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나는 미리 그것들을 용서했으며, 아직 만나지도 못한 것들과 이별하기도 했고 사랑하기도 전에 싫증을 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나는 때때로 미래의 일을 ‘기억’하곤 했다. 그에 비해서 과거의 시간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모호해지고 비현실적이 되어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잊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울의 벽을 통한 미래는 과거의 예언이 되었다. 과거의 장면들은 화상처럼 벽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이 장면과 저 장면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들을 짜맞추다보면 어느새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자신이 얼마나 큰 공포와 혐오를 가지고 있는가 깨닫고 그 예감만으로도 구토감을 느끼기도 한다.
--- 「회색 時」 중에서
죄의식이란 이렇듯 철저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자아를 위해서 발생하며, 그 자체는 숭고한 이상이나 도덕적 결벽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래서 휴머니즘이나 종교적인 헌신과도 무관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서 단지 사정없이 증폭될 수 있을 뿐이다.
--- 「회색 時」 중에서
우리는 각자 고독하게 늙어갔으며 차가운 천성 때문에 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남겨두지 못했다. 아니, 우리는 지금 각자 혼자 있는 것이다. 혹은 우리들, 우리 세 사람 중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의식이 노래하고 있으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지금은 알 수 없으며 중요하지 않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이 식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비어 있는 빵 바구니와 바람의 영혼뿐이다.
--- 「회색 時」 중에서
로사호텔에서 살고 있을 당시 아마도 6월혁명의 마지막 무렵, 요란은 길을 가다가 일단의 무리로부터 스프레이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붉은 스프레이였다. 아직 젊은 여자였던 요란이 어떤 직업도 가지지 않고 호텔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누군가의 불만이었다. 그 일 이후로 요란은 군중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생겼다. 군중이란 개개인으로서는 겁 많고 냉소적이며 빈약한 존재이지만 집단으로서는 구호에 경도되기 쉽고 공격적이 되는, 이중적인 존재이다.
--- 「집돼지 사냥」 중에서
냄새도 소리도 통증도 흔적도 갖지 않는 그 공격은 전혀 예상할 수도 없는데다가 매우 압도적이고 치명적이어서 거주자 중의 한 사람이 겨울 내내 하루종일 창밖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그 자리에서 병에 걸렸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내려다보이는 거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언제나,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것이다.
--- 「마짠 방향으로」 중에서
아니야, 그건 틀린 소문이야, 하고 대답하려 했으나 문득 귀찮아졌다. 모두들 그 일에 대해서 “네가 원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라거나 “사실대로 말했다면 나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설사 네가 정치적인 성향의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바보천치 선동가는 아닐 테니까. 난 그렇게 생각해” 혹은 “난 말이야, 너를 위해서 변명해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모두들 합창하듯이 똑같은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난 말이야, 특별한 사람이니까”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훌」 중에서
P가 그를 향해서 고독하다는 단어를 내뱉은 것은 어쩔 수 없는 P의 욕망의 발현이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 죽음이 아름다우리라는 욕망.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이유에서 P가 그 욕망을 숨기거나 억제하지 못했다면 P는 참으로 저급한 영혼을 가진 것이다. P는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나 지금 지혜롭지는 못하다. P는 젊은 시절의 그가 미숙하게 판단한 것보다는 우둔한 여성이어서,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접어든, 오직 시취의 시간을.
--- 「시취(屍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