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조각을 좇아 역사에 대한 직관을 녹여낸 특별한 여행기
“가야가 무엇일까, 호기심에서 시작된 여행이 3년이 지나면서, 우연히 글을 쓰고 난생처음 그림도 그려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소한 발걸음의 흔적을 담은 책. 1500년 만에 맞게 된 가야 전성기가 흘러가지 않도록, 가야가 우리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마중하고 환대하면 우리에게 낯선 것들이 천천히 베일을 벗고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드러날 것이라 믿습니다.”
가야는 기록이 많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 연표에 따르면, 520년간 가야에서 일어난 사건은 고작 12개로 정리된다. 이 땅에서 나온 고고학 자료들이 그 틈을 메워주고 있지만, 그마저 가야의 유물이 맞는지 논쟁 중이다. 그런 가야에 대해 최근 관심이 높아졌다. 다양성과 공존, 통합과 개방성이라는 가야의 가치 때문이다.
강력한 왕권 국가 대신 느슨한 연맹체를 유지했던 가야는,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처럼 여러 소국이 다양성과 공존의 가치를 바탕으로 연합해 무려 520년 세월을 살아냈다. 가야의 경계는 지금의 경상남북도와 호남의 진안고원, 운봉고원과 순천만 일대를 아우른다. 가야사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오면, 영남과 호남으로 갈라져 반목하는 오랜 생각의 경계는 더 이상 머물 자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 헤리티지에 대한 사회적 소명을 해내는 사람’으로 살겠노라 결심하고, 우리 땅을 밟고 살피는 것을 자신만의 유희로 여겨온 저자는 그 첫 번째 대상을 가야로 정하고 3년여의 세월을 가야 탐사에 쏟았다.
저자의 여행기가 독특한 지점은 우리의 이웃 같고 가족 같은 조상들이 살았던 진정한 가야를 보기 위한 융숭한 시선과 노력에 있다. 가야와 관련된, 유별스럽게 치열한 논쟁들을 담담하게 소개하면서, 논쟁에 가려진 유물 하나하나가 주는 기쁨과 텅 빈 유적이 되어버린 가야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이야기한다. 그가 본 가야는 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우리의 모습이지만 이미 세상 어디에도 흔적 없이 사라져간 우리 조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답사는 우리 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 ‘역사적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하는 여정이다.
나는 덧없고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1500년 전의 시공과 연결된 ‘역사적 존재’다.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속자이자 꽃이자 열매인 것이다. 가야 답사는 그 오랜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 소속감과 연속성을 확인하는 여정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특히 저자는 가야 발견 과정에서 고고학의 공헌에 대하여, 고고학자들의 노고에 대하여 애정과 감사를 기꺼이 곳곳에서 표현한다. 고고학의 목적은 화려한 유물이 아니라 과거의 인간에 있기에, 발굴 현장에서 과거의 가야인과 조우하고 스스로 가야인이 되어보는 경험은 그간 저자가 다져온 탐구의 시간을 가늠하게 하는 이 여행기만의 백미다.
가야 사람들은 이곳에 묻혔다. 무덤에 누워 부산 앞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고, 깜깜한 밤하늘 동래읍성 위에 뜬 초롱초롱한 별들을 세었을 것이다. 지금은 고분 공원이 되었고 오늘의 복천동 사람들이 이곳을 오르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천오백 년 전 가야인들과 오늘의 우리가 함께하는구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렇게 연결되고 있구나. - 본문 60쪽
■ ‘된마음’의 활동이 빚어낸 진짜 가야 이야기
이 책은 4부로 구성돼 가야의 땅, 가야 유물을 볼 수 있는 박물관, 가야와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가야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보 등을 풀어놓는다.
1부는 가야 땅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영남과 호남에 걸쳐 있는 가야의 땅들을 찾아 나섰다. 김해, 동래, 함안, 고성, 고령, 함안, 합천, 순천, 남원, 장수. 우리 역사 중심부의 바깥이지만, 그 땅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되고 문화적 의미가 덧씌워진, 말쑥하게 조성되지 않은 역사적 장소들이 제공하는 우연적 아름다움이 있다. 화려하고 새로운 것만이 풍경을 아름답게 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이 땅을 ‘영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강하지 않고 불완전하며 다른 것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2부는 가야 유물을 담은 박물관들을 소개한다. 근사한 박물관은 ‘역사적 감성’을 깨운다. 역사적 시공이 사라진 자리에서, 유물이 속했던 고유한 시간과 마주하게 해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리움미술관, 국립김해박물관, 국립전주박물관, 대가야왕릉전시관을 소개한다. 가야의 시간과 공간은 사라졌지만 가야의 물건들은 그 순간의 기억·색깔·희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저자는 온전히 그 시간을 전유한다.
3부는 답사에서 만난, 가야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해에서는 김수로와 허황옥을 만나 그들의 ‘거침없고 두려움 없는 사랑’을 되짚고, 창녕에서는 순장의 흔적으로 16세 소녀 송현이를 만나 죽음의 순간, 그녀의 번민과 두려움을 상상해본다. 산청의 구형왕에게서는 부끄러움을 알고 책임지는 리더의 자세를, 고령의 우륵으로부터는 치욕을 무릅쓰고라도 살아내 지켜야 할 가치를 되새긴다. 가야 유민 김유신을 통해 패자로서 역사를 뛰어넘어 살아내는 자들의 힘을 생각하는 장면도 멋지다. 저자가 만난 가야인들은 오늘의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질문에 답을 찾도록 안내했다.
4부는 일종의 부록 차원으로, 가야 답사를 떠나기 전 살펴보면 좋을 지식과 정보들을 담았다. 답사길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무덤, 토기, 철기에 대한 이야기에 덧붙여, 가야사의 난제인 가야와 왜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 꼭지를 할애해 ‘임나일본부’설을 설명한다. 양국 관계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두루 조망함으로써 ‘생각의 균형’이 만들어낼 위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가야 열풍’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가야 붐이 일고 있는 요즘이지만, 막상 “당신은 가야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어디를 가보았는지보다 여행지에서 무엇을 느꼈는지가 중요한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이 책이야말로 내가 찾아간 장소에서 무엇을 어떻게 살피고 느껴야 하는지를 안내하는 책으로 손색이 없다.
저자의 발길이 닿고 눈길이 머문 곳에서 잊힌 ‘가야인’들이 살아나는 장면을 마주하면, 우리 또한 자신만의 대상을 찾아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용기와 결심이 불쑥 솟을지 모른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나를 깨닫는 데 고분을 오르는 일은 제격이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계절마다 달라지는 무덤 앞 풍경은 덤이다. 무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인간의 다양한 행위가 쌓여 역사적 의미가 형성된 문화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분을 오르며 역사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이미지화한다. 우리 중 누군가 가야시대 옛 무덤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면, 단언컨대 그의 유년은 복되었으리라. - 본문 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