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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

탱자

: 근현대 산문 대가들의 깊고 깊은 산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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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20쪽 | 262g | 125*205*12mm
ISBN13 9791186372913
ISBN10 118637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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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꽃이 지고 나면 꽃이 진 자리마다 녹색의 탱자 열매가 별처럼 수북하게 열렸다. 그 별들이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무슨 기적처럼, 작은 황금빛 태양이 되어 탱자나무 가지마다 가득 떠올랐다. 어느 누가 저렇게 많은 태양을 한꺼번에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 p.17 오규원, 「탱자나무의 시절」 중에서

사과의 물리적 형태가 점점 눈앞에서 사라진다. 스미는 과즙에 몸이 환호한다.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감지한다. 마침내 드러나는 두 개의 사과씨! 낙담도 회한도 고독도 단숨에 제압하는 핵! 이 씨앗이 사랑으로 미쳐 다시 한 번 사과로 환원되는 날이 올까……. 작은 생명을 오래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평화다. 신비다. 명백한 행복이다.
--- p.26-27 김서령, 「사과」 중에서

늦은 아침, 밥을 먹겠다고 부엌으로 다가가 문득 식탁을 허리띠만 한 리본으로 묶어놓고 있는 햇빛 자락을 보았습니다. 도화지 한 장으로도 다 가릴 수 있는 쪽창문 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 내 삶을 내내 묶는 한 아름다운 띠가 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 p.49-50 장석남, 「아주 조그만 평화를 위하여」 중에서

내 눈이 더 많이 머무는 것은 기분 좋은 소리로 타들어가는 나뭇잎이나 연기보다, 신기해하는 빛으로 불꽃을 열심히 지켜보는 아이의 얼굴이다. (…) 아름다운 계절이 가고 있다. 누군들 다음 해의 가을 역시 이와 같으리라고 범연할 수 있을까.
--- p.64 오정희, 「낙엽을 태우며」 중에서

그날 찬밥이 차려진 밥상에는 기다림이 배어 있었다. 짠 된장국이 다디달아 자꾸 찍어 먹던 밤, 지붕 낮은 우리 집 마당에는 달빛이 곱게 내렸고, 세 식구가 앉아 있는 쪽마루에는 구절초 냄새와 더덕 향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 p.78 함민복, 「찬밥과 어머니」 중에서

너무 많아진 이삿짐도 실은 무대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웃집 이삿짐 보따리를 볼 때마다 다시 확인하곤 한다. 이삿짐은 쓸쓸하고 적막해 보이지만 벌거벗은 삶의 진실을 손가락질해준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꿈을 깨뜨리기도 하지만 우리를 헛된 오만으로부터, 부질없는 확신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 p.90 김화영, 「이삿짐과 진실」 중에서

우리 일생의 시공 중에서 어린 시절의 시공만큼 넘치는 시공이 없다는 거야 말할 것도 없는 노릇이지만, 어린 시절을 꿈꾸는 동안이란 다름 아니라 회생의 시간이며, 우리를 유례없는 서늘한 공간으로 풀어놓음으로써 생의 감각을 원천적으로 회복케 하는 신묘한 시간이다.
--- p.100 정현종, 「메와 개똥벌레」 중에서

황금은 불변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겠지만, 곧 져버리는 꽃, 그 꽃잎에 맺힌 이슬, 심지어 그 이슬의 그림자조차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가치가 있다. 음악은 사라지는 것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음악에 몰입한다는 것은 ‘순간에 충실함’으로써 ‘순수한 시간을 지니게 되는 것,’ 베르그송이 말하는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서의 ‘순수 지속’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p.142-143 황병기,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중에서

그릇을 만들 때 우리는 그 소리들을 같이 만든다. 또는 우리가 그릇을 만드는 동안 그릇은 그 소리들을 만든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우리는 그것들을 그릇으로 사용하지만 그것들은 자신들이 악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릇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악기의 삶을 사는 것은 그들의 일이다.
--- p.153-154 안규철, 「그릇들」 중에서

꽃 모양, 잎새 모양, 줄기 뻗은 꼴까지 이렇다 할 화려함도 없고 그럴듯한 품위나 아취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꽃에서 보기 드문 보랏빛이 있다는 탓인지, 꽃철이 아닌 이 계절에 유난스럽게 씩씩하게 피어나는 탓인지, 아무런 특색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버릴 수 없는 정취가 있고 애착을 주는 것이 이 꽃의 특색이다.
--- p.169 김용준, 「구와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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