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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을 도는 여자들

트랙을 도는 여자들

[ 양장 ] 오늘의 젊은 문학-00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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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을 도는 여자들 (큰글자도서)
[도서] 트랙을 도는 여자들 (큰글자도서)
차현지 저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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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을 도는 여자들 (큰글자도서)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04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398g | 130*194*25mm
ISBN13 9791130677804
ISBN10 11306778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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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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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 속, 름이는 죽은 303호 여자와 함께 있었다. 함께였다고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정말 그랬다. 름이는 죽은 여자를 떠올렸다. 버려진 트렁크처럼 담벼락에 쓰러져 있던 여자를. 름이는 죽은 여자를 지우고 자신을 넣어 보았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운동장 트랙 위를 걷던 여자들을 한 명씩 대입해도 무방했다. 전혀 레어한 일이 아니었다. 우지와 말을 하고 나니 더욱 그랬다. 문득 누워 있는 름이에게 두려움이 훅 끼쳐 왔다. 그것은 살아내야 한다는 두려움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 한동안 그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때 느꼈던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삶은 느닷없이 멈춘다. 그건 아버지에게도, 303호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왔다. 다만 공평하지 않은 기울기와 속도가 두 죽음의 차이라면 차이였다. 름이는 집으로 돌아가면 노트북을 열어 구직 사이트부터 들어가 보리라 생각했다. 아침이 되기 전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껏 안간힘이라는 근육을 보이지 않게 키워 왔다면, 이제는 그것의 윤곽을 드러내야 할 시기였다.
--- 「트랙을 도는 여자들」 중에서

그 작은 방, 너와 내가 누우면 꽉 차는 침대에 누워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포카칩을 씹어 먹기도, 허벅지 안쪽을 핥거나 서로의 손톱을 만지면서 하릴없이 시간을 녹여 낼 만한 사소한 사건들을 만들곤 했다. 네가 떠난 후, 그 방을 찾은 사람들은 더러 있었으나, 너처럼 오랜 시간을 점유했던 자는 없었다. 첫사랑이었고, 모든 것의 처음이 너였다. 그곳에 있을 때는 그 처음이 영영 깨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랑이 그러하고, 모든 헤어짐이 그래 왔지만 특히나 너는.
나는 사랑을 배반한다, 언제나.
--- 「녹색 극장」 중에서

도는 전기의 제목만큼은 자신이 직접 짓고 싶다고 말했다. 왜 직접 자서전을 쓰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그에게 물을 것이다. 그건 도의 철칙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40년 만에 재출간된 H의 전기 서문에 도는 이렇게 적었다.
“어떤 이의 삶을 제법 긴 분량의 소설이라고 쳤을 때, 그가 남기고 싶은 문장들과 그걸 받아 적는 사람이 밑줄 그은 문장들은 각기 다를 것이다. 전기란 받아 적는 사람이 그은 밑줄들로만 재구성된 또 다른 버전의 삶이다. 삶의 진실은 타인의 동공으로 들여다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고 믿는다.”
--- 「트릭」 중에서

근방에 살고 있던 그녀의 시어머니가 부랴부랴 내 손을 붙들고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나는 동생이 올 때까지는 꿈쩍도 안 하겠다며 얼마간 실랑이를 했다. 선수 체력 못 따라가겠네. 억세게 잡고 있던 내 팔목을 풀어 주면서 그녀의 시어머니는 말했다. 아빠도 없는데 괜찮겠어? 나는 그녀의 시어머니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들 낳아 주는 여자 만나러 간 사람을 여기서 왜 찾아요. 그녀의 시어머니는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며 구시렁거렸으나 제법 당황한 눈치였다. 제 엄마 닮아서 독하기는. 빈집에 손녀딸을 두고 퇴장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대사에 걸맞게 완벽했다. 완벽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핑거 세이프티」 중에서

만일 내게 앞으로 남겨진 날들이 매일 똑같은 날의 반복이라고 한다면, 나는 감히 그날을 말할 것이다. 눈을 떴을 때부터, 와인과 수면제 때문에 나른해진 상태로 딜라를 다시 품에 안고 잠에 들 때까지. 죽을 때까지 그 하루만이 반복된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죽지 않으려고 할 테니까. 딜라와 내가 서로의 평온함을 느끼던 그 순간을. 나는 비록 죽기로 결심했지만, 그날이 딜라의 마지막 잠이라는 걸 결코 모르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비록 나는 죽기로 했지만. 딜라야, 언니가 너보다 먼저 죽어도 용서해 줄래? 말하면 야옹, 하고 답하던 딜라의 반짝이던 눈빛을.
그러나 딜라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 「우리의 마지막 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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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로서의 차현지를 나는 언제나 존경했고 부러워했다.”
나는 아직도 차현지를 기다린다,라는 독자의 말을 기억한다. 단 한마디에 담겨 있던 단단한 신뢰를. 차현지의 등단작을 읽었을 땐 미처 거기까지 알지 못했으나, 이후의 발표작들을 읽으며(이 시기에 작품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작가를 만나고 알아 갔다) 이 작가가 얼마나 영리하고 명쾌한 어젠다를 갖고 있는지, 무엇을 읽고 보고 들으며 소설을 잊거나 잃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작가가 지나온 시간들이 부인할 수 없는 역사 속 개인의 연대기가 되고, 공정과 객관으로 텍스트를 분석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오만하고 순진한 인간들의 세 치 혀에 휘둘릴 수 없는 고유한 그 자신이 된다.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차현지를 나는 언제나 존경했고 부러워했다. 한편으로는 나 역시 그렇듯 소설과 소설을 둘러싼 삶에 지치거나 질리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도 무엇을 위해서도 쓰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쓴다. 목에 개기름칠하고 느끼한 말 뱉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저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이 작가의 창작집을 통해 느껴 보았으면 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토록 부인하려 애썼던 ‘소설도 삶의 기록’이란 말을 이 창작집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정한다. 테크니션으로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작품이 또한 그 자신의 삶이었음을 증명한 이 생산자의 기록이 문학사의 오랜 정리벽을 뚫고 나와 새로운 길을 낼 것임을 확신한다.
- 박민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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