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정하지 않은 충동적 퇴사, 제일 바보 같은 퇴사를 하고 말았다. 퇴사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1분, 3분, 5분 단위로 맞춰둔 알람 14개를 모두 끄는 것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회사 홈페이지와 메일함에 접속하니 아직 계정이 살아있다. 내가 일해온 흔적들을 살펴본다. 그동안 주고받은 수천 개의 메일들, 상신하고 반려당하고 재 상신했던 수백 개의 문서들이 보인다.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허하지?
--- p.23, 「퇴사를 결심하고 1」 중에서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면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동네 아줌마들, 퇴근 후 취미생활을 즐기러 오는 직장인들, 동네 꼬꼬마들과 대학생들도 가끔 카페를 찾았다. 그렇게 2020년의 막을 열었고, 새로운 단골손님들을 만들며 다시 활기찬 하루를 보냈다. 행복감도 잠시, ‘코로나바이러스’의 음산한 기운이 온 골목을 휩쓸었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따뜻한 공간의 카페는 부지불식간 차게 식어버렸다. 손님이 올 거라 믿고 사두었던 우유와 온갖 재료들은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 처분되었고, 제빙기가 만들어낸 얼음들은 만들어지기 무섭게 녹아내렸다. 하루 종일 켜둔 난방기 소리만 빈 공간에 요란하게 울렸다. 문을 여는 게 적자가 되어버린 시기에, 결국 카페 앞에 ‘잠정적 휴점’이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 p.39, 「카페를 두 달간 휴점했습니다」 중에서
온갖 포털사이트도 온통 ‘달고나’ 천지다. 이렇게 세상은 모두, 이미, 벌써 ‘달고나’를 외치고 있는데 나는 이제야 ‘달고나’를 검색한다. 이전에 유행했던 헤이즐넛 아메리카노, 토피넛라테를 판매한다고 사다둔 재료가 구석에 한 가득이다. 유행은 생각보다 재빠르게 사그라들었고 그때 다 판매하지 못한 재료들은 고스란히 짐이 됐다.
이번 달고나라테는 얼마나 유행할까? 재료를 사면 몇 잔이나 팔릴까?
휴대전화를 바라본다. ‘달고나’ 검색 기록 때문에 모바일 화면 좌우로 달고나 재료 구입 광고가 줄줄이 뜬다. SNS에도 달고나 광고가 연이어 나타난다. 여기도 달고나, 저기도 달고나.
--- p.61, 「흑당도 달고나도 없는 카페」 중에서
나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가, 혹은 버티고 있는가.
그래, 솔직히 인정한다. 버티고 있다. 카페는 ‘날이 더울수록 성수기, 추울수록 비수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비수기였고, 일 년 내내 추웠다. 하루 열 시간 이상 근무하고 하루 매출로 7,600원을 벌었을 때 두려웠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나이 먹어서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카페 사장이라는 직업의 정년은 몇 살일까?
이런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마다 ‘겨우’ 버티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버티고 있다고 해서 카페에서의 일이 불행하다거나, 우울하거나, 지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버티고는 있지만 지금의 일이 꽤나 소중하고, 재밌고, 행복하다.
--- p.65, 「구독자에게 온 메일, 잘 버티고 계신가요?」 중에서
손님들로부터 선물을 받을 때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왜 내게 이런 선물을 주시는 거지?’ 하는 의문 한 꼬집, 고맙고 감사하고 따듯하고 뭉클거리는 마음 한 꼬집, 조금은 신기한 기분 한 꼬집, 그리고 곧이어 닥쳐오는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 한 뭉텅이. ‘돈’을 받고 손님들이 주문한 음료를 준 게 단데, 그게 단데,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문을 안고 시간이 흘러 오늘은 단골손님으로부터 드라이플라워를 선물 받았다. 단골손님이니까, 용기를 안고 물어봤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물어본다. “왜, 왜 주시는 거예요?”
손님은 무슨 대단한 말이 나올까 기다렸는데, 고작 저 질문이냐는 듯 웃으며 대답해준다.
“사장님이 좋아서요. 커피 한 잔도 마음을 담아 만들어주니까요.
여기 오면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마시니까요.”
--- p.70, 「나, 지금까지 정말 잘 해왔구나」 중에서
우리는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귀어를 반대했다.
아빠가 걱정돼서, 아빠가 멀리 가는 게 싫어서 한사코 반대했다. 하지만 아빠라는 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반대가 어려웠다. 군대라는 조직을 나와서 본인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 그 한 사람을 믿고 응원해주는 것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사고만 치는 딸이라 그동안 모은 돈을 카페에 쏟아 넣었다. 동생은 힘들게 모은 육백만 원을 엄마랑 나 몰래 아빠에게 주었다. 아빠는 쭈뼛거리며 돈을 받고는, 꼭 갚겠다고 말을 건넨다. 잘난 자식들이 아니라서. 가지고 있는 돈도 능력도 다 애매해서, 효심마저도 애매하다. 그 사실이 뼈저리게 가슴 아프다.
--- p.233, 「아빠가 출근을 안 했다」 중에서
초콜릿 다음은 때수건이었다. 엄마는 오래 전 아빠가 사둔 재봉틀을 꺼내어 새벽 내내 드르륵 때수건을 만들었다. 어린아이들도 사용할 수 있는 인견 때수건이라며, 밤새 만든 50장의 때수건을 보여준다. 한숨부터 쉬었다. “엄마, 카페에 이런 걸 어떻게 내다 팔아? 못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카페가 너무 잡화상점 같잖아.” 엄마는 제발 가져가서 하나라도 팔아보라고 한다. 결국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알겠다’라고 대답한 뒤, 때수건 50장을 모조리 집에 들고 왔다. 카페가 아닌 집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카페에 못 내다 팔겠다. 결국 50장 중 한 장은 그날 밤 내 팔이며 다리의 때를 미는 때수건이 되었다. 그나저나 정말 잘 밀린다.
--- p.253, 「엄마는 카페에 때수건을 갖다 팔라고 하셨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