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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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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세트

: 현대 중국의 기초를 만든 통치자

장융 저 / 이종인 | 책과함께 | 2015년 07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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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656쪽 | 152*225*35mm
ISBN13 9791186293232
ISBN10 118629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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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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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융
1952년 중국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홍위병이 되어 문화혁명기 동안 농촌에서 살았다. 공장에서 주물공과 전기공 일을 하다가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쓰촨대학교 영어과 강사로 재직했다. 공산당 집권 이후 쓰촨 성의 첫 외국 유학생이 되어 1978년 영국으로 건너가 1982년에 요크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에 귀화하여 현재 런던에서 살고 있다. 저서로 《대륙의 딸Wild Swans: Three Daughters of China》(1992), 남편 존 핼리데이와 함께 쓴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Mao: The Unknown Story》(2005)이 있다. 두 권 모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1500만 부 이상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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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후궁에서 만인의 군주가 된 여인, 서태후
1852년 봄에 있었던 청 황실의 정기적인 전국 규모 궁녀 간택에서 16세의 소녀가 황제의 눈에 들어 궁녀로 뽑혔다. 중국 황제는 한 명의 황후와 그가 원하는 만큼의 후궁을 둘 수 있었다. 황실 등기부에 그녀는 단지 ‘나랍씨 가문의 여자’라고만 올라 있고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의 이름은 너무 하찮아서 기재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에, 그 이름이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이 소녀는 악전고투하며 권력의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중국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고, 그 후 1908년 사망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양손에 쥐고 흔들었다. 그녀는 바로 자희 황태후이다. --- p.19

아들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다
대신들은 접견이 시작되기 전에 소박한 천으로 덮인 평범한 탁자와 의자 들을 갖춘 집무실에 앉아 몇 시간씩 기다렸다. 군기대신들과 회의가 끝나면 두 태후는 전국 각지에서 온 관리들을 접견했다. 어린 동치제가 장막 앞의 옥좌에 앉아서 신하들을 마주하노라면, 그의 뒤로 두 황태후가 희미하게 보였다. (…) 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서태후였다. 그녀는 아주 권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후궁 지역에 있을 때 그녀는 생기가 넘치고 웃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환관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서 건청궁으로 갈 가마가 대령되었다고 알리면 그녀는 웃음을 싹 거두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장막이 중간에 가로막고 있었지만 신하들은 당당한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녀도 신하들의 인품을 잘 파악했다. 서태후를 만나본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우리의 생각을 읽는 것 같았다’고 말했고 또 ‘그녀는 딱 보면 상대방의 성격을 간파하는 것 같았다’는 말도 했다. --- pp.96-97

세관을 개혁하다
하트의 지휘 아래 중국 세관은 노후하고 부패한 조직에서 잘 정비된 근대적 기관으로 탈바꿈하여 중국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1865년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세관은 중앙정부에 3200만 테일이 넘는 돈을 올려 보냈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배상금은 이 관세 수입으로 지불되었고 1866년 중반부에 완불되었는데, 배상금이 국가 전반에 미친 고통은 미미했다.
새로운 부(富)가 확보되자 서태후는 대규모로 식량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지 못했기에 곡식 수출을 금지했다. 1867년부터 세관 기록부는 무관세 수입품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1867년에 주식인 쌀 수입은 110만 테일어치였다. 식량 조달과 구매는 하트 휘하의 세관이 맡은 주된 업무였다. 서태후는 이 업무를 총 지휘하는 하트에 대하여 각별한 신임을 보냈다. --- p.108

