위를 한 것이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새벽에 사람이 없을 때 잠깐씩만 가끔 나가 보았다. ---p.315

내가 마을 사업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자전거 타는 사진은 주로 화포천 관련 활동과 관계가 있다. 논바닥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거나 장화를 신고 다니는 사진은 벼농사 아니면 화포천 청소와 관련된 것이다. 숲 가꾸기 사진도 제법 있었다. 어떤 기자가 우연히 내가 쉼터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을 찍어 내보냈다. 나가지 말아야 할 사진이 나간 경우였다. 손녀와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은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니지만 조금 쑥스러운 장면이었다. 농사짓고 숲 가꾸고 개울 청소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다닌다.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다만 대통령 지낸 사람이 그렇게 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나 싶다. ---p.318

국가기록물 사건
2008년 3월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김백준 총무비서관을 만나 경위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4월에도 문재인 비서실장이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여러 차례 전화로 협의하고 양해를 부탁했다. 봉하로 가져온 ‘e-지원 시스템’ 사본은 다른 어떤 통신망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계획도 없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민감한 인사 자료나 국정운영의 기밀을 담은 자료를 내가 가지고 간 것인양, 이 사본을 이용해서 이명박 대통령의 일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인양, 황당무계한 주장을 계속 언론에 흘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을 “국가기록물 불법 유출”이라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반환을 요구했다. 국가기록원은 이호철 민정수석과 김충환 비서관 등 관련 실무자들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6월 14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보도를 보고 알았다”면서 “불편이 없는 방법을 찾도록 챙겨 보겠다”고 했다. 이때도 전직 대통령을 잘 모시는 문화를 만들겠다고 하면서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했지만 연결시켜 주지 않았다. 담당 수석이 설명할 것이라는 부속실장의 전갈이 왔다. 그렇지만 우리 쪽에서 여러 차례 전화를 해도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사이 익명의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언론을 통해 온갖 말을 퍼뜨렸다. 7월 16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다. ‘e-지원 시스템’ 사본이 든 봉하마을 컴퓨터 하드웨어를 뜯어내고 봉인해 차에 싣고 성남시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갖다 주었다.---pp.321~322

운명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해 보고 싶었던 꿈을 모두 다 접었다. 죽을 때까지 고개 숙이고 사는 것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재판 결과가 어떠하든 이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p.332

유시민 에필로그 중에서
서울역 분향소에서 내 귀에 대고 낮고 강한 목소리로 속삭인 시민들이 있었다. “복수합시다!” “복수해 주세요!” “꼭, 복수할 겁니다!” 그들에게 정말 복수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을 먹는다면 복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복수가 될까? 그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이 질문에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복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또는 하고 싶어도 복수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들과 화해해야 하는가? 그가 정치 생명을 걸고 추구했던 ‘국민 통합’이 그런 사람들까지도 껴안는 것일까? 화해하기로 마음먹으면 화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 대답할 수 없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가 남긴 말과 글을 정리하면서 끊임없이 자문해 보았다. 그는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가? 나는 그와 어떻게 작별해야 하는가?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꿈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그 꿈이 결국 그를 부엉이바위에 오르게 했다. 5년 동안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꿈 많은 청년’이었다.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노년으로 늙어 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p.347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인간 노무현, 인권운동가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의
꿈과 희망,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읽는다!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 본문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 기념 출간!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이 책을 펴냅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은 이미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더 나오겠지만, 출생에서 서거에 이르기까지 인생역정 전체를 기록한 ‘자서전’은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 문재인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과 돌베개가 함께 ‘노무현 사후 자서전’을 펴낸다.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및 구술 기록을 토대로 출생부터 서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 기록을 일관된 문체로 정리하는 작업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다. 유시민 전 장관은 2009년 8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꼬박 6개월 동안을 이 정리 작업에 매진했다. 고인의 모든 자필, 구술 기록물들을 살펴 일대기로 정리하고, 빈틈은 유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공식 기록 등을 통해 보완했다. 또 고인이 남긴 여러 기록들 중 퇴임 후 서거 직전의 미완성 회고록 노트를 기본으로 문체를 통일하는 작업도 거쳤다. 유족과 재단 관계자들, 그 밖에 가까이에서 고인을 지켜봐온 지인들의 검토를 통해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하여 오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였다.

이 자서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는 자서전의 집필 시점(고인이 회고록 초안을 위해 메모를 시작하는 시점)인 서거 직전의 상황을 담고 있다. 1부 ‘출세’는 출생에서부터 부산상고에 입학해 공부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부 ‘꿈’은 부림사건을 맡은 이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게 된 이야기부터 정치에 입문해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경선에 나서기 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긴다. 3부 ‘권력의 정상에서’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승리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부터 대통령 재임기간의 일을 담고 있다. 4부 ‘작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가 새로운 꿈을 꾸고 실패한 후 서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정리자인 유시민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의 상황을 정리했고, 문재인 노무현재단 상임이사가 감사의 말을 썼다.

“변호사 노무현, 인권운동가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은 모두 ‘인간 노무현’의 일부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로 어울려 ‘인간 노무현’이 되었습니다. ‘인간 노무현’의 삶과 죽음 전체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아야 비로소 ‘대통령 노무현’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원고를 정리하기는 했지만,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기록한 ‘정본 자서전’입니다.”
- 문재인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노년으로 늙어 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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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노무현, 인권운동가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은 모두 ‘인간 노무현’의 일부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로 어울려 ‘인간 노무현’이 되었습니다. ‘인간 노무현’의 삶과 죽음 전체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아야 비로소 ‘대통령 노무현’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원고를 정리하기는 했지만,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기록한 ‘정본 자서전’입니다.
문재인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노년으로 늙어 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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