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어 학교 수업에 가야 하는 날을 뺀 월수토 사흘은, 아침부터 사무소에 나가기로 했다. 설계실 제일 구석에 책상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옆 자리의 교육 담당인 열두 살 위의 우치다 씨가 잡일을 계속 시켜 간신히 처리하면서 일을 익혀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잡일이라고 해도, 그 디테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모든 것이 최대한 합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삼 주가 지나자 무라이 설계사무소 일은 건축물 투시도처럼 앞이 훤히 트이게 조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불합리한 명령도, 헛수고가 될 잡일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1980년대 초반의 어딘지 어수선하고 떠들썩한, 바람을 가르는 듯한 기세였던 건축계에서 선생님 작품은 보편적인 전통의 흐름을 이어받은 다소 예스러운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무소 운영에도, 건축에도 일본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합리성이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침실은 너무 넓지 않은 쪽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면을 도와. 천장도 높지 않은 편이 좋아. 천장까지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유령이 떠돌 여지가 생기거든.”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했다.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 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 다이닝 키친의 경우, 요리하는 냄새가 좋은 것은 식사하기 전까지만이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싫어지지. 주방의 천장높이와 가스풍로, 환기통 위치가 냄새를 컨트롤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야.” 장인이 전달하는 비법 비슷했다.
--- p.19-21
‘숲의 화장터’가 완성된 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아스플룬드는 쉰다섯이 되어 있었다. 그 완성을 누군가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이 아스플룬드를 덮쳤다. ‘숲의 묘지’로 시작한 건축가의 마지막 일은 원이 닫히듯 ‘숲의 묘지’가 되었던 것이다. 아스플룬드는 자기가 설계한 화장터에서 화장되었고, 재가 되어 ‘숲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숲의 화장터’ 스케치는 완성되기 십 년 전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입구 부근에 십자가가 아니라 오벨리스크가 세워질 계획이었다. 오벨리스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 ‘숲의 예배당’을 위한 스케치에 아스플룬드가 써 넣은 말은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였다. ‘나’와 ‘당신’은 언제 바뀐 것일까?
--- p.187-188
선생님이 홍차에 우유를 붓고 나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현대도서관 설계 담당은 가와라자키, 고바야시, 가사이 세 사람. 가구공사는 우치다, 나카오, 사카니시가 담당하도록. 선생님의입으로 내 이름을 듣자, 무라이 설계사무소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규모의 사무소에서 언제까지고 신입 사원으로 있을 수는 없다.
잘 다루지 못하는 새 노를 손에 들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나는 작은 보트를 젓기 시작하고 있었다. 곁눈질하다가는 금방 밸런스를 잃고 말 것이다. 보트는 어느 틈엔지 온화한 만을
빠져나가 망망한 큰 바다의 일렁임 속에서 어설프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 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