새로운 교육기관을 도입하다
중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은 동문관(뒷날 북경 대학이 되는 학교)이었다. 이 대학은 서태후가 집권한 직후인 1862년에 설립했는데 통역사를 육성했다. 설립 당시에는 별 반발이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외국인들을 상대할 대 통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학교는 그림 같은 건물을 자랑했다. 대추나무들, 우거진 라일락과 영춘화 사이로 학과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다가 1865년에 서태후가 공친왕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학까지 가르치는 정규대학 과정으로 승격시키려 하자 주위에서 격심하게 반대했다. 지난 2천 년 동안 유교 경전만이 교육상 적절한 학과 과목으로 여겨져왔던 것이다. 서태후는 ‘중국의 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서방의 방법을 빌려오는 것(中體西用)’이며 ‘옛 성현들의 신성한 가르침을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다(東道西器)’라고 하면서 그 결정을 옹호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유교 경전을 외운 덕분에 현재의 지위에 오른 관리들을 납득시키지 못했고, 그들은 총리아문과 공친왕을 ‘서양 놈들의 앞잡이’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도시의 성벽에는 공친왕을 비난하는 낙서가 자주 등장했다. --- p.119

서양 각국에 대사를 파견해 외교력을 확장하다
서방국가들에 대사를 파견하는 것은 서태후의 일관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메울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외국어를 말할 수 있거나 외국 사정에 밝은 관리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1867년, 북경 주재 미국 공사인 앤슨 벌링게임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공친왕은 벌링게임을 유럽과 미국의 특별 대사로 임명하는 안건을 상신했다. (…) 서태후는 파격적으로 그 제안을 즉각 수락함으로써 벌링게임은 서방을 상대하는 중국 최초의 대사가 되었다. 청 제국은 그에게 공식 임명장과 인장을 주었다. 벌링게임의 임무는 새로운 중국을 세상에 알리고 새로운 외교정책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 손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거나 제지하면서 중국에 혜택이 되는 것은 적극 동의하는 것’이었다. 그의 수하에는 두 명의 중국인 지강과 손가곡이 따라붙었는데 모든 문제에 대하여 이들과 협의하기로 되었다.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중국 측에 문의해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각국의 외교관 한 명씩을 이 사절단의 서기로 초청했다. --- p.127

권력에 대한 집착인가 제국을 위한 충정인가
서태후가 곧 권좌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은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는 개혁파를 경악하게 했다. 그녀의 정력적인 제안과 추진력이 없다면 그녀가 시작한 각종 개혁 사업들은 흐지부지될 수 있었다. 여러 날 동안 이홍장은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또 ‘지속적인 공포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는 순친왕에게 편지를 보내 서태후가 좀 더 권좌에 머무르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호소했다. 순친왕도 아들 광서제가 서태후의 대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서태후가 황제의 ‘후견인’으로 몇 년 더 정사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아들에게 압력을 넣어 서태후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은퇴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게 했다. 서태후는 군기처를 움직여 관리들의 호소문을 작성케 함으로써 그 운동을 측면 지원했다. (…) 서태후는 양아들의 정신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옹동화에게 광서제를 안정시켜 학과에 다시 집중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조상들에 대한 의무’ 때문에 권력 이양을 잠시 미루는 것이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광서제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원명원 복원을 향한 집착
이화원의 여흥이 즐거움을 줄수록, 서태후는 더 큰 심적 고통을 느꼈다. 비겁한 남자들이 일본에 그 큰 배상금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도 폐허가 된 원명원을 얼마나 멋지게 복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다 얼마나 많은 근대화 계획을 추진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비겁한 남자들을 질책하는 것을 자제하던 서태후는 격분에 휩싸였다. 어느 날 그녀는 엄청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면서 호부 상서 옹동화에게 원명원을 복원시키고자 하니 아편세를 거두어 전부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1860년 공인된 이래 중국의 많은 땅에서 아편이 재배되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세입은 상당한 규모였다. --- p.326

강유위의 서태후 살해 음모
광서제가 자신의 마력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자, 강유위는 황제에게 보낸 비밀 편지 가운데 하나에서 자신이 오해했으며, 자신은 절대 공자가 과거에 황제로 등극했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았다고 열심히 해명했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를 노린다는 생각을 지워내려 애썼다. 광서제가 마침내 유혹에 넘어왔고, 강유위는 황제를 배후에서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최초의 인형 조종가가 되어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 노선은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서태후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서태후를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 p.355

서태후와 광서제의 도피
서태후는 머리에 쪽을 찌고 궁중에서 자주 입던 면으로 된 수수한 푸른 겉옷을 걸친 뒤 노새 마차를 타고 도피를 시작했다. 한여름이라 그녀의 옷은 땀이 흐르는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땀을 흘리는 노새와 짐 때문에 파리와 온갖 곤충이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서태후는 1천 명에 이르는 수행원들처럼 온몸이 비에 흠뻑 젖지는 않았지만, 마차가 진창 위를 지나가면서 거세게 흔들리는 바람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나중에 누군가 노새 두 마리가 싣고 가던 의자를 가져와서 서태후는 조금 편안해졌지만 평탄치 않은 길에선 여전히 의자가 흔들렸다. 다리가 없는 범람한 강을 건널 때, 호위병들은 그녀가 앉은 의자를 어깨에 메고 건넜다. 하지만 물살이 빨라서 서태후는 거의 휩쓸릴 뻔했다. --- p.429

서양인들과의 친교
격식을 갖춘 알현이 끝나자 모든 부인과 아이들은 편안한 분위기의 연회가 준비된 또 다른 회장으로 안내되었다. 서태후는 세라 콩거를 찾았는데, 그녀는 이에 관해 기록을 남겼다. “황태후는 격정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내 양손을 잡았다.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이 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일들로 인해 나는 몹시 슬프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실수였지요. 앞으로 우리 청나라는 외국인들과 친구로 지낼 것입니다. 지난 일과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청은 외국인을 보호할 것이며, 앞으로는 서로 친구로 지내길 바랍니다.’” 그것은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동시에 진심 어린 맹세였다. --- pp.475-476
타운리 부인은 서태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드시고 계신 그릇을 선물로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물론 아무도 통치자의 식기를 가질 수 없다는 궁중 예법을 잘 알고 있었다. 타운리 부인의 요청은 그야말로 모욕적인 것이었다. 나중에 서태후는 한 궁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청나라 사람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러니 유럽 사회에서 하는 것처럼 신경 써서 행동하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그녀는 많은 서양인들이 의화단사건으로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런 모욕도 꾹 참으며 타운리 부인에게 그릇을 선물했다. --- pp.475-476

여성 평등과 교육제도 개혁을 위한 조치를 취하다
다시 한 번 서태후는 강압보다는 설득과 홍보를 통해 여자들을 가정과 남녀 구분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근본적인 유교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대중 앞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극장에 가기도 하며, 전례 없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서태후는 특히 여성들도 현대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총독, 고관, 귀족 들이 솔선하여 여학교를 세우고 기금을 낼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했다. 이어 황태후는 귀족 여성을 위한 학교를 개별적으로 설립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그녀가 세운 학교의 교장은 영수 공주가 맡았다. 황태후의 또 다른 계획은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해 졸업하는 여성은 황태후의 학생이라는 호칭을 부여받는 영광과 특전이 주어졌다. --- p.499

서양식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다
중국 사회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제국을 통치하는 엘리트를 선발하는 교육체계(과거)인데 이마저도 결국 폐기되었다. 과거의 교육체계는 근대화를 방해하는 것이었고, 중국의 전반적 사상 체계에도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교육개혁은 몇 년 동안 서태후의 의제이기도 했다. 그사이에 그녀는 점진적으로 대안 교육체계를 설립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물론 민간 영역에서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우회로가 생겨났다. 1905년에 최종적으로 과거가 폐지되었을 때 1천 년을 넘게 중국의 정치 기반을 형성하던 거대한 기둥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붕괴되었다. 새로운 교육체계는 서양식 교육체계에 기반을 두었다. 전반적인 교육 과목이 도입되는 가운데 비록 교과과정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중국의 고전도 살아남게 되었다. 1905년, 유럽식 교실, 도서관, 체육관을 갖춘 신식 학교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영어를 말하는 교사들의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본 세라 콩거는 놀라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수만 명의 교육받은 청년들이 졸업한 뒤 광대한 인구 속으로 스며들면 장래 중국엔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 pp.500-501

언론의 자유를 구현하다
그녀는 급격히 늘어나는 언론의 불경不敬 사상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언론 자유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를 역모로 간주하고 옛 국법으로 주모자를 처리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으므로 서태후는 그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유학을 가서 온갖 불경스러운 사상을 배워 오니 유학을 중단하거나 억제하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그녀는 이를 듣는 것조차 거부했다. 서태후는 대신 서양과 일본식의 법률과 규정으로 언론을 통제하기로 했고, 이런 시도는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20세기에 들어서자 중국어로 된 신문과 잡지 발행이 크게 증가했다. 제국 전역의 60군데 이상에서 수백 개의 신문과 잡지가 생겨났다. 자금만 있다면 누구든 신문을 낼 수 있었고, 아무도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려 하지 않았다. --- p.…) 서태후가 보인 자신의 정부와 자신에 대한 공격에 인내하는 모습과 다양한 관점을 기꺼이 허용하는 모습은 전임자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또 후임자들과 비교해서도 틀림없이 관대한 것이었다. --- pp.503-504

입헌군주제를 위한 첫걸음
1907년에는 의회 준비기구인 ‘자정원’이 설립되어 과도기의 의회 역할을 수행했다. 의원 구성을 포함해 미래 의회의 설립을 위한 규정 입안엔 열 달이 걸렸다. 이 안은 1908년 7월 8일 서태후에 의해 승인되고 선포되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의원이 상원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군주에 의해 만주족 친왕, 만주족과 한족 귀족, 몽골, 티베트, 회족(이슬람) 귀족, 중간 계층 관리, 저명한 학자, 고액 납세자 중에서 지명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하원에 참석하게 되는데, 지방의회의 의원 중에서 선출되었다. 지방의회는 중국 전역에 설립되는 중이었고, 이 지방 의원은 지방민들이 직접 선출했다. 지방의회 선거를 위한 선거 규정안은 1908년 7월 22일 서태후의 승인을 받고 공표되었다. --- p.522
서태후가 만든 입헌군주제에서 중국 유권자들은 서양의 유권자들만큼 권력을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이 무자비한 전제 군주제에서 탈피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정부의 문호를 개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국민이 된 것이었다. 서태후는 앞으로 자신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중국 정치에 협상의 장을 도입하게 될 것이었다. 군주와 다양한 이익집단을 대표하는 국민대표는 그 장에서 협의하고, 흥정하고, 또 논쟁도 벌일 것이었다. 서태후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의 공정함과 합의를 선호하는 성격을 생각하면 국민들의 소망은 계속해서 폭넓게 수용될 것이었다. --- p.524

당시 조선의 상황과 일본의 야욕
1907년 여름, 일본은 대한제국을 거의 합병했다.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하고 그의 아들 순종이 즉위했는데, 고종이 일본인 ‘고문’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고문은 다름 아닌 전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였다. 을사조약으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초대 통감이 되어 자신의 승인 없이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2년 뒤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하여 ‘가혹한 통치로 인해 대한제국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고 보도했다. 서태후는 이토가 조선 통감으로 승진한 모습을 보고 1898년의 일을 떠올렸다. 이 ‘일본을 세계열강의 반열로 끌어올린 주역’은 그 당시 광서제를 거의 통제할 정도로 가깝게 다가와 있었으며 만약 이토가 광서제의 고문으로 취임했다면 중국 역시 또 다른 대한제국이 될 수도 있었다. --- p.542

최후의 순간을 예감하다
실제로 서태후는 자신의 개혁으로 청이 급격히 변할 것을 예견했고, 이로 인해 제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한 만주족 황제는 보장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망하면 계승자는 아마도 그녀와 같은 힘을 가질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도입하려던 입헌군주제는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청나라는 물론 서양인들도 진작에 서태후가 죽고 나면 반만주 봉기가 터져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동족인 만주족의 운명은 임종의 순간에도 서태후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p.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